공동체의 발생과정 – 영년 [기획회의 351호]

!@#… [그의 나라]와 달리, 이번에는 완결까지 가기를 매우 희망.

 

공동체의 발생과정 – [영년]

김낙호(만화연구가)

사람이 한 명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나머지 세상을 상대로 살아남기 바쁘지만, 두 명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매 사안마다 저울질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명 이상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오래 전에 사회학자 짐멜이 꼽았듯 관계의 방정식은 단순히 좀 더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질적으로 달라진다. 그런 복잡한 역학들을 그나마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점차 나름의 무형, 유형의 룰들이 만들어지며, 하나의 사회 공동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박흥용의 신작 [영년](박흥용 / 김영사 / 1권 발간중)은 한국전쟁 직후 한 마을민들의 피난과정을 통해서, 한국이라는 국가 공동체에 대한 우화를 시도한다. 50년대 초, 돌팔매 싸움으로 유명한 한 시골 마을에도 6.25의 풍파가 찾아온다. 남북 양쪽의 이념을 내세우며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이념과 관계없이 그냥 조금 더 원활하게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들에게도 엉터리 꼬리표를 붙여서 흑백논리 속에 여하튼 죽음이 오는 세상이 되어버린다. 한쪽의 복수는 다른 보복을 낳고, 애써 정착하려고 노력한 바들은 전쟁통에 잿더미가 될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기 위한 희망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동네 바보가 살해당하기 전에 일러주었던, 징용노동자들이 숨겨놓았다는 대량의 군량미다. 그 곳을 찾아 마을민들은 여정에 나서게 되고, 그들을 뒤쫗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것을 노리는 다른 집단들이다.

출판사 홍보의 다소 호들갑스러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후 18년, 한국 만화의 거장이 돌아온다”는 카피와 달리, 사실 작가는 꾸준히 흥미로운 작품들을 작업해오며 옛 사회의 정취, 여정길, 구도 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왔다. 그런데 그 중 유난히 야심찬 스케일이면서도 안타깝게도 연재 초입에 중단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소년/청년지에 실렸던 [그의 나라]다. 그 작품은 어느날 갑자기 전쟁으로 인한 것인지 세상이 붕괴되어, 뛰어난 돌팔매 실력을 지닌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그 폐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야기인데, 설정에서 흔히 상상할만한 단순한 생존물에 머물지 않았다. 사회의 근간이 없는 시대에, 사람들이 모여서 식량과 구호물품이 있는 지역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기독교 구약성서와 거의 직접적으로 대치시켜가며 풀어나갔다. 출애굽기의 틀을 빌려 사람됨이란 무엇인가, 다시말해 공동체의 의미에 도전한 것이다. 그 때 시작하고 결국 전혀 수습하지 못했던 그 화두를, 멸망SF가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특정 시점으로 압축하고 마을민 공동체라는 훨씬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다시 한 번 정제해 낸 격인 작품이 바로 [영년]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피난민들의 선두에 서있는 주인공격 소년의 필살기는 돌팔매다(여러 작품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기독교적 모티브를 생각할 때, 어찌보면 당연하다 싶다).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유일하게 장소를 알고 있는 젊은 아가씨다. 지금의 지옥에서 벗어나 풍족한 군량미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마을민들은 전략과 규칙들을 하나씩 세워나가면서 움직이게 된다. 남북 두 군대 또는 기타 세력에게 검문당해 목표를 들키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큰 길로 움직인다. 마을민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배신자, 즉 다른 더 작은 집단과 손을 잡고 군량미를 독차지하려는 이들로부터 인도자를 호위하기 위해, 돌팔매 소년만이 그녀를 근거리에서 대동한다. 물론 이 정도의 룰에 도달하는 것조차 면밀하고 원활하지 않아서, 피난행렬에 가져온 각 가족의 식량을 둘러싼 다툼, 배신자의 존재를 두고 서로에 대한 의심 같은 것이 늘 도사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 즉 행렬을 돌팔매로 공격하여 죽이고자 하는 집단이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

외부의 위협, 공동의 목표 속에서 공동체의 자기 조직화가 발생하는 것은, 대단한 사회체제 이념들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과 마을민이 피난길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이런 지점을 통렬하고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도대체 왜 이 나라는 왜 외국놈들이 들어와 지랄하는 나라가 되었느냔 말입니다.”
“이 나라는 일제강점기로 주권을 빼앗기면서 나라가 무엇인지 새삼 깨달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소련과 미국의 팽창주의까지 밀려들어오게 되어, 공유와 사유라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라의 틀까지 고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공유의 나라냐 사유의 나라냐 그 선택의 갈등이 바로 이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나라가 힘이 없어서 이런 꼴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일부 중략)

현상들과 사건들은 커다란 이념틀과 난해한 체계의 이름을 빌려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적용되고 이해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소박하고, 종종 구멍이 선명하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 외국놈들이 지랄하는’ 것에 문제의 원인을 돌리지만, 정작 마을을 붕괴시킨 것은 같은 한국인들이었으며 그 중 상당수는 바로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이 진영을 가르고 보복과 보복의 연쇄로 맞물린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소박한 몇 가지 바람들과 현실적 제약 조건 속에서 어떤 식으로 결속할 수 있는지 아래로부터 찾아나설 수 밖에 없다. 자기가 힘들여 얻어낸 땅과 식량 같은 것을 뺏기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규범이라든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때로는 함께 나눠야 한다. 무사하고 평화롭게 가족과 지인들이 군량미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지만, 그 과정에서는 야만적인 돌팔매로 서로의 머리를 깨야한다는 행위도 나설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들에게 공유의 마을이 될 것이냐 사유의 마을이 될 것이냐 거대한 이념적 추상의 범주에서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쪽으로, 조절해나갈 따름이다. 개인의 ‘구도’행위가 신선으로 등극한다는 결과가 아니라 구도의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이듯, 공동체의 구도 역시 이상적 행복사회가 아니라 갈등의 인식과 조율의 과정에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영년]은 직접적 훈계를 줄이고 각 상황들의 미묘한 중첩성을 가득 보여주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해볼 여지를 준다. 이런 것을 직접 뒷받침해주는 표현, 즉 동세가 있으나 정적인 느낌의 그림, 여러 서로 다른 장면들이 긴 설명 없이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전환 연출, 롱테이크의 느낌이 살아 있는 긴 대화 장면 등 만화의 형식미학에 일찍이부터 강세를 보여온 작가 특유의 솜씨 역시 여전하다(다만 컬러의 사용은 다소 평면적인 느낌으로, 그다지 효과적으로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는 느낌이 살아나지 않다). 아직 첫 권만이 출간된 상태지만, 국가에 대한 거창한 화두를 직접적 훈계로 풀어낸다든지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현재의 전개속도와 거리감을 유지한다면 명작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는 작품이다.

영년 1
박흥용 지음/김영사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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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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