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를 포용하는 자들 – 『마녀』[기획회의 080115]

!@#… 모 나라 모 인수위 분들은 심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 하니, 그들과 우리 세상을 소통시켜줄 ‘마녀’들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두 세계를 포용하는 자들 – 『마녀』

김낙호(만화연구가)

마치 아기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세상의 전부로 믿기 때문에 눈을 가리면 모든 존재가 사라진 듯한 공황에 빠지듯, 우리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이곳의 자연법칙들이 세상의 전부다. 그런데 간혹 이쪽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사기꾼인가 아니면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는가를 떠나서, 다른 세계의 이치와 소통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상 경이와 두려움을 동시에 산다. 그 결과, 어떤 경우에는 초월적 존재로 존경받거나 더욱 많은 경우 박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한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로서 권위로 다스리는 제사장이 아닌 좀 더 일상적 영역에서 그런 소통을 일삼는 것은 대체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이 맡곤 한다. 물론 여러 사회적 조건 맥락들이 맞아 떨어져서 그렇겠지만, 여기에는 여성상의 스테레오타입이 개입된다. 논리와 이치에 목숨을 걸며 자연의 지배자 역할을 자처하는 남성상과 대비되는, 다른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감성으로서 공감해주는 하나의 전형으로서의 여성상 말이다. 사회적 일상에서 약자에 가까운 위치에서 다른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중개하는 역할을 맡은 그녀들은 각각의 시대적, 공간적 맥락에 따라서 때로는 무당, 무녀, 혹은 마녀라고 불렸다.

만화 『마녀』(이가라시 다이스케 작/김완 옮김/애니북스/전2권)는 여러 종류의 ‘마녀’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독립된 연작 단편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낸 환상 만화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마녀는 검은 옷을 입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초록 피부의 할멈들이 아니다. 그저, 다른 세상과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혹은 원래 누구나 가지고 있었을 그 능력을 다시 발견해낸 가지각색의 여성들이다. 어릴 적 사랑의 실패를 간직하고 원한을 품어 흑마술의 고수가 된 여사장에서 현대 일본의 여고생을 거쳐 아마존 열대우림의 무녀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우리 세계의 법칙을 넘어서는 다른 원리를 가지고 여기 공존하는 세상과 교류한다. 이들이 교류하는 그쪽 세상은 숱한 장르물에서 이야기하는 마계나 영계 같은 인간 세상의 비유적 (심지어 다분히 관료적) 반영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이치로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큰 흐름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 이질적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이쪽 세계에서 힘으로써 활용할 수 있기에, 각각 다른 세계와 소통하는 두 마녀가 대결을 벌이게 되는 에피소드도 있고, 아마존의 마녀가 광활한 환상의 힘을 끌어와서 현대의 침략자들로부터 밀림을 지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우주 비행사의 몸을 통해서 지구에 온 생물을 퍼트리는 원형질의 돌로부터 인간세계를 구해내려는 베테랑 마녀의 이야기도 있다. 혹은 큰 흐름 속에 윤회를 반복하는 자신을 깨닫는 한층 추상적인 내용의 단편도 있다.

생명의 돌이라는 서구의 각종 신비주의적 모티브가 집약된 소재를 다루는 에피소드 ‘페트라 게니탈릭스’에서 주인공은 마녀라는 존재에 대해서 “언어가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그 두 세계를 잇는 자”라고 칭한다. 언어로 설명해낼 수 있는 법칙의 이쪽 세계와,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오감으로 느껴야하는 다른 세계를 같이 살아나가는 자인 셈이다. 절묘하게도, 이 작품을 담아내는 만화라는 형식이야말로 그 컨셉에 가장 적절하다. 언어로 된 활자의 세계와 시각적 묘사의 세계를 이어내면서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이니까 말이다. 시적인 대사와 스토리 전개 같은 언어적 영역의 뼈대가 작품의 서사적 재미를 받쳐준다면, 강력한 시각연출이야말로 이 작품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볼펜화로 그려낸 우둘투둘하고 열린 선이 주는 이질적 공간감이 전편에 깔려있는 것은 물론, 다른 세계의 이치에 따른 기이한 형상들이 이쪽 세상 속에 화려하게 발현되면서도 전혀 겉돌지 않는 시각적 쾌감이 있다. 정적인 듯 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에 크게 터트리는 박력 넘치는 칸 연출이 특히 발군이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부정형의 광경을 만들어내어 그 속에 이질적이면서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경이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데, 작품의 세계관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자들은 환상문화 장르의 기본이다. 그 중에서도 순수한 경이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라면, ‘벌레’라는 원형적 생명의 존재들을 다루는 또 다른 명작 『충사』를 연상할 수도 있다(실제로 작가가 『마녀』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완성도 높은 환상 만화들은 종종 그 쪽의 경이로운 세계를 외부인으로 관찰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곤 한다. 그런 관찰은 차분하게 바라보는 식이 될 수도, 소동에 휘말리는 식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이계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정작 도구화되곤 한다. 하지만 『마녀』의 주인공들은 신비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세계와 깊게 소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자신들이 받을 딛고 살고 있는 인간 세상에 대해서도 애정을 깊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있다. 물론 그들은 누군가를 위한 통역자는 아니다. 스스로는 다른 세계와 소통을 하되, 그 소통을 이쪽 세계의 다른 이들에게까지 열어주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거나, 아니면 한 때 시도했을 법하지만 현재는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쪽 세상의 무지와 두려움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마녀들에게는 사람의 인연이 있다. 연인, 후임자, 가족 등의 관계라는 인간 세상의 관계를 소중히 하기에, 자신들을 고고하게 고립시키지 않는다. 그녀들은 소통자로서 중립을 지키고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세상을 모두 보듬어 안으려는 모습에 가깝다. 그렇기에 각 이야기에는 단순히 기이한 놀람의 감정 이상으로, 은근히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 낯선 소재에 의존하는 기담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을 담아내는 깊이 있는 성찰이 되어줄 수 있다.

한국어판의 출판 품질 역시 작품의 품격을 의식했음이 드러난다. 시적인 언어를 제대로 구현한 번역의 품질도 상급이고, 거친 선들을 잘 살려내는 말끔한 인쇄 역시 칭찬할만 하다. 다만 너무 신경을 많이 썼는지 들어간 2권 말미의 마녀의 역사에 대한 해설은, 좋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분석적 이해보다는 포괄적 포용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스타일과 배치되기에 옥의 티로 남을 듯 하다.

『마녀』는 단순히 두 세계의 사이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며 양쪽을 포용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다. 표현력에서도 풍부한 감성적 깊이의 접근 방식에서도, 환상문화 장르에 확실한 족적을 남길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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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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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두 세계를 포용하는 자들 – 『마녀』[기획회의 080115]

Comments


  1. 순서대로 열거해본 감상들.

    *오오 캡선생께서 이런 흥미로운 주제로 글을 쓰시다니 과연…….아니 만화 감상문이잖아.
    *오오 의외로 이 만화 캡 괜찮아보이는걸 재미있겠다
    *엄청 비싸겠네..흑

  2. !@#… nomodem님/ 모 나라에 눌러앉아있다보니 깨닫는 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한국은 만화책 값이 조낸 싸다는 겁니다. :-)

  3. 모 나라 윗 나라에 눌러사는 동생들과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맞아요 한국이 정말 엄청 싸지요…상대적인 인쇄질이나 엮어놓은 형태도 우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