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황제들의 도시

!@#…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capcold에게 영향을 준 책 톱10을 뽑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을, 끝없는 깊이를 자랑하는 독일 판타지문학. 바보같은 어린이 영화판으로 나와서 이미지가 좀 구려지기는 했지만. 줄거리는 대충 생략하고, 요새 그냥 한 대목이 머리속에 자꾸 어른거려서 잠시 끄집어내본다.

!@#… 한참 후반부의 이야기: 주인공인 소년 바스티안은 책 속에 존재하는 판타지엔이라는 환상세계에 들어가버리게 된다. 그런데 그 곳에 간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소원을 빌면 그것이 실현이 되기 때문에, 바스티안은 일종의 절대자로서 모험을 즐기고 다녔다. 문제는 소원이 실현되면 그 댓가로 현실의 기억을 하나씩 잃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모든 기억을 잃고 나면 더 이상 소원을 빌 수 없다(소원은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알고보니, 바스티안 이전에 있던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황제처럼 살며 소원을 남발하다가 결국 기억을 잃고, 상상계의 폐인이자 자아를 잃어버린 광인으로 어느 도시에 모여서 살고 있었다. 원래는 이름없는 도시지만, 속칭 “옛 황제들의 도시”라고 불리운다.

그 곳에는 다수의 남녀노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훌륭한 옷을 입었으나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각자 완전히 홀로였다. 바닥에는 수많은 커다란 주사위가 놓여있고, 각 주사위의 면에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사람들은 계속 새로 이 주사위들을 뒤섞고는, 한참동안 그것을 쳐다보곤 했다.
“뭘 하고 있는거지?” 바스티안이 속삭였다. “도대체 무슨 놀이야? 제목이 뭐야?”
우연놀이라고 해” 아르각스가 대답했다. 그는 게임 참가자들에게 윙크를 하고는 외쳤다: “착하지, 얘들아! 계속 그렇게 해! 포기하지마!”
그리고 다시 바스티안을 향해 보며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언어를 잃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이 게임을 내가 고안했지. 보다시피 시간을 죽이거든. 게다가 무척 쉬워. 한번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26개의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조합만 바뀔 뿐이지. 그 글자들로 단어가 만들어지고 단어로 문장, 문장으로 단원, 단원이 이야기가 되고. 봐, 저기 뭐라고 쓰여있지?”
바스티안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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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르각스가 킥킥거렸다. “대부분 저렇지. 하지만 아주 오래, 수년 동안 저 놀이를 하다보면, 우연히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해. 특별히 뜻깊은 단어 따위는 아니라도, 적어도 단어말야. ‘시금치 마비’라든지, ‘칫솔소세지’라든지 ‘옷깃코팅’ 같은 것. 하지만 백년이고 천년이고 만년이고 계속 하면, 확률상 우연히 한번쯤은 시도 만들어질 수 있지. 그리고 영원히 하다보면 세상에 가능한 모든 시, 모든 이야기들이 나오고, 모든 이야기의 이야기, 심지어 우리가 지금 대화중인 이 이야기도 나올지 몰라. 논리적이지 않아?”
“끔찍해” 바스티안이 말했다.
“뭐”, 아르각스가 대꾸했다. “관점에 달려있지. 저 사람들은 무척 열심이니까. 게다가, 여기 판타지엔에서 저들을 데리고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어?”
(번역: capcold)

!@#… 왜 이 대목이 떠올랐냐 하면… 이명박 정부 인수위의 무척 랜덤한 정책안 난사 행태를 보다보니까. ‘이야기‘를 ‘말이 되는 정책‘으로 바꾸어 다시 읽어봅시다.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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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옛 황제들의 도시

Comments


  1. 정말 이렇게 혼잡스런 인수위도 드문 것 같다는(…)
    저기 그런데…갑작스레 죄송하지만 메일 확인해주실 수 없습니까? 급한 일이라T_T

  2. !@#… 시바우치님/ 핵심은 ‘랜덤’. 메일은 답장 방금 쐈습니다~

  3. 아, 이책 정말로 재미있었찌요. 어릴때 읽었던 세계 명작집! 거기에 이런 것도 들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왠지 ㄷㄷㄷ.

  4. 그 왜 그것도 있지요. 원숭이 몇마리를 타자기 위에 올려놓고 마구 밟게 하면 언젠가 셰익스피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던가요? (그리고 딜버트의 시를 독버트가 평하길 ‘두마리, 5분’이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었고요^^;)

  5. !@#… dcdc님/ 하하, 그 딜버트 에피소드 기억납니다. 물론 저는 이 책의 비유가 참 마음에 들었던 것이, 여러 층위에서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요. 예를 들어 “각자 완전히 홀로였다” -> 황당한 정책안에 대한 반발 여론이 끓어오르면 항상 “인수위의 입장이 아니라 그 위원의 개인 견해”라고 하는 말을 믿자면, 토론이고 조율이고 뭐고 없다는 이야기죠.

    기린아님/ TV에서는 천년여왕을 해주다가 중단시켰을 정도의 ‘별 생각들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nomodem님/ 사실 이 만담도 랜덤하게 주사위를 굴려서 만든…

  6. 인수위가 영원히 주사위 굴리게 내버려둘만큼 대한민국이 한가하지 않다는 게 약간의 문제가 되겠군요. 대통령 임기가 5년밖에 안 되는 것도 좀;;

  7. 수만 마리의 원숭이가 타자를 쳐도 셰익스피어 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도 몇백만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데…
    5년안에 셰익스피어가 나올수 있을런지 모르겠군요.

  8. !@#… 보라/ 하지만 그 사람들, 세 배 빠르게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는… 계속 주사위만 던지는 거지만.

    언럭키즈님/ 이런 기사를 보면, 랜덤하게라도 혹시나 명 정책을 만들어낼까봐 두려워서 최선을 다해서 멍청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