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생활이 하나 가득 – 『을지로 순환선』[기획회의 220호]

!@#… 이런 책은 사실 3권을 사야 한다. 한 권은 고이 소장용, 한 권은 폼나는 선물용, 한 권은 조각조각 분철해서 벽에 걸어놓기용. 실물 책을 보기 전에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PDF본으로 봐도 상당히 느낌이 좋던데, 홍보용으로 월페이퍼 모음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듯. 여튼 서가에 오래오래 꼽혀있어야 할, 좋은 (만)화집.

 

사람들의 생활이 하나 가득 – 『을지로 순환선』

김낙호(만화연구가)

지하철 속,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각자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있고 통로에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설교하고 있다. 창밖으로는 달동네, 곳곳의 빌딩, 그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는 이들과 노는 아이들이 있다. 혹은 와우산 달동네가 널찍하게 펼쳐진 모습, 다닥다닥 붙은 수많은 집들 사이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무언가를 하고 있다. 또 다른 장면, 학교가 끝나고 학원으로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옮겨가려는 풍경을 위에서 살짝 바라보듯 잡아낸다. 아니면 두 도시 가운데 놓인 길 한 토막을 놓고 옥신각신 하면서 결국 무언가를 공사하는 모습도 있다. 이런 풍경들은 그림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길지 않은 한마디의 설명과 결합하며 진가를 발휘하기도 한다. 허름한 쪽방 집 아이들이 헌 의자를 놓고 노는 모습에 달려있는 짧은 문장 하나. “울 아빠 10년 다녔다는 회사 망하고 월급 대신 가져온 중역의자. 마당의 우주정거장.” 그 작품들 속에는 우리네 삶,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양한 풍경이 있고 그 속에는 항상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구질구질하게, 때로는 짠하게, 보통은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담긴 채로 말이다.

독특한 느낌의 현대 풍속화, 따뜻한 한국적 정서의 아동 그림책, 그리고 다수의 인권 지향 만화들로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작가 최호철의 첫 그림 작품집 『을지로 순환선』(최호철/ 거북이북스)가 출간되었다. 우선 굳이 꺼내기 귀찮아서 생략할 이야기부터. 최호철의 작품들을 이야기하면서 브뤼겔의 영향이니 김홍도식 서민적 풍경의 현대판이니 하는 이미 나올 대로 나온 비평적 맥락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민중 미술판에서의 경험이 형성한 주제의식, 만화적 기법의 시작 등에 대해서도 되짚을 이유가 많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작품들이 회화와 만화의 경계선상에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한다. 그런데 회화냐 만화냐 (나아가, 그렇기에 회화로서 무엇이 아쉽고 만화로서 무엇이 부족해 보이는가) 그런 식의 논의는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애초부터 큰 의미는 없다. 회화로서 보이고자 원본이 액자 씌워져서 벽에 걸리는 순간 회화고, 하나의 그림 이야기로 읽히기 위하여 책에 인쇄되어 나오는 순간 만화의 범주로 건너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왕 책으로 나왔기에, 핵심은 역시 한 권의 책, 만화 작품집으로서 얼마나 의미 있고 재미있게 읽혀주는가라는 지점이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대표작 큰 그림부터 작은 일상적 스케치까지, 꼼꼼하게 작품들을 수록했다. 본서는 다섯 가지 섹션인 ‘우리 사는 풍경’, ‘일하는 사람들’, ‘큰 세상, 작은 목소리’, ‘우리 집 이야기’ 그리고 ‘스케치로 담은 기억’으로 이루어져있다. 각양각색의 풍경들 속에서 항상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역시 평범한 사람들의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것이다. 섹션들은 부록의 느낌이 강한 스케치 모음 부분을 제외하고는 주제별로 나뉘어져 있으나, 작품들은 서로 다른 발표 방식이나 지면을 거쳤기에 형식에서 크고 작은 차이가 난다. 실제로 여기 모인 작품들은 회화 작품으로서 미술관 전시를 염두에 두고 발표된 것도, 시사주간지의 한 칸 만화도, 일상적 스케치에 가까운 것도 포함되어 있다.

스타일은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하나는 작가를 널리 알려지게 한, 광각으로 그려내는 대형 회화 작품들이다. ‘을지로순환선’이나 ‘와우산’ 등이 대표적인데, 하나의 순간을 묘사하는 큰 폭의 그림 속에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촘촘한 디테일로 배치된다. 살짝 왜곡된 구도와 화려한 다채로운 색감에서 오는 시각적 화려함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을 이끌어가며 하나의 공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강한 매력이 있다. 내용은 별다른 내용을 직접 언급하기보다 사람 사는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향에 가깝지만, 그 살아가는 모습이 스스로 주제가 되어준다. 다만 애초에 더 큼지막하게 벽에 걸어놓고 볼 것을 전제로 완성된 작품들이기에, 책이라는 형식으로 볼 때 느끼는 답답함(특히 대부분 양면에 걸쳐있기까지 하다)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책으로 전체 독서과정으로 한 장씩 넘겨보기보다, 뜯어내서 벽에 붙이고 싶어지는 부류랄까. 실제로 몇몇 작품들은 수년전 사회문화 비평지 『아웃사이더』에서 생활그림이라는 명칭으로 접이식 책내 포스터로 제공되기도 했다.

두 번째 부류의 작품들은 시각적 화려함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덜하겠지만, 직접적인 이야기 주제가 하나씩 담겨 있는 풍속화다. ‘돈이 자라는 땅 판교 택지 개발지구’, ‘3월의 초등학교 앞’ 같은 작품들이 이쪽에 속하는데, 이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사회현상이나 이슈를 주제삼아 그것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어떤 풍경을 잡아낸다. 때로 그것은 학원열풍이기도, 땅 투기 붐이기도, 찜질방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직접적으로 잡아낸다는 점에서 가장 전통적 의미의 풍속화 느낌에 가깝다.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사회를 세밀하게 바라보기에 자칫 신랄하거나 냉소적이 될 수 있을 법하지만,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드러내는 매력이 상당하다. 이 과정 속에서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성은 한층 정제되어, 모아서 책으로 읽기에 더욱 적합한 울림을 준다.

세 번째 부류의 작품들은 가장 독서로서 흡수하기에 좋은 질감을 지닌 것으로, 특정한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의 생활을 살짝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설명하는 시적인 설명 한 두 문장이 붙어서 그 생활의 맥락이 제시되고 이야기는 완성된다. ‘고물 수집’, ‘우산 장수’ 등의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세 가지 부류의 작품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때로는 큰 풍경을, 때로는 세밀한 클로즈업을 하며 각 주제별로 책의 흐름, 아니 우리네 현재 삶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일종의 보너스처럼, 일상의 때가 묻은 일기 같은 스케치들이 따로 한 개 장을 차지하여 이 모든 작품들이 그저 공방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생활의 현장에서 직접 얻어진 것이라는 그 과정을 살짝 엿보게 하며 생활을 다룬 작품과 생활을 살아가는 감상자 사이의 거리를 다시금 좁혀준다.

『을지로 순환선』은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접하기 힘들었던 최호철 작가의 여러 작업들을 큰 주제 맥락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가 서사만화 작업에서 가끔 보여주는 세상사의 노골적으로 어두운 단면들도 좋아하기에 서사만화 단편들이 빠지고 (만화적 기준으로 보자면) 한 칸 작품들로만 있는 것이 약간 아쉽지만, 반면에 풍경을 통한 생활의 이야기라는 핵심 컨셉이 그만큼 강하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마치 회화이자 만화인 작품들처럼, 책 역시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저런 삶의 단면들을 담아내고 그들 속에서 어떤 정서를 끄집어내는 화집이자 세태 에세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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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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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지음/거북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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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사람들의 생활이 하나 가득 – 『을지로 순환선』[기획회의 220호]

Comments


  1. 작년에 나온다길래 한해 내내 기다리다 지칠 무렵 출간이 됐더군요. 득달같이 주문해서 달콤한 시간을 보냈고, 앞으로도 보낼 생각입니다. 말씀 듣고보니, 선물용 추가구입을 고려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