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 최규석이 완성한 현실적 구차함 [IZE 140729]

!@#… IZE 송곳 특집한 꼭지.

 

현실적 구차함의 진화

김낙호(만화연구가)

[송곳]은 기본적으로 칙칙한 이야기다. 소재가 노동조합이라는 사실 너머, 노동관계로 맺어진 우리들의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 벌어지는 여러 세세한 모습들이 가감 없이 현실감 넘치는 구차함 가득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현실적 구차함이 최규석 만화의 핵심에 늘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완성형에 가까운 버전을 이번 작품에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구차함이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난다. 하나는, 세상은 선악의 다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권력을 누리고 욕심을 부리는 곳이라는 점이다. [송곳]의 독자들이 널리 인용하는 대사인 “서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에 담긴 정수는, 부하를 희생양 삼거나 노동자를 쥐어짜는 것은 악마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규석 작가의 오랜 주제로, 작품 활동 초기 단편 [선택]의 청년은 몽둥이로 철거민들을 쫒아내는 쪽을 선택했고, [습지생태보고서]의 반지하방 공동생활 주인공들은 돈만 생기면 왕놀이를 하고, [지금은 없는 이야기]의 여러 우화들은 착할 것을 강요하는 도덕률의 기만을 뒤집는다. 그가 그리는 세상의 도덕적 딜레마는, 한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의 공존한다는 식의 추상적 철학이 아니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데, 그것이 발현될 자리가 마련되는가의 문제다. [송곳]에 이르자, 우회적 관찰이나 비유를 넘어 자연스럽게 줄거리 속에서 정제된 메시지를 던지는 경지에 도달한다.

현실적 구차함의 다른 하나의 요소란, 바로 재주껏 버티거나 싸우는 자세다. 선한 명분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현실 속의 제한조건과 부딪히며 재주껏 해나가야한다. [송곳]은 이수인이 노조 규합이라는 실무에 뛰어들며 겪는 모든 상황의 통찰을 통해서 이런 주제를 구체적으로 공략한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따른다”든지, “섬을 떠나기 위한 조건은 다른 섬의 존재”라든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격한 항의의 표시로 사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끝까지 버텨버리는 것이 진짜 저항이라는 것까지, 구차하지만 현실적인 대처가 전면에 나선다. 거창한 노동해방 혁명이 아니라, 노동법을 들이밀고 규정을 역이용하고 집회신고 먼저 제출하기 달리기 경주를 한다.

이런 주제 의식 역시, 일관되게 작품 활동에서 발전해온 흐름이다. 한쪽으로는 비루한 현실에도 우선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시선이 있었다. [대한민국 원주민]의 우리 주변에 늘 있지만 시선에서는 밀려나 있는 그저 그런 빈곤한 사람들도, 혹은 [울기엔 좀 애매한]의 다소의 재능은 있지만 대단한 수준까지는 아닌 만화과 지망 미술학원생 원빈도, 나름의 자조적 자세를 장착하고는 어떻게든 살아가려 한다.

적응 너머 싸움에 나설 때도, 할 수 있는 만큼씩 할 수 밖에 없다. [백도씨]가 그려내는 6월 민주화운동은 치밀한 작전과 초인적 활약이 일궈낸 것이 아니다. 아들이 잡혀간 어머니가, 너무했다 싶어 시위에 합류한 넥타이 회사원들이, 선전물 인쇄하고 돌리는 것만으로도 목숨 걸어야했던 학생들이 각자 재주껏 하다보니 큰 물결이 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얻어낸 성공조차, 결국은 백지 투표 용지 한 장씩이라는 현실도 직면한다. 그런데 [송곳]에서는, 이전 작품들에서 문제의식 차원 또는 사람들이 나서게 된다는 비교적 조심스러운 결론을 한층 뛰어넘어, 어떤 단계에서 어떻게 싸우는지가 완전히 작품전개의 중심에 놓인다. 그런 싸움의 구체성 덕분에, 한겨레 기사에서 표현했듯 “댓글란에서 노동상담소가 차려지는” 상황이 펼쳐지는 셈이다.

구차한 욕심의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딴죽을 걸던 [습지생태보고서]의 자칭 꽃사슴 ‘녹용’은, 딴죽을 걸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돌파구를 만들고자 활동하는 [송곳]의 노동사무소장 구고신이 되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제대로 목격하면서도 스스로도 남들도 크게 움직이지 못한 [울기엔 좀 애매한]의 학원선생 및 여러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은, 부조리에 현실적으로 저항하고자 구차한 방법들을 받아들이며 노조를 일으키는 이수인 과장이 되었다. 이렇게 최규석 만화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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