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 충실한데 전혀 달라진 서유기의 재미 – 이말년 서유기 [기획회의 374호]

!@#… 예전 IZE에 썼던 ‘기대작‘이 완연한 재미진 작품으로 정착.

 

원작에 충실한데 전혀 달라진 서유기의 재미 – [이말년 서유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서유기’는 현대의 대중서사물과 무척 인연이 깊다. 그도 그럴 것이, 일련의 초월적 기술을 지닌 주인공들이 팀을 이뤄서 적들과 격투를 하며, 기본 줄거리가 직선적인 여행길로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 여행의 과정에서 캐릭터들이 내적 성장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소재 요인으로도 구성방식으로도 오늘날 인기 있는 장르적 코드와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많고, 덕분에 서유기를 원작으로 하는 만화가 넘친다. 하지만 [드래곤볼]이나 [날아라 슈퍼보드]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자기 색깔을 찾아갈수록 원작을 충실하게 이식하기보다는 캐릭터와 몇몇 에피소드 외에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정반대로, 완전히 엉뚱하게 막나가는 작품일 듯 시작하고는 사실은 은근히 원작에 충실하게 가는 것도 독특한 재미를 줄 수 있다. 원작의 불교적 비유와 교훈의 보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느 기담들이 그렇듯 당대의 사회를 바탕으로 판타지 세계관을 만들어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험으로 세상을 풍자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최대한 발랄한 상상력으로 계속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적수들과 호쾌한 엉망진창 격투와 모험담을 펼치며 그 다음을 찾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원숭이와 돼지 같은 요괴들이 펼치는 이야기인데 끝없이 진지해도 곤란하고, 동시에 온갖 인간적 사연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지금껏 가장 뛰어난 서유기 재해석 작품으로 페이소스와 요절복통이 가득한 코미디로 유명한 주성치 감독의 영화들을 꼽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그와 거의 맞먹을 듯한 위용의 서유기 재해석 작품이 등장했으니, 바로 [이말년 서유기](이말년 / 애니북스 / 1권 발매중)다. 단행본 이전에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데, 이 작품의 매회 달리는 칭찬성 댓글은 바로 “서유기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도저히 스포일러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함의가 함께 담겨 있는데, 하나는 서유기 내용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기에 어떤 향후 전개 예상을 해보고 싶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재해석으로 인하여 전혀 온전히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이 작품은 충실하되 완전히 달라진 서유기다.

원작에 충실한 서유기 만화화라면 예전 [고우영 서유기]가 대표적이었으나, 여러 기연 설정들을 풀어놓는 것에 바빠서 정작 캐릭터의 매력도 풍자적 재해석도 밋밋한 작품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절대적으로 결격이라기보다는, 삼국지, 수호지 등 동 작가가 다른 중국 고전 소설을 이식한 탁월한 작품들에 비해 선명하게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 약점이 [이말년 서유기]에서는 깔끔하다 싶을 정도로 해소되어, 원작의 관계와 읽는 재미, 풍자의 쾌감까지 모두 끌어 안아버린다. 그 위에 작가가 원래 구축해왔던 특유의 개그 감각마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어느 관리가 어떤 사연으로 나중에 요괴가 되었고 다시 인연이 엮인다든지 하는 각종 설정 역시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묘사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앞서 말했듯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화과산에 돌원숭이가 나고, 원숭이의 왕이 되며, 도술을 익히고, 용궁에서 여의봉을 강탈하고 천계에서 난장판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요괴와 신들은 원작 서유기와 같되, 역할과 성격이 새로 맞춰진다. 새로운 해석을 하는 틀은 전개 측면에서는 소위 ‘기-승-전-와장창’이라고 일컫는 특유의 점층적 난장판화와 갑작스런 파국의 개그 코드고, 내용 측면에서는 패러디를 빙자하여 오늘날 한국사회의 일상적으로 비루한 모습들을 자조적으로 꼬집는 풍자다. 난장판 개그의 매력은 주인공 손오공이 겪는 모든 수련과 격투의 과정에서 한껏 드러난다. 정직한 힘의 대결이나 치열한 두뇌싸움이 아니라, 원작에서 그렇듯 뭔가 대단한 필살기가 등장하기는 하면서도 그것과 상관없이 엉뚱하게 대충 풀린다거나 어쩌다가 모두 망하고는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다. 그 과정에서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여놓고 보는 뻔뻔함이 만드는 경쾌한 유머의 리듬감은 작가의 첫 본격 장편 연재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단편 작품들보다 한층 자연스럽다.

풍자 유머 역시 만만치 않다. 이미 작가는 이전의 단편 에피소드 작품에서 삼국지의 제갈량을 고학력 백수 취업준비생으로 그려내며 이쪽 방향의 재능을 선보인 바 있는데, 서유기는 특정 에피소드의 풍자를 넘어 아예 작품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그런 접근법을 구사한다. 화과산에서 활개치며 숲 속 동물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모습은 폭력과 허세로 쌓아올린 볼썽사나운 골목대장 기질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손오공이 신선을 찾아가 도술을 배우는 과정은 취업학원의 모습에 가깝고, 천계에서 형식상의 감투를 받는 것은 부실한 취업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동사무소 “청년 인턴”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온다. 그 결과, 힘만 믿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가 분탕질을 치고 온 세상의 골칫거리가 되지만 결국 제압당한다는 원작 고전소설 초반의 기본 구도가 놀랄 만큼 절묘하게 지켜진다. 그리고 뭐 하나 그럴싸하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에 그저 다들 찌들어 살고, 순간적으로 와장창 뒤집어보지만 다시 제자리에 있다.

소위 ‘병맛’ 유머코드로 꼽히는 작품들은 순간적 충격과 자극의 크기에 매몰되기 쉬운데, [이말년 서유기]는 온갖 난장판이 매 시퀀스마다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이야기가 진행되는 묘한 서사적 호흡이 유지된다. 낙서체로 마구 그린 모습이지만 은근히 각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상황 묘사가 확실하게 담겨 있는 그림체, 황당한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이 납득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대사와 나레이션이 구사되고 있다. 각각 따로 놓고 보면 제대로 된 서사보다는 짧은 개그를 터트리는 것에나 더 어울릴 듯한 요소들이, 원작을 꽤 충실하게 따라가는 뼈대 위에서 서로 엮이면서 오히려 탄탄하게 균형을 맞춰버린다. [고우영 서유기]가 탄탄한 구도의 그림체, 시적일 정도로 구수한 대사 감각을 구현하고도 이뤄내지 못한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과감한 재해석의 재미를,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반대의 방법으로 이뤄낸다.

[이말년 서유기]는 옛 이야기의 재미를 다시 끌어올리는 작업의 하나의 모범이 될 듯하다. 원작의 무게에 조금도 눌리지 않고, 전개의 큰 틀로 심어 넣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원래 자신이 잘하던 양식들을 고스란히 계속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개차반 자화상의 풍자와 화려한 난장판 개그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이말년 서유기 1
이말년 글.그림/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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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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