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어짐과 희망 사이 – 포로수용소 [기획회의 379호]

!@#… 마침내 타르디 작품들이 국내에 들어온다는 것에 먼저 쾌재. 정식 제목은 좀 길다.

 

무디어짐과 희망 사이 – [포로수용소 : 내이름은 르네 타르디, 슈탈라크ⅡB 수용소의 전쟁 포로였다]

김낙호(만화연구가)

견디기 힘들게 열악한 현실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현실이 계속 반복되는 속에서 스스로 그 안에서 점점 무디어진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생생한 인간의 적응력은, 어떤 밑바닥에라도 익숙해질 수 있다는 비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흔히, 작품에서 전쟁을 극적 소재로 다루는 경우와 어떤 박진감과 비장감이 넘치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전쟁의 체험담을 어떤 실화로서 다루며 현실성을 강조하는 경우는 상당히 다른데, 바로 참상이 기약 없이 계속되며 그 와중에 스스로 무디어지는 모습이다. 비참한 상황에 완전히 적응해 있는데 갑자기 폭발이 있고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피범벅으로 죽어 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비참함이 반복된다.

[포로수용소 : 내이름은 르네 타르디, 슈탈라크ⅡB 수용소의 전쟁 포로였다](타르디 / 박혼진 옮김 / 길찾기 / 1권 발매중)는 2차대전 당시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5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한 프랑스 병사가 회상하는 당시의 체험이다. 2차 대전이 시작하자마자 프랑스는 전쟁에 패배하며 사실상 나치독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렇기에 독일군에 사로잡힌 프랑스 병사들은 포로교환을 통해 자신들을 구해주거나 최소한 인도적 대우라도 압박할 만한 조국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쟁이 끝날 날까지 아무런 기약도 전망도 없이 마치 잊혀진 존재들처럼 유럽 전역에 배치된 포로수용소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젊은 전차병 르네 타르디였고, 운좋게 결국 전쟁이 끝나고 살아 돌아왔다. 수십년이 지난 후, 그 동안 프랑스를 대표하는 만화가 가운데 하나가 된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들려주고 수기로 남긴 회고를 바탕으로 그 체험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작가인 자끄 타르디는 일관된 굵기의 정돈된 선으로 배경과 인물들을 섞어 넣는 ‘선명한 선’ 그림체의 전통 위에 있는데, 특히 정교한 풍경과 냉정한 행동 묘사에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왔다. 그런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소재가 바로 1차 세계대전인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참호 속의 전쟁이었다]에서는 하염없이 참호 속에 대기하며 불안에 떨며 무의미한 죽음의 일상을 거듭하던 병사들의 참상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그려낸 바 있다. 이번 [포로수용소]는 하나의 페이지를 긴 가로 칸 3개로 일괄적으로 나누며 파노라마 풍경을 만드는 기본적인 표현방식 등 분명히 그 연장선 위에 있되, 한층 원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회색 풍경을 고수하되 나치 깃발과 피로 물든 하늘은 붉은 색으로 묘사하는 식의 기법적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자체가 그렇다. 전쟁과 포로생활에 대한 회고는, 마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다시 목격하되 직접 세상에 개입할 수는 없는 전지적 여행가이드 같은 두 사람을 통해 이뤄진다. 한 명은 중년의 르네 타르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소년인 작가 자끄 타르디다. 부자는 대화하며 함께 기억 속의 현장 사이를 그대로 누빈다.

르네가 회상하는 전쟁은 암울하되 담담하다. 전쟁이란 거시적 시야에서는 어떤 흥미진진한 전개일지 몰라도, 병사들의 현장에서는 그저 고통과 죽음의 연속이다. 거니는 들판에는 병사든 지역 마을 주민들이든 그들이 키우던 가축이든 죽음이 즐비하다. 전투에 통쾌한 돌파구란 드물고, 그저 당장 살아남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각을 할애하기 어렵다. 전투의 과정이 이미 그렇기에, 포로수용소 생활은 한층 더하다. 배고프고, 비가 오고, 구타가 있고, 강제 노동을 당하고, 비가 오고, 배가 고프다. 그저 같은 것의 반복이고, 어떻게 끝날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겨운 반복을 만화에서 극적 전개를 위해 피하거나 할 생각도 없다. 아들이 같은 이야기 반복만 한다고 아버지에게 던지는 핀잔은, 바로 그런 반복이 경험의 가장 중요한 일면이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암울함이 계속되고, 죽음과 파괴에 점점 무심해진다. 사소한 다툼은 죽음으로 응징되고, 지쳐서 죽어 봤자 대단한 슬픔이나 추억을 남기는 일 없이 그저 땅에 수많은 다른 시체들과 함께 묻힐 따름이다.

‘68혁명’으로 지칭되는 일련의 문화사회적 변혁기를 젊은이로 통과하며 반전사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아들 자끄에게, 아버지 르네는 무의미한 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하던 시대의 유물 같은 존재에 가까웠다. [포로수용소]에서 작가는 그래서 스스로를 소년으로 놓고, 아버지에게 이 모든 파괴와 비참함의 의미를 묻는다. 아버지는 그와 함께 기억 속 현장을 재방문하며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되새긴다. 그 여정 속에서 아버지는 그 안에서도 나름의 희망을 찾고자 했던 어떤 순간들을 재발견한다. 르네와 동료병사들이 포로수용소의 비참함에 적응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과 그 책임자들, 전범 히틀러와 무능한 프랑스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를 잃었다는 것은 아니다. 차출된 강제 노동의 와중에 문서 위조로 태업을 하고, 좌절되기는 했지만 나름의 탈주 계획도 있었다. 짬이 날 때마다 일상의 편린을 찾고자 평범한 놀이를 시도하기도 했다. 살아남을 만큼 적응하면서, 아예 무감각해지지 않기 위한 치열한 균형 잡기의 현장이 그렇게 사소한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아버지가 생전에 80년대부터 기록해두었던 공책 3개 분량의 메모와 스케치들에 반항적 소년으로서의 자신의 질문을 대비하며, 서로의 생각을 인정해 나아가는 대화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와 아들이 거니는 현장의 현실감은 작가의 집요하게 정밀한 선화 속에서 생동감 넘치게(아니, 작품의 메시지를 생각하면, 무력한 죽음의 감각이 넘치게) 펼쳐진다. 포로수용소의 회색 풍경은 지겹도록 반복되며 비참함의 끝없는 지속과 익숙해짐의 감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 풍경을 체험하며, 아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살아간 아버지들의 현실을 아주 조금씩 더 받아들여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데없이, 모두 풀려난다. 2차대전 말미인 1945년 1월, 포로수용소를 유지할 여력이 없는 지역부터 그냥 문이 열린다. 그나마 치열한 전투와 체포가 있었던 감금의 시기보다도 한층 허무하게, 끝날 조짐도 없던 생활이 갑자기 그렇게 끝났다. 승리한 조국의 사절단이 데리러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눈 내리는 한 밤중에 그냥 다들 가진 것 하나 없이 방목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생존을 위해 무디어지느라 눌러두었던 전쟁에 대한 분노는 다시 폭발했지만, 이제 이역만리 떨어진 고향으로 알아서 돌아가야 하는 한층 비참한 여정이 놓여있다. 새롭게 펼쳐질 반복적 고난 속에서 과연 어떤 식으로 무뎌짐과 희망 사이의 균형을 찾아볼 것인가, 다음 권을 기대하게 된다.

포로수용소
자크 타르디 지음, 박홍진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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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서랍 속 테라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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