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기발하며 낙천적인 상상력 – 서랍 속 테라리움 [기획회의 380호]

!@#… 단편의 매력.

 

짧고 기발하며 낙천적인 상상력 – [서랍 속 테라리움]

김낙호(만화연구가)

테라리움의 매력은, 작은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관망하는 것에 있다. 안에서 돌아다니는 거북이나 도마뱀 등에게 있어서는 눈 앞에 보이는 공간이 세상 그 자체지만, 공간을 만들어 가꾸는 사람은 안에서는 보지 못하는 보다 큰 틀, 즉 그 세상이 담겨 있는 더 큰 무언가라든지, 보이지 않는 바위 너머에 놓인 해초 같은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나아가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인 공기 필터와 온도계가 구동되는 것도 안다. 그렇게 테라리움은 세상을 조그맣게 축소해서 관찰하는 것, 특히 전지적 시점에 대한 은유가 되어준다.

[서랍 속 테라리움] (구이 료코 / 박의령 옮김 / 한스미디어)는 5-6페이지를 넘기는 경우가 드문 매우 짧은 단편 작품 33편을 빼곡하게 모아놓은 단편집으로, 온갖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재들을 매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이 책에 묶인 단편들은 통합된 테마의 기획으로 연재된 것은 아니고, 웹 문예지, 크고 작은 종이잡지, 신작 등이 고르게 섞여있다.

책이 담아내는 단편 가운데 상당수는 미래 기술을 논하고 시간여행 같은 소재를 다루다보니 편의상 SF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과학이나 기술에 대한 정밀한 묘사의 쾌감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드래곤이 나오고 머리 속 세계도 펼쳐지니 판타지로 분류될만한 작품들도 많지만, 상상된 대륙의 장엄한 역사를 굳이 암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어느 세상이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하면서도, 뭔가 살짝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쯤 끼어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무언가 사소하게나마 사건이 벌어지고, 그쪽 세상의 방식에 따라서 어떻게든 일이 진행되다가 끝난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매력적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단편에서 확실하게 정립한다. 먼 미래의 만화가가 사극을 그리고 있는데, 바로 21세기초 스타일의 순정만화다. 그런데 작가는 창작의 난관에 부딪히는데, 사람들 사이 서로 좋아하는 마음의 오해라는 개념을 도저히 제대로 이해하며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 미래에는 둥그런 구슬에 뾰족한 막대기가 달려 있는 기계를 코에 꽂으면 상대의 속마음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페이지 안 되는 간단명료한 이야기 속에 사람들 사이의 오해가 만약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하는 묘한 상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나아가 현재에서 멀어지는 시대를 기억하고자 할수록 각 시기의 모습을 세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우리들의 기억 방식이라는 소재까지 슬쩍 들춰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을 경쾌하고 낙천적으로 펼친다.

그 뒤로 이어지는 단편들도 종종 장르와 분위기가 바뀌지만, 절묘하게 엉뚱한 상상력과 낙천적 정서를 이어간다. 미래의 자신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앞으로 10년동안 사귀게 될 모든 여자들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는 청년의 이야기라든지, 겨울에 숲을 벗어나고자 하다가 좌절하는 교훈적 내용일 듯 한데 조금 다르게 나가는 동화도 있다. 너무나 제한된 공간이라서 하나의 새 생명을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없애야 하는 엄혹한 현실을 그릴 것 같은데 뭔가 또 다르게 가버린 이야기도 있다. 매번 생각거리를 주는 것도 아니어서, 사각형, 삼각형 등 기호를 요리해서 먹는 모습으로 채워넣어 순수한 시각적 유머를 추구하는 이야기도 있다.

판타지 생물인 용을 잡아 마치 현실의 어촌 사람들이 해변에 상륙한 고래를 요리해 먹듯 나눠 먹는 이야기도 있다. [치키타 구구]의 TONO 작가가 비슷한 소재를 다뤘을 때는 겉모습에 대한 편견 등에 대해서 신랄하게 꼬집었다면, 이쪽 작품은 훨씬 낙천적으로 접근한다. 먹어보니까 맛있더라, 라는 생물의 평범함에 가깝다. 이외에도 어떤 판단이 필요할 때 머리 속에서 수많은 작은 자기 자신들이 벌이는 법정 다툼이라든지, 단편집의 제목 그대로 서랍 속에 작은 세계가 담겨 있는 이야기 등 폭은 더욱 다양하다. 그리고 대체로 각 단편은 완전히 개별적이지만, 앞에서 나온 소재가 슬쩍 재등장하는 유머도 구사한다.

거의 모든 단편들은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각각의 독특한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부터 기승전결 구조를 탄탄하게 갖추고 종종 반전까지도 포함하는 뛰어난 압축과 구성력을 자랑한다. 처음에는 짧은 분량 때문에 별로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상당히 커다란 세계관이 오롯이 들어있고 심지어 그런 세계를 무리 없이 독자에게 전달까지 해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매 단편은 소재가 서로 비슷한 구석 없이 각각의 개성을 자랑한다. 단편들 각각의 개성을 살려주는 형식적 요소는, 다채로운 그림체다. 거친 선으로 현실적 형상을 묘사하는 극화체부터 거의 명랑만화를 연상시키는 둥그런 가벼움, 동화 삽화풍 그림까지 작품의 내용에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구사해낸다. 하나의 작품, 아니 하나의 장면 안에서도 나머지 형상들과 달리 거의 기호에 가까운 소품이 등장하는데 작품 안에서는 다들 그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든지 만화적(!) 표현이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어떤 개성 넘치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전반적으로는 변함없이 가벼운 풍자로 구현되는 유머가 있고, 낙천적 인간관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따름이다.

하나의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관을 탄탄한 구성 속에 매우 짧은 분량으로 담아내는 이런 방식은 정말로 테라리움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런 테라리움이 수십개 정리되어 있는 것은 바로 서랍장의 모습이다(생각해보면 페이지 속에 세상의 모습을 담은 칸을 빼곡하게 채워 넣는 만화 특유의 형식미 자체도 이런 모습이라는 점이 절묘하게 맞물린다). 하지만 각 이야기는 독특한 소재로 충격을 주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해 성찰과 여운의 미소를 유도해낸다. 압축된 이야기 속에서 현실과 상상된 세계를 아우르며 우리들의 일상적 생각과 행동에 대한 풍자와 역설이 넘쳐나되, 우리들의 불완전함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라 그럼에도 적당히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낙천적 긍정이 있다. 마치 테라리움 속 언덕을 기어오르는 거북이를 보며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해 반추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듯, 빼곡하게 편성된 수많은 짧은 작품들이 그런 작용을 돕는다.

덤으로, 작품들을 다 읽은 뒤에는 마지막으로 표지 그림를 한번 다시 옆으로 주욱 펼치고 찬찬히 살펴볼 것을 권장한다.

서랍 속 테라리움
구이 료코 지음, 박의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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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메이드 인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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