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의 장대한 재미 – 기간토마키아 [기획회의 384호]

!@#… 베르세르크의 반댓말 같은 작품인데, 이게 또 쏠쏠히 재밌다.

 

소품의 장대한 재미 – [기간토마키아]

김낙호(만화연구가)

하나의 작품을 장기 연재중인 만화가 가운데에는 특출나게 비판을 받는 작가와 유독 보호받는 작가가 존재하곤 한다. 장기연재를 하고 작가가 관심의 대상이 될 만큼 작품의 재미 자체는 양쪽 모두 충분한데, 분기점은 바로 작가가 고생하는 티가 나는가에 달려있다. 설렁설렁 그리고 휴재를 밥 먹듯이 하는데 작품이 재미있으면 관심이 고스란히 비난이 되고, 반대로 너무나 품이 많이 들어가는 그림체와 연출로 장인정신을 드러내면 팬들에게 안스러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럴 때 한번쯤 필요한 것이, 전혀 반대 방향의 분위기를 지닌 발랄한 소품을 살짝 작업하여 지친 심신을 정화하고 재충전을 하는 것이다. 물론 소품이라고 해서 부실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그간 닦아온 솜씨와 다시 불타오른 원래의 선호 코드를 가장 농밀하게 응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렇게 해서 작가 자신에게는 물론, 독자에게도 신선한 재미를 준다.

[기간토마키아](미우라 켄타로 / 학산)는 미우라 켄타로가 탄생시킨 소품이다. 그는 자신의 대표 연재작인 [베르세르크]에서 워낙 고밀도 그림과 장대한 스케일의 상상력으로 처절한 복수극을 그려나가고, 그런 작업을 위해 사생활도 없이 오로지 그 작품에 24여년 동안 모든 것을 투여하고 있음이 팬들에게 알려진 바 있다. 그렇게 지친 심신을 정화하며 쉬어가는 것이 한 권 짜리 짧은 이야기인 [기간토마키아]인데, 작품이 만들어진 이유에 매우 충실하다. 분위기는 묵시록적이기보다는 경쾌한 활극에 가깝고, 싸움은 그저 칼을 힘겹게 휘두르며 모든 적들을 토막내야하는 처절함보다는 다양하고 화려한 필살기로 가득하다. 기괴한 세계 현실에서 좌절하는 주인공들 대신, 유사과학적 설정 용어를 멋스럽게 마구 붙여대며 강함을 정당화하는 뻔뻔스러운 전개가 펼쳐진다. 이야기의 배경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문명이 오래전에 멸망하고 다양한 다른 종족들이 그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전쟁과 갈등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의, 결코 밝을 수 없는 세계인데도 말이다.

먼 미래, 지구는 인간족, 인간과 곤충의 혼성인 성충족, 그리고 기타 아인류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족이 성충족 등 다른 종족들을 노예로 삼아 수탈하는데, 신체적으로 더 우월한 아인류들이 그에 반기를 들기도 한다. 고대에는 엄청난 생명공학 기술이 번성했기에 이런 모습이 생겨났지만, 그런 문명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런 세상에서 황야를 떠돌아다니는 주인공 데로스는 “레슬러”라는 고대 무술의 수련자고, 그를 인도하는 어린 정령 소녀의 모습을 한 프로메는 주변의 원자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능력이 발달한 인간형 존재다. 이 작품은 이들이 사막에서 인간족을 증오하는 성충족과 만나서, 뜨거운 진심이 담긴 격투 끝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에게 힘을 보태어 더 큰 위협으로부터 모두를 지키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 전형적인 ‘중간 토막’ 이야기이다.

먼 미래에 완전히 변형된 세계에서 이생물들 사이에서 모험을 벌인다는 설정은 사실 흔하디 흔한 장르코드다. 하지만 간편한 소품에서 독창성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세계를 얼마나 빨리 독자에게 납득시키고 그냥 자연스러운 것인양 잊어버리게 만드는가 여부다. [기간토마키아]는 그런 작업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빠르게 초반에 이뤄내버린다. 신비한 소녀 프로메와 돌쇠 같은 데로스의 부녀 같기도, 여왕과 하인의 주종 관계 같기도, 정령과 전사의 동료 같기도 한 관계 또한 몇 페이지 안에 완성해버린다. 세계적 상상력이나 인물관계의 독창성으로 승부할 생각은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독창적 자극과 탐험의 퍼즐을 즐기고자 했던 독자라면, 몇 페이지만에 이미 원하는 모든 것이 끝나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할 구석이 사실상 끝나버리고도 남은 분량에서,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 이후를 순수하게 박력 넘치는 소년만화스러운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버리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데로스는 인간족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성충족의 우수한 전사와 맨몸으로 겨뤄 승리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육체와 뛰어난 레슬링 기술을 가지고 있다. 알고 보니 그 레슬링을 통해서 진정으로 다른 종족끼리도 서로의 진심을 소통하여 온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투기장에서 서로를 죽이는 식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격투기술로 상대 전사도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도 감복시키는 것이 바로 데로스가 추구하는 고대 무술, 레슬링의 본질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프로메가 힘을 빌려주면 주변의 원자를 변형시켜 자신의 몸에 합체시켜 엄청난 거인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 힘을 통해서, 파괴를 일삼는 거인을 물리친다. 물론 레슬링 기술로 말이다. 알고 보니 데로스와 프로메는 현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종족, 여러 영역 사이에서 정처 없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듯 이 작품은 육체적 결투, 진심, 우정, 변신 등 소년 만화 특유의 핵심 코드를 빠짐없이 건드려준다. 어두운 세계관인 척하고 시작했지만, 생존을 위한 음모와 사투의 [진격의 거인]보다는 영웅이 거대화하여 거대괴수를 레슬링으로 쓰러트리는 [울트라맨]에 가까운 활극 정서인 것이다. 여기에 미소녀가 연루된 코믹한 변태성(데로스는 양분을 프로메가 분출하는 영양액으로 섭취하는데, 영락없이 불쌍한 하인에게 오줌을 받아먹게 하는 모양새가 된다)까지 가미되어 있다. 즉 자신의 핵심 연재작품에서는 대체로 억눌러야했던 활달하고 낙천적인 결투 전개, 최선을 다하면 뜨겁게 통하는 진심, 묘한 개그감각까지 마음껏 펼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대단히 유려하게 풀어낸다.

즉 [기간토마키아]는 장대한 세계관을 가볍게 깔아놓고, 사실은 온갖 장르 코드들을 가득 압축하여 재미를 극대화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왕 세계관을 구축했으니 수많은 이야기의 단초들을 후속작으로 확산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이런 고밀도의 장르적 재미에 집중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각 장면의 박력 있는 연출이나 섬세한 그림체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고, 부담스러운 감정선보다는 익숙한 감동 코드로 편안한 오락성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영화라면 “웰메이드” 여름 블럭바스터 팝콘무비라고 분류하면 작품에 대한 적절한 기대방향과 매력이 한번에 전달될텐데, 만화이기에 그저 쾌활하고 장대한 소품이라고 밖에 딱히 표현할 방법이 없는듯하여 아쉬울 따름이다.

기간토마키아
미우라 켄타로 지음/대원씨아이(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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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모브사이코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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