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지어 버리지 않는 존중 – Ho! [기획회의 387호]

!@#… 적절한 현지화에 의한 소위 ‘초월 이식’의 좋은 사례.

 

규정지어 버리지 않는 존중 – [Ho!]

김낙호(만화연구가)

다른 누군가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채택하는 간편한 방식은 바로 어떤 확고한 범주로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눈에 확 눈에 띄는 어떤 모습을 발견해내고, 연관된 온갖 고정관념들을 자동으로 발동시켜서, 그냥 그 성질이 곧 그 사람 자체라고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손을 턴다. 사회적 분배에 대한 어떤 의견으로 “빨갱이”라는 인간형이 되며, 특정 캠페인에 대한 완전한 동조를 거부하기만 해도 “반**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나름의 복합적 사정과 입지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어떤 행동거지만으로 “불편한 왕따 상사”로 분류된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 속성이 사람의 전부를 규정해서, 대등한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기 이전에 불편하고 곤란한 대상이 되어버린다.

[Ho!](억수씨 / 거북이북스 / 1권 발간중)는 평범한 젊은이가 일하고 연애하는 이야기다. 대학생 ‘원이’는 학비를 벌기 위해 학원 알바를 하다가 청각장애가 있는 초등학생 ‘호’를 가르치게 된다. 귀가 안 들리는 상태에서 말을 배웠기에 조금 말투가 어색하여 종종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빼고는, 조금 뚱한 성격인 듯하지만 금방 밀린 진도도 따라잡을 정도로 열의도 있고 귀여운 여학생이다. 시간이 지나 원이는 군대도 가고, 복학해서 공사장 알바로 학비도 벌고, 졸업도 하고, 같이 취직준비를 하던 여학생과 진지하게 사귀고, 취직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되어 있는 호를 우연히 다시 마주친다. 스포일러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원과 호 두 사람이 언젠가 결국 결혼에 이른 과정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Ho!]의 원작은 일본의 유명 온라인 게시판 커뮤니티 2ch의 익명 투고 [‘따님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러 가는 거다]다. 기승전결의 흐름이 이미 탄탄하게 갖춰진 원작 위에, 학비를 위한 알바, 육체노동과 노인 소외, 군 입대, 대인관계 스트레스 넘치는 회사 생활 등 한국 사회 맥락이 각색으로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붙었다. 또한 경쾌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만화이기에 가능한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주는 대목 역시 넘친다. 원과 호의 필담과정을 이미 낙서 가득한 문제지 하나로 펼쳐보여서 독자로 하여금 그 과정을 하나씩 다시 상상하게 만든다든지, 병렬된 칸으로 입술을 클로즈업하여 호의 시선에서 구순술의 느낌을 살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각색의 결과, 이 작품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대학생에서 사회초년생 남짓한 이들이 겪는 생활의 현실적 고단함과 가야할 길에 대한 고민을 인간의 선함에 대한 다소의 낭만적 희망을 통해 응원해주는 작가 특유의 작품 정서를 고스란히 이어간다. 주인공 원이는 소위 “좋은” 대학에 다니고 가족의 형편도 딱히 극단적이지 않지만, 알바를 하며 학비를 버는 것이 당연한 정도의 상황이다. 일처리 같은 능력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마구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천재는 아니다. 강력한 확신과 적극적 돌파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지 않고, 그냥 적당히 소심하게 고민하고 소소하게 주변의 성공을 질투도 좀 하면서 그렇게 평범한 인간이다. 다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사람을 잘 대해준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박애 정신을 발휘하며 헌신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에게 전략적 편견을 휘두르지 않고 그냥 서글서글하게 대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매우 특별하고 훌륭한 능력이다. 어릴 적부터 배워온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한다’는 습관 하나를 별 생각 없이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사장에서 그냥 오다가다가 만난 완벽한 타인인 아저씨와 의외의 인간적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이쪽은 잠깐 스치는 대학생이고 저쪽은 그냥 늘상 노가다 공사일만 하면서 나이든 인부라는 속 편한 선 긋기가 아니라 그저 어쩌다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지내는 평범한 두 명의 사람일 때, 대화가 가능해진다. 사회적 계급 갈등에 대한 근본적 토론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소소한 사는 모습에 대한 잡담, 같이 동네에서 붕어 낚시를 가는 정도의 평범함이다. 혹은, 딱히 원한을 진 것이 아닌데 굳이 누구를 따돌리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제정신을 유지할 때, 온 회사에서 불편한 사람 취급을 받는 어떤 상사도 평범하게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그냥 아저씨라는 면모가 드러난다.

그리고 가장 중심에 놓인 이야기는, 청각 장애가 있는 상대라고 해도 그냥 약간 대화의 방법이 좀 덜 평범할 뿐이지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눌 줄 알았기에 태어난 풋풋한 연애다. 경험 없는 대학생 학원 알바 강사인 원이 처음 호를 맡게 되었을 때,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인데 아직 4학년 진도에 머물러 있고 다른 선생들이 다루기 어렵다고 슬슬 회피하는 그런 종류의 학생이었다. 다루기 어려운 장애인이라는 범주화가 이뤄져 있고, 그렇기에 정말로 벽이 생기며 그 안에서 더욱 이쪽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버리는 악순환의 초입에 있었다. 하지만 원은, 그런 틀을 아예 인식하지 않고 호를 대했다. 누구를 처음 그런 식으로 가르쳐보는 것이기에 별반 위화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호의 약간 어색한 어조에도, 조금 말이 길어지면 동원하는 필담에도 금방 익숙해진다. 이런 대화 관계가 일방적 노력인 것도 아닌 것이, 입술 읽기(구순술)를 할 줄 아는 호 또한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원의 어휘를 일아 듣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대화의 방식에 대해서 서로를 배워나가며,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내용의 대화를 나눈다. 특별한 배려를 기울이는 것도 억지로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모습이, 호에게는 그간 겪어보지 못했던 진정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남을 마음대로 규정지어 버리지 않고 그냥 대화를 나누는 원의 능력은, 사회적 성공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화하기 편한 후배로 인식되어, 여자 선배에 대한 짝사랑이 짝사랑으로 머물고 만다. 취직 과정에 도움된 것도 딱히 없고, 회사 생활에서는 오히려 정치적 패거리 묶임에서 미묘한 틈새에 빠질 위기 상황이나 만들 뿐이다. 전략적 관계가 아닌 그저 인간적 인연이란 다른 일면에서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에 심각한 방해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대하는 그런 무심한, 그렇기에 오히려 결과적으로 속 깊은 자세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호와 조금씩 쌓아나가게 되는 깊은 관계다.

대화 자체가 서로에게 집중해야 하는 것, 그렇기에 더욱 즐거운 것이 되는 매력이 생긴다. 그리고 자연스레, 상대에 대해서 편견으로 구축한 틀이 아니라 개별 사연으로서의 삶의 궤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런 인간 관계가 청춘의 힘든 현실과 고민들을 갑자기 행복한 꽃밭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굳이 노력해가면서 사람 세상에서 살아가야할 다소의 이유 정도는 충분히 제공해줄 수 있다.

Ho! 1
억수씨 글.그림/거북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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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미래의 아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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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규정지어 버리지 않는 존중 – Ho! [기획회의 387호]

Comments


  1. 저도 청각장애가 있어서 관심있게 보고 있는데
    청각장애라는 소재에 대해 많이 연구한게 느껴지더군요
    우리나라 쪽 특징도 잘 살아나 있고요
    반면 직장인 입장에서 보면 첫 직장에서 나오는 부분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공감이 좀 안 되더군요ㅡ.ㅡa

    • a님/ 옙 아무래도 직장 묘사는 “TV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직장”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연애가 핵심이고 그쪽의 핵심요소인 청각장애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하니, 해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