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을 증명하기 [팝툰 36호]

!@#… 지나칠 정도로 뚜렷한 개성으로, 엄청난 민폐성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번 정권의 여러 권좌에 앉아 있는 그 분들에게도 본받을 구석이 있는지도.

 

존재감을 증명하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리도록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과제다. 우선, 주장이라는 것은 들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터넷에서의 검색이든, 선거에서 투표를 통한 자기 이익의 대변이든 말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각종 미디어와 기타 의사소통 방법의 폭증 덕분에 워낙 너도나도 더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고자 자기 주장을 터트리고 있고, 반면에 각 개인이 할애할 수 있는 집중력은 여전히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강준만 교수가 “인정 투쟁”이라고 명명한 바 있는 꽤 시끌법적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인정 투쟁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만, 우선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역시 목소리가 크고 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꽤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너도나도 크고 격하면 그대로 묻혀버린다.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돋보일 때까지 더욱 격하게 나가거나,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여러 격한 목소리들을 바로 ‘대세’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집합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주장을 외면할 수많은 잠재적 청중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반면,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자신만의 독특한 속성을 지긋이 밀어붙이는 것. 굳이 소란을 떨지 않더라도, 자체적인 개성으로 인해 존재감이 생기고 주목할 만한 이유가 되어준다.

황당한 학원 부조리 개그로 열혈 팬을 거느리고 있는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가 있다. 작품의 무대는 학생 거의 전원이 깡패인 한 고등학교다. 사실 깡패질은 강력한 자기 주장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호소하고자 폭력적 수단으로 학교의 질서, 사회의 ‘도덕’에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무척 유치한 방식이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학교에서는 누구나 당연히 깡패라서, 아무리 경쟁적으로 막장 깡패짓을 하더라도 전혀 존재감을 호소할 수 없다! 결국 보편적 의미의 깡패들은, 이 작품에서는 간단히 배경그림 속 엑스트라 취급을 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깡패니까 깡패가 아닌 사람이 있으면 돋보인다는 단순한 희소성의 원칙도 그렇게 효과가 좋은 편이 아니다. 실제로 작품의 주인공은 학교 유일한 모범생 카미야마인데, 주인공스러운 강력한 존재감은 부족하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돋보이는 이들은 아예 깡패인가 아닌가 정도의 범주로는 설명할 수 조차 없는 괴짜들이다. 깡통모양 로봇이거나, 프레디 머큐리의 얼굴을 한 레슬러 몸매의 아저씨라거나, 아예 그냥 고릴라거나 하는 존재들이 그냥 아무 어색함 없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존재감은 아예 저절로 생겨난다. 독자들에게는 황당한 웃음과 확실한 기억을 남겨주고 말이다. 다른 캐릭터는, 급우들과 독자들에게 이름을 소개하고 싶지만 절대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존재감을 매번 상실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매번 존재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캐릭터의 특징으로 부각되어, 당당한 기억에 남을 조연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개성을 인정받은 이 캐릭터들은, 자신들만의 고유 행동 패턴을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고수해서 뇌리에 확실히 고정된다. 줄거리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는 꼿꼿함이 오히려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준다고나 할까.

같은 잣대에서 남들 만큼 또는 남들 이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핵심을 계속 표방하고 추구하는 것이 존재감을 낳는 핵심이다. 간판의 크기가 아니라 간판의 개성, 그리고 그 간판이 계속 같은 모습으로 달려있는 것이 인정을 받는 길이다. 인기 펌글 하나 가득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적 시각을 고집하는 블로그, 논조가 공개적이고 꾸준한 언론, 자신의 이익지점을 드러내놓고 꾸준하게 추구하는 이들이 주목을 끌고 인정을 받는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자기 개성, 그리고 그것의 꾸준한 유지야 말로 어떤 목소리 높이기 경쟁보다 큰 틀에서 더 존재감을 만들어주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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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양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만화를 가져오는 방식의 칼럼.)

PS. 10월부터 팝툰 지면개편과 함께, 제 코너도 뭔가 변화를 주기로 했습니다. 분량은 늘고, 딱 시사성보다는 좀 더 폭넓은 사회적 맥락, 만화 작품/장르 자체에 대해서 더 중점을 두는 식의 러프한 방향들이 논의중입니다만, 아직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가… -_-; 아무 제안이나 조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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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존재감을 증명하기 [팝툰 36호]

Comments


  1. 음..? 분량이 늘다니요;;; 얼마나 느는건지… 두페이지에 육박하면 만화잡지에선 읽기에 좀 부담스러울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듭니다만 ㅋㅋ

  2. …코믹 프리즘이 증면을 한다는 것 감축드리옵니다. 제 생각에는, 작품을 현 상황에 비유하는 방식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안 만화를 소개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앙꼬의 (원래 제목은 그게 아닌데.. 금칙어에 걸리네요. 아실것이라고 믿습니다)은 그 작품 자체 만으로도 고등학생이 겪는 심리 변화나 어려움을 서술하고 있잖아요. 특이하고 내용이 주목할만한 작품 위주로 갔으면 좋겠네요.

    PS. 팝툰이 10월에 개편한다면… 콘진 지원금은 끊고 가는건가요? 제가 아는 바로는 권리 작가의 카오스모폴리탄이 끝나고, 이야기발전소의 강지영의 신작 가 들어간다는 것 밖에는 모르는데, 추가 개편 사항 알고 있다면 알려주세요 :)

  3. !@#… erte님/ 이 형식 그대로 두 배로 불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에에… 아니여야죠);;;

    Skyjet님/ 제안 감사합니다. 사실, 어떤 세부장르나 특정소재와 관련된 방식을 통짜로 소개하면서 들어가는 식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여튼 완전히 지금의 코믹프리즘과는 다른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죠. // 뭐, 더 자세한 건 저도 들어봐야 알고 내부적으로도 더 결정되어야 알겠지만, 사전 떡밥 공개 가능한 사항들이 나오면 얼마든지 공지하겠습니다 :-)

  4. 링크거신 강준만씨 글 말미에도 나왔듯이, 과도한 인정경쟁의 원인은 평가기준이 다양하지 않은 한줄세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럼 왜 우리사회에서 평가기준의 다양성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느냐’겠죠.
    현재까지 나름의 결론은
    압축성장과정에서 가령 ‘3P(power, prestige,property)가 모두 property로 환원가능함’같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지않나 인데…

    아무튼, 수도권집중화, 교육으로 대표되는 rat race로 인한 welfare loss 등등과 관련해서. ‘인정투쟁’현상은 한국의 사회과학자로써 꼭 심도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꼭지인 것 같습니다.

  5. !@#… advantages님/ 게다가 뭐랄까, 한국의 전후(戰後)사회는 사회적 경험의 핵심 내러티브로 ‘몰빵신화™’가 자리잡고 있죠. 다른 모든 가능성은 과감히 무시하고 한 가지 방식에(혹은 아예, 한 놈에게) 닥치고 몰아주니 커다란 성장을 하던데 그게 참 보기 좋더라, 뭐 그런 줄거리의 사고방식 말입니다. 언젠가 한번 그런 류의 컨셉들만 모아서 정리해볼까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