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일상을 거치는 순환과정 -『여행』[기획회의 233호]

!@#… 지난 호 원고는 한 박자 쉬어가는 느낌의 책으로. 천하의 보두앵이 낸 대표작 가운데 하나의 정식 한국어 단행본인데, 좀 뻘쭘하다 싶을 정도로 개인감상이나 신간안내 이외의 정식 평가를 찾기 힘들다 (하기야 그런 책이 한 두 종류겠나…;;; 뭘 새삼).

 

비일상을 거치는 순환과정 – 『여행』

김낙호(만화연구가)

흔히, 여행은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가보는 과정이라고들 한다. 즉 단순한 떠돌이 방랑이 아니라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일상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여행의 종착은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오든, 도착한 지점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든 말이다. 그 중 어떤 경우라고 할지라도, 여행을 한 경험 덕분에 새로 시작되는 일상은 이전의 것과는 조금 달라진 무엇이 되어준다. 조금 한심한 여행이었다면 인증샷 몇 장,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면 나름의 큰 깨달음이 새로운 일상의 기반이 되어준다. 이렇듯 여행은 본연적으로, 순환과 성장의 함의를 지닌다.

보두앵의 『여행』(에드몽 보두앵 / 새만화책)은 제목 그대로, 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주인공이 여행을 한다는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 여행이라는 개념 속에 있는 여러 모티브들을 겹겹이 흡수하고 있다. 즉 여행에 관한 만화가 아니라, 여행의 여러 느낌들 그 자체를 만화로 구현하겠다는 듯한 야심찬 접근인 것이다. 여기에는 일상이 있고, 그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질서한 생각들의 난입이 있고, 갑작스러운 일탈이 있고, 만남과 인연의 이미지들이 있으며, 그리고 모든 것의 종국에는 새로운 일상이 있다.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갑갑한 일상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계속 다른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는 주인공 시몬은 결국 회사에서 뛰쳐나와 여행을 떠나버린다. 아무런 계획 없이, 가족도 직장도 모든 일상을 버리고 그냥 기차를 타고, 어딘가의 마을에서 내려서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을 교류한다. 친구의 자살여행이라든지 낯선 곳에서 여인과의 사랑이라든지 하는 극적인 사건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는 일들이고 마치 여행 자체가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길 없이 마지막에 시몬은 다시 일상의 공간에서 아들과 함께 거닐고 있다. 물론, 조금 달라져있지만 말이다. 『여행』에서 시몬이 가는 여행지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어떤 시골 해변가 마을의 이미지일 뿐, 정말로 갔는지 모든 것이 상상인지조차 결국은 불분명하다. 비일상적 공간과 경험의 여러 상상들이 합쳐져 있으며, 결국 우주와 하나가 되는 듯한 동양적 해탈에 가까운 느낌의 클라이막스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에서, 하지만 순환의 과정 속에서 좀 더 만족한 자신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보기보다 줄거리의 기승전결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 작품의 여행은 논리적 흐름보다는 유려한 시각적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독자는 그 과정을 논리가 아니라 감성으로 쫒아가도록 독려를 받는다. 마치 차 창 밖에 흘러가는 풍경, 직선적 인과보다는 인상적 이미지들의 연속에서 흐름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가깝다. 물리적 여행이 줄거리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메타포로서의 여행이라는 속성이 더 매력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줄거리의 만화라기보다 심상의 흐름의 만화인데, 흔히 그런 류의 만화가 빠지기 쉬운 관념론적 분절로 인한 소화불량이 적고 수월하게 읽히는 것이 특징이다. 따지고 보면 결코 덜 관념적인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기억과 경험은 현실과 상상 사이 어딘가에서 흔적을 남기고, 선문답 같은 대화와 문자 그대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전개되는 풍경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그려내고자 한다. 다만 논리가 아니라 심상으로 말이다.

이런 독서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일등공신은 역시 작가의 유려한 그림체다. 보두앵은 유럽만화에 관심 있어 하는 한국 작가들이나 지망생 사이에서는 인상적인 그림 솜씨로 손꼽히는 이들 가운데 하나다. 보두앵의 그림 특징은 서양적 데생과 동양적 붓선의 매끈한 결합이 주는 복합적 느낌이다. 실제로 『여행』의 경우는 일본 고단샤 출판사에서 기획하여 양국에 같이 출시된 사례인데, 그만큼 동서양의 매력을 겸비한 작가의 스타일이 평가받은 것이다. 물론 대체로 여백의 사색보다는 조형적 밀도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볼 때 대등한 혼합이라기보다는 동양적 요소를 흡수한 서양의 것이라는 점이 명백할 듯 하지만, 그 그림체를 노장사상의 느낌이 나는 현실과 상상, 기억과 경험의 흐린 경계와 순환적 맞물림을 표현해내기 위해 활용한다.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는 심상을 연상시키는 자유로운 선의 흐름은 물론 주인공의 머리가 항상 “열려 있는” 상태로 그가 머리 속에 그리는 구체적 혹은 추상적이고 본능적인 풍경들이 세상으로 계속 흘러나오는 연출 등은, 독자를 압도하기보다 흡수하는 매력을 발휘한다. 머리 속의 풍경과 현실의 풍경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런 적극적인 경계 없애기는 다시금 작품과 독자들의 세계 사이의 경계 없애기에도 도전해온다.

물론 작품 속에서도 머리가 열려서 세상을 섞어 넣는 시몬이나 몇몇 그런 부류와 달리 현실의 일상을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경계가 뚜렷한 예측 가능한 세상에 있고, 대다수의 독자들 역시 그렇기에 쉽게 경계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은 모든 경계가 모호해지는 여행이기에, 일탈을 했다가 일상으로 돌아와도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고 온전히 감각의 기억만을 남길 수 있다. 주인공 시몬과 마을의 여인 레아의 사랑은 현실의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끈적한 불륜이 아니라 추상적 깨달음의 과정 가운데 하나처럼 그려지며, 돌아온 일상 속에서도 후회나 갈망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 간밤의 만족스러웠던 꿈을 그리워하기보다, 그것의 느낌을 오늘을 살아가는 좋은 양분으로 삼듯 말이다. 이것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인데, 여행이라면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이동하며 여러 현실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인간사의 공통점을 찾는 것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는 가치관의 소유자라면 좀처럼 몰입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다지 여러 층위에서 친절을 베푸는 작품이 아니기에, 비몽사몽의 상태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수려한 그림의 모호한 이야기 이상이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은 이야기 지향보다 심상 지향의 독서로 한번쯤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라면, 하나의 ‘명작’으로서 추천할 만하다. 독자 머리 위에 서있다기보다 정말로 흐름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기에, 탐구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마치 주인공 시몬이 일탈의 여행을 했다가 다시 돌아왔듯, 독자들 역시 이 만화 속으로 일탈했다가 책을 덮으면서 다시 돌아오리라. 아마도 약간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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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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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드몽 보두앵 지음, 임선영 옮김/새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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