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신문을 구원할 것인가 [인물과 사상 / 2004.8]

!@#… [인물과 사상]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런 재미없고 이상한 글 말고도 훌륭한 글들이 많으니, 잡지는 알아서 사보시기를;;  이전 김상택 만평 비평글과 마찬가지로, [미디어 오늘] 온라인에서도 게재중.

!@#… 이 글을 썼던 시점 이후로 이미 몇가지 변화의 조짐이 후딱 나타나기도 했지만, 대세는 아직은 여전한 듯 하더군요. 음. 좋은건가, 나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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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신문을 구원할 것인가

김낙호 / 만화연구가

신문의 구원투수로 나선 만화

신문이 세상에서 떨치는 엄청난 위세와는 별개로, 사실 신문시장은 엄청나게 어렵다고들 한다. 쓸 만한 흑자를 내고 있는 것은 고작 두 ㅈ일보들뿐이며, 신문사들이 전근대적인 시스템과 과당 경쟁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소식이 아니다. 위기의 9회말. 구원투수가 등장해야 할 시점이다. 변화를 주어 기존 독자층에게 새로운 만족을 주고, 새로운 독자층을 개척하는 막중한 대역전극을 펼쳐야 할 임무가 있다. 여러 가지 시도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 최근 가장 눈에 띄는 구원투수가 있으니, 바로 ‘만화’다.

신문과 만화는 참 묘한 관계에 놓여 있다. 수많은 어르신네들의 머리 속에서 신문이 ‘교양’의 상징이라면 만화는 ‘천박함’의 상징으로 오랜 기간 각인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항상 만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한국에서 오늘날 나오고 있는 모든 신문들 가운데 만화가 없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20세기 초 미국 ‘뉴욕월드’지에 연재되었던 ‘호건스 앨리’ 이래로 신문에 있어서 만화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최강의 교각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 점에 착안해서인지, 최근 몇 년 간 각종 신문지면에 만화 지면이 부쩍 많아지고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무가지 시장에서 만화로 특성화하여 시장을 제패하겠다는 신문까지 등장할 정도다.

그런데 과연 70년대에 일간스포츠가 고우영의 ‘삼국지’를 연재하자 판매부수가 3배로 뛰었다는 전설을 믿어도 될 것인가? 젊은이들은 신문을 펼치면 만화부터 볼까? 만화전문 신문을 표방한 ‘데일리줌’이 무가지 시장을 평정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바람직한 일인가? 신문도 만화계도 해피해질까?

궁금한 것은 많고 해답은 적다. 왜냐하면 만화를 감싸고 있는 무지의 신비한 망토를 좀처럼 걷어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짧은 이 지면에서 그것을 다 이룰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작은 구멍을 내서 속내를 들여다보는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왕, 질문도 한 가지로 압축하자. ‘만화가 신문을 구원할 것인가’. 2000년대의 몇 가지 ‘새로운’ 시도들을 중심으로 짚어보도록 하겠다.

조선일보를 구원(?)한 ‘광수생각’

한국에서 신문과 만화는, 이미 근대 신문 개념의 탄생과 함께 첫 근접조우를 가졌다. 하지만 여기서 이도영이니 안석주니 하는 근대 대가들의 이름부터 들먹이며 역사를 주욱 훑어볼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때 이후로 계속 고정된 신문 속 만화의 역할인데, 바로 만평과 시사 4칸만화가 그것이다.

물론 70년대부터 스포츠 신문의 영역에서는 극화풍 연재만화가 히트를 쳤지만, 종합일간지로 불리우는 신문들에서 만평과 시사 4칸만화로서의 만화의 역할은 90년대 중반까지 그대로였다(몇 안 되는 예외는 ‘한국일보’의 ‘블론디’로, 미국의 4칸짜리 생활만화를 수입한 것이었다).

스포츠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재미있는 만화로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음란·폭력성 시비에 휘말리면서도 무한경쟁을 반복하고 성장을 거듭하였으나, 종합일간지의 ‘체면’상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상황이다. 시사만평이나 시사 4칸만화 이외의 만화를 연재하면 당장에라도 독자들이 ‘너희들은 스포츠 신문 수준이구나’라고 반발이라도 할 듯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2차 근접조우의 조짐은 95년 말에 나타났다. 문화 전용 섹션지면을 만든다는 ‘매거진X’ 컨셉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경향신문에서, 인기작가 이현세 작품의 일일연재를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이현세의 ‘러브컬렉션’은 트렌디드라마식의 전개로 젊은 독자층을 개척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 시도였다.

하지만 단행본 1∼2권 분량의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전개로 진행되다 보니, 장기적인 일관성이 부족했고 작품 자체의 몰입도도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80년대식 기업극화로 장르가 바뀌더니, 결국 하차하고 말았다. 경향신문은 이후 96년 말 박봉성의 ’36계’로 연재극화의 맥을 이어보고자 했으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남성) 성인 취향 연재극화의 대표작가들을 내세운 종합일간지와 연재극화의 짧은 만남은 별 성과없이 끝난 듯 보였다.

오히려 돌파구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97년, 조선일보는 정사각형의 공간에 컬러로 짤막한 에피소드를 담은 ‘광수생각’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조선일보스러운’ 문제점들은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광수생각’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것은 감상주의적 색채와 둥글둥글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소위 에세이툰이라는 장르의 화려한 신호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서 조선일보는 김동화의 ‘빨간 자전거’로 일일 1면 4페이지짜리 호흡의 에세이툰에 도전하여 마찬가지로 성공했다. 여하튼 에세이툰은 조선일보에게 젊은 독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적 포용력이 있다는 이미지를 선물해주었다. 수구로 대표되는 조선일보의 이미지에 있어서,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여기에 자극 받아서 다른 신문들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어졌지만, 컨셉 조준의 잘못으로 인하여 매번 빗나갔다(예를 들어 반골기질로 가득했던 이우일의 ‘도날드닭’으로, 보수적 가족주의로 히트친 ‘광수생각’의 전철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에세이툰이 신문을 구원해준 사례는 제한적이었다.

동아닷컴을 살린(?) ‘식객’과 경향의 주간 만화섹션 ‘펀’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고, 에세이툰에서는 후발주자가 되어서 성공을 놓쳤던 동아일보가 과감하게 다시 전진을 했다. 2002년 9월에 허영만의 ‘식객’이라는 연재극화를 시작한 것이다. 다시 종합일간지가 연재극화에 도전한 셈이었는데, 이번에는 일일 1면 4페이지, 약 한 달 단위로 에피소드 하나가 정리되어 그것이 계속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그 동안 사람들이 인터넷 환경에 익숙해진 만큼, 제한된 기간 내의 다시보기를 통해서 일일 연재만화의 가장 큰 약점인 ‘빼먹고 못 봤던 앞 이야기 따라잡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신문 판매량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아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동아닷컴의 방문객 수는 보장해주었으니 신문사 입장에서는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인 2003년 3월, 한국일보 역시 박흥용의 ‘호두나무 왼쪽길로’라는 연재극화를 비슷한 포맷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대중적 재미의 부족, 그리고 한국일보라는 신문 자체의 상대적인 마이너함 등의 요인 때문에 높은 인지도의 확보에는 실패했다. 이번에도 역시, 선발주자만 성공을 독식한 셈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04년, 종합일간지와 만화는 또다시 한 번 새로운 방식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것은 경향신문에서 토요일자 섹션으로 만든 ‘펀’인데, 12면의 섹션을 거의 전부 만화로 채웠다. 그 속에는 시사만평, 에세이툰, 옴니버스식 단막극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들이 포진되어 있다. 주간 섹션으로 만화지를 삽입하는 방식은 사실 미국에서 성공 가능성이 증명된 바 있는데, 그것을 한국적 맥락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관건인 프로젝트인 셈이다. 나아가, 제작 방식에 있어서도 외주 기획이라는 파격적인 방식을 도입하는 등 야심찬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20대 감수성에 맞춘 만화와 40대 감수성에 맞춘 만화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나열되어 있기 때문에 오는 혼란스러움, 장르의 다양성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완성도의 작품별 편차 등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게다가 주간 섹션이라는 특성 때문에 일일 연재극화의 드라마틱한 연속성을 구현하기가 힘들다. 일일 4페이지, 주간 24페이지씩 나와야 하는 방식의 이야기 장르들을 주간 4∼6페이지의 지면에서 구현하기는 힘든 것이다. 즉 가장 보편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장편 연재극화를 밀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지면인 셈이다.

또한 경향신문의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라든지 배포력 부족(가판대와 온라인 공간을 포괄해서)에서 오는 한계 역시 같이 극복해야 할 문제다. 아무리 선구적인 시도이며 만화의 잠재적 호소력이 크다고 할지라도, 만화라는 콘텐츠가 유통 자체의 약점들을 극복시켜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무가지와 재활용 만화

오늘의 신문시장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은 큰 이견의 여지가 없이 ‘무가지’일 것이다. 2002년에 해외의 성공에 뿌리를 두었던 ‘메트로’가 처음 창간됐을 때만 하더라도 파장이 이렇게 커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상황은 한마디로, “신문가판 총판장들만이 지하철 가판의 영향을 우려했을 뿐 정작 신문협회 또는 판매협의회 등은 이 문제에 대해 별로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간 신문은 가판 판매량 비중이 크지 않았고, 스포츠 신문은 마침 ‘메트로’ 신문이 ‘월드컵’ 개막일에 맞춰 창간함에 따라 ‘월드컵’ 열기로 가판 판매량이 오히려 다소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홍원기, ‘관훈저널’, 2004년 봄호.)

하지만 무가지 ‘메트로’는 정착에 성공했고, 그것은 가판 신문 판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하철 무가지가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훌륭한 신문 수익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아서, 너도나도 그 판에 뛰어들었다.

‘데일리 포커스’가 창간되어 무가지를 경쟁시장으로 만들었으며, 그 뒤 가판대 신문인 문화일보에서 ‘AM7’을, 스포츠서울에서 ‘굿모닝 서울’을 창간했다. 이쯤 오자 가판대의 신문 판매-나아가 주간지 판매까지도 눈에 띠게 감소하면서 가판업자들이 생계대책을 호소하고 나서는 지경이 되었다. 무가지 시장 자체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져서, 한국일보에서 제작에 손을 댄 ‘메가스포츠’가 창간 두 달 만에 폐간되는 등의 에피소드가 더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만화를 컨셉으로 하는 ‘데일리줌’과 한국일보의 재도전(?) 작품인 ‘스포츠한국’이 가세했다. 바야흐로 난세다.

무가지는 젊은 독자층을 타깃으로 표방하고 있다. 무거운 신문보다는 문화와 트렌드에 비중을 두며, 동시에 정치·사회 기사들은 스크랩 차원으로 소식 전달을 해서 단순한 오락 전단으로 보이지는 않도록 하는 균형전략을 추구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화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실험들이 이어지고 있다. 종합일간지와는 달리 4칸 시사만화를 없애고, 단칸 시사만평도 내용의 강도나 코너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시켰다.

종합일간지들의 경우 정치·경제 자체를 가십거리이자 최고 주제로 다루기 때문에, 만화는 그러한 딱딱한 고기를 부드럽게 넘어가게 해주는 소스 역할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지하철 무가지는 기본 컨셉이 다르기 때문에 만화의 역할 역시 달라진 것이다. 스포츠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면 4페이지 호흡의 에피소드 만화, 연재극화, 미국식의 4칸 생활만화 등 다양한 종류의 만화들이 지면 특성에 맞게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재활용’ 만화의 존재다. 이미 단행본으로도 오래 전에 나와서 유통된 바 있는 에피소드 방식의 만화들이 다시 한 회씩 그대로 연재되는 것이다. ‘사립탐정 토깽’ ‘띠떼프’ ‘마린블루스’ ‘용하다 용해’ 등 많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특히 가판대 신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는 ‘메트로’와 ‘데일리 포커스’가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원고료를 아끼기 위한 것일까? 분명히 그런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재활용 연재임에도 불구하고 만화들이 과연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DVD로 이미 유통되는 영화가 재개봉되는 경우는 그나마 극장의 대형 스크린이라는 이점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 연재도 이미 되었고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한 작품들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이점은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매일 조금씩 연재로 본다는 것의 재미 그 자체다. 물론 연속되는 이야기의 전개와 반전이 핵심 매력이 되는 작품이라면 사실 그냥 단행본으로 사서 이후 줄거리를 살펴보는 식이 되어버리겠지만, 한 회 단위로 완결성이 있는 짧은 감성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싯구를 다시 보고 즐거워하듯이 하루의 분량을 읽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씩만 연재함으로써 몰아서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부담감 없이 스쳐지나가기도 편하다. 즉 작품으로서 몰입하기보다는, 신문 구독행위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꼭 그것이 새로운 것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몇 년 정도 지나서 사람들이 대충 잊어버렸을 법한 에피소드들이기만 하면 된다. 오히려 이미 재미있다는 것이 검증된 에피소드들로 추스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안성맞춤이다. 재활용 만화는 작가의 새로운 창작활동을 장려하는 부분에서는 곤란하지만, 가볍게 몰입해서 읽고 지나가는 신문을 표방하는 지하철 무가지의 성향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효과적인 모델인 것이다.

만화전문 무가지 ‘데일리줌’의 야심과 가판업자들의 반발

사람으로 꽉 막힌 지하철 속에서 일생의 귀중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은, 몇 주일쯤 전 신문 가판대에 붙은 빨간 포스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신문과 관련된 무언가를 절실하게 성토하는 생존권의 외침.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한 이 사건은, 신생 무가지 ‘데일리줌’의 배포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데일리줌’에 대해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반발을 하고 나섰다면, 그것은 그만큼 그 신문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이 커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데일리줌’의 발행처인 (주)미디어줌은 군인공제회에서 50억 규모의 자본투자를 받은 것으로 홍보되는 등 중량급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과포화 상태 경쟁시장의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진짜 이유는, 지면의 60% 이상을 만화로 채우겠다는 야심만만한 기획 때문이었다. 강철수, 고우영 등 스포츠 신문 연재만화의 대가들과 이현세, 황미나 등 굵직한 스타급 중견 만화가들이 주주로 참여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만화 전문 무가지’. 여기에다 ‘데일리줌’은 삼성그룹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전문경영인 이병철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데리고 오는 등 위력적인 모양새 만들기에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 위세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장애우와 유공자 유가족 중심으로 되어 있는 지하철 가판업자들이 정면으로 들고일어난 것이다. 자본투자자가 군인공제회라는 점 자체도 갈등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데일리줌’이 스포츠 신문 판매를 본격적으로 초토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었다.

‘데일리줌’ 측의 주장에 따르면 가판업자들이 ‘데일리줌’의 배포권을 요구했으나 자신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판업자들은 가판 신문을 모태로 하고 있는 두 무가지 ‘굿모닝 서울’과 ‘AM7’의 배포를 맡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후발주자인 ‘데일리줌’으로서는 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묶이지 않고 보다 공세적인 자체 배포를 추진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판대를 적으로 돌린 갈등의 와중에서 실제로 ‘데일리줌’은 ‘메트로’나 ‘데일리 포커스’보다 “지하철 선반 위에 잘 안 보이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최근 군인공제회의 압수수색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뜻하지 않은 악재는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

여하튼 생각해보면 볼수록, ‘데일리줌’은 시작부터 시장 진입과 배포력의 문제에 있어서 여러 위험요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배포력의 실패는 광고 수주에 직접 영향을 미치며, 무가지 특성상 수입의 전부를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간을 한다면, 콘텐츠의 품질이 이러한 지점들을 벌충하고도 남을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품질은 어차피 자체적인 기자실을 운영하기 힘든 규모이기 때문에 결국 연합뉴스 피드백으로 대동소이하게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감의 근원은 역시 차별화 컨셉의 핵심인 ‘만화’다.

‘데일리줌’과 작가들의 총체적 안이함

그런데, 다시 근본적인 문제가 몇 가지 있다. 개별 작가들이 유명하다고 해서 그 작가들의 신작 작품이 훌륭하다고 저절로 검증이 되는가? 아니면 적어도, 그 작가들의 작품 성향이 이 신문지면의 독자들 독서 패턴과 부합되는가? 혹은, 그 작가들의 작품을 이런 지면에 게재하면 재미있기는 한 것인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데일리줌’은 이 부분을 실질적으로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현세의 ‘신들의 시간’은 이전 ‘천국의 신화’의 자기 패러디에 가까우며, 고우영의 ‘십팔사략’은 이전 원고분실 사건으로 사라진 원고를 다시 복원한다는 의의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애초에 신화나 고전 이야기에 대한 과도한 기대 자체부터가 곤란하다. 70년대에 ‘고우영 삼국지’에 독자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그것이 ‘삼국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감성과 상황들로 재창조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이 중국 고전에 특별히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여성작가 진영의 대표주자로 편성된 황미나의 ‘파천무관 식솔기’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 이미 이야기한 가부장적 대가족과 무술가족 이야기들이 적당히 반복된 것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간판급 스타들의 신작이 내용 면에 있어서 지극히 안이하고 반복적이라는 말이다.

2000년대 젊은 독자들과의 괴리감도 작지 않은 문제다. 아예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80년대 전성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듯한-즉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작품들을 그대로 다시 가지고 온 듯한 한희작의 ‘아라리오’, 강철수의 ‘노폰, 노카드’ 등의 작품들이, ‘트라우마’와 ‘츄리닝’ 취향으로 향해 있는 독자들에게 과연 어떤 재미를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백배 양보해서, 작품들이 내용 면에서 부진하더라도 이야기 실력들이 좋은 작가들이니 만큼 기본적인 흡입력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치자. 그 다음 문제는 지면 편성과 배치에서 드러나게 된다. 모든 작품들이 일괄적으로 단행본 페이지 판형으로 편집되어 한 면 안에 들어가 있다. 커다란 신문지에서 길쭉하게 내려가면서 구수한 입담을 읽는 것이 매력이었던 고우영, 강철수 만화들의 공간적 매력은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그런 판형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생기는 지루함 역시 만화의 재미를 갉아먹는다. 이런 경우, 페이지 분량 조절의 문제도 결코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연재극화인 고야성의 ‘인형사’는 하루 두 페이지 연재되고 있는데, 이 경우는 하루 분량에서 이야기가 거의 진행이 안 되어서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데일리줌’은 최초의 만화 전문 신문을 표어로 내걸면서 출범했다. 99년과 2000년에 명멸했던 ‘만화연예신문’이나 ‘코믹스포스트’ 혹은 한국전쟁 직후의 ‘만화신문’은 그럼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여하튼 중요한 것은 만화 전문이라는 것이 신문으로서 큰 메리트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핵심 컨셉이다.

하지만 신문 구독 패턴을 취하는 신문 구독층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신문으로서의 매력이다. 표지에 눈길을 끄는 헤드라인 뉴스가 보이고, 인접한 여러 페이지들이 주제별로 묶여서 구독에 하나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만화를 주요 무기로 표방하고 있다면, 바로 그 만화들이 그런 식의 단위와 흐름을 만들어줘야 신문으로서의 매력이 생긴다.

‘데일리줌’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가장 먼저 정비해야만 원하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만화가 제아무리 훌륭한 구원투수라고 할지라도, 내야진과 외야진, 감독과 코치들이 제대로 된 팀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면, 승리를 일궈내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신문과 만화의 앞날

한국에서 신문시장, 아니 신문 자체의 위기는 공신력 상실 같은 내적인 요인이든 인터넷 발달 같은 외적인 요인이든 다양한 이유를 지목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방안에 대해서는 그렇게 다양한 제안들이 나오고 있지 않다. 그래서 위기인 셈이다.

그 와중에서 대중적 친화력으로 명성을 날려온 ‘만화’는 분명히 매력적이다. 만화와 신문은 앞으로도 새로운 조우를 계속 할 것이고, 지금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못할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미 시사만평은 호소력 면에서 사설과 경쟁해온 지 오래이며, 어려운 설명이 필요한 과학 섹션에 만화가 들어가는 것은 필수처럼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일반 뉴스 보도까지도 만화로 표현되는 날 역시 그리 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기대할 필요도, 미리부터 거부감을 지닐 필요도 없다. 어차피 어떤 시기의 어떤 시도는 독자들의 반응 속에서 성공하고, 다른 것들은 실패한다.

최근의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보자면, 처음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을 해볼 수 있을 듯하다. 확실히, 만화가 신문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문을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행을 깨면서 만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개방적인 마인드다. 그리고 좋은 만화, 좋은 신문으로서의 완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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