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축적 – 『치키타 구구』[기획회의 249호]

!@#… 일련의 출판사들이 만화사업을 대폭 정리하며 떨궈버렸던 보석들 가운데 하나가 또 이렇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무사완간 좀.

관계의 축적 – 『치키타 구구』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정이 든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주제다. 이미 『어린 왕자』같은 작품의 왕자와 여우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것을 다루어 여러 세대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바 있고, 소위 인생역정의 큰 흐름을 그리는 장편극 가운데 이런 요소를 바탕에 두지 않는 것이 드물 정도다. 이것은 어떤 작품이 독자들이 살아가는 일상에 직접적으로 밝은 방향의 영감을 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식 중 하나다. 불같은 낭만적 사랑의 이야기가 주는 드라마틱한 재미와 달리,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살아가는 이치라는 듯 은근한 깨달음을 주는 과정의 포만감이 있다. 그 중 좀 더 집요하게, 무척 이질적인 혹은 아예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관계의 두 주인공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 축적되며 어느덧 끈끈하게 연결되는 과정을 다룬다면 어떨까. 더할 나위 없이 이 주제가 주는 매력의 본질을 건드릴 것이다.

『치키타 구구』(TONO / 조은세상 / 1권 발매중)는 이런 요소를 극단까지 몰고 간 설정에서 시작한다. 우선 두 주인공의 관계가 무척 적대적이어야 마땅한 상태다. 주인공 치키타 구구는 주술사 가문의 피를 타고 났는데, 어릴 때 식인요괴에게 온 가족을 몰살당했다. 그를 양육하는 부모이자 상담할 수 있는 친구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다른 주인공인 라 라므 데라르는, 바로 치키타의 부모를 잡아먹은 식인요괴다. 그런데 과거의 죄과를 뉘우치고 업보를 다한다는 낭만적인 의미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웬만한 힘의 요괴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독이 될 정도로 ‘맛 없는 인간’이라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를 100년 동안 키우면 더할 나위 없는 진미로 무르익는다는 요괴들의 전설 덕분에, 데라르가 치키타를 100년 동안 곱게 사육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그 사실을 당사자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도 웬만한 인간의 자연수명보다 긴 100년 동안 무사히 곱게 살며 자라날 수 있도록 심리적 배려와 물리적 보호를 받기에, 가족처럼 함께 지내는 것에 별 무리를 못 느끼고 산다. 이런 설정 속에서 주술사로서 겪는 여러 다른 요괴들의 사연, 복수와 원한의 악연, 비슷한 관계로 300년 이상 지속된 인간과 요괴 콤비와 만남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치키타 구구』는 설정만큼이나 비정함이 가득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설렁설렁하고 장난기 가득한 그림체에서 쉽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인간사 상식을 크게 벗어난 잔혹한 사연들이 넘친다. 근친상간, 가족 살해, 식인, 학대와 학살 뭐 그런 것은 지극히 흔한 소재다. 심지어 우회적인 표현으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라, 적나라하게 대놓고 재현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다만 그것을 굳이 인간논리로 재단해서 비장하게 만들기보다는, 먹이사슬과 생존본능, 인간의 본연적 욕심 등 당연한 섭리의 방향으로 보여줌으로써 건조한 시각을 취한다. 다만 비슷한 접근을 가졌던 걸작만화 『기생수』가 그 건조한 시각을 건조한 느낌의 그림과 함께 전달하여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면, 이 작품은 밝은 농담과 신랄한 비판을 동시에 표현하며 독자로 하여금 한 박자 뒤에 “어라…?”를 외치게 만든다. 서로 다른 종이지만 모험을 거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파트너가 되는 기생수의 인간-이생물 콤비와 달리, 치키타와 데라르는 명실상부 서로 정이 들어 감정적 동화를 하는 가족이 된다. 비정한 세상 속 여러 모습을 보면서, 그 속에서 여하튼 서로에게 의지하는 존재들이 서서히 정서적 교감까지 이루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잔인무도하며 따뜻한 만화다.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져가는 이야기, 즉 데라르가 치키타를 통해서 인간에게 공감하게 되고 치키타가 데라르를 통해서 인간 바깥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섭리를 깨닫고 보다 큰 차원에서 여러 상대를 포용하는 것을 익힌다. 그것은 세상 자체가 대단히 정감 넘치고 따뜻하며 무언가가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라서가 아니라, 바로 그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인간사의 어떤 감정과 논리도 약간만 시점을 달리하면 전혀 당연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 같이 함께하는 이와 교류하며 정을 쌓는 것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귀결이다.

작품의 전개방식이나 연출 스타일은, 즉흥이라는 말로 대략적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하다. 그림체 자체가 세밀함보다는 바로 바로 그린 듯한 가벼움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 우선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약간만 읽다보면 그것이 무성의함이 아니라 작가의 핵심적인 개성이라는 점이 이해가 된다. 요괴 기담물 특유의 오컬트적 시각소재로 멋부리기를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듯한 자세는, 주술사의 요괴 봉인 마법진을 고대 문자의 미술적 결합 같은 전형적인 연출이 아니라 그냥 “가지마”라는 단어를 바닥에 잔뜩 써놓는다든지 하는 유머러스한 대목에서 쉽게 드러난다. 이야기 역시 치밀한 복선과 빈틈없이 맞물리는 전개가 아니라 갑자기 닥치는 상황과 일상의 여러 우연, 그리고 그 속에서 간혹 서로 꼬여있고 다시 인연이 닿고 떨어지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런 설렁한 전개방식이, 긴 세월 속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그 속에서 축적되는 관계라는 주제와 만날 때 기대 이상으로 대단히 효과적이다. 마치 실제 세상사의 파편적이고 우연의 연속이고 하지만 결국 무언가가 쌓여가는 그런 모습하고 닮았으니 말이다. 물론 작품의 한계 역시 이런 점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선, 내용의 과격함 때문에 – 지나치게 기이해서 오히려 농담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농담처럼 건네지만 너무나 일종의 현실적인 비정함이 가득해서 서늘해지는 그런 과격함 말이다 – 대상 독자층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더 자세하게 다룰 수 있는 캐릭터들과 그들의 사연이 종종 너무 쉽게 폐기 처분된다거나, 개인들의 친분 이외에는 인간 세상 전반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관적이라는 점 등은 얼마든지 거슬려 할 수 있는 지점이다. 아마도 한 챕터 이상 무사히 읽었다면 그런 점은 이미 감안하고 작품 속에 몰입할 준비가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치키타 구구』는 원래 한국에 4권까지 시공사에서 출간되어 열성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은 바 있으나, 해당 출판사가 수년 전 만화사업을 대폭 정리하면서 이후 내용의 발간이 수년간 중지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팬들의 바람에 힘입어 최근 새 출판사에서 전 8권 완간을 목표로 새 번역을 입혀서 재간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 속 두 주인공이 요괴와 관련된 여러 일상사 속에서 서로에게 제대로 나름대로의 책임을 다하며 점차 정을 쌓아가듯, 독자와 출판사도 작품을 끝까지 성실하게 출간하고 읽어주는 관계 속에서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다면 무척 바람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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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치키타 GUGU 1
토노 지음/조은세상(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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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1일 6시30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관련 글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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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관계의 축적 – 『치키타 구구』[기획회의 2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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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키타 구구 (TONO / 조은세상 / 서평 클릭). 시공사가 수년전 만화사업부를 대폭 정리하면서 떨궈낸(즉 안 팔린) 명작 […]

Comments


  1. 치키타구구 설정이 특이한만큼 재미도 상당하죠 ㅋㅋ

    역시 바라는건 완간 !

  2. 전 토노의 그 개성있는 캐릭터 표현들이 그림부터 마음에 들더라구요.
    입꼬리가 참 인상적이라고 해야할까요?

  3.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만화랍니다. 니켈 최고. 킹왕짱. 그나저나 조은세상 판이 토노씨의 축하용 인사 페이지가 하나 늘었다는 것말고는 큰 변화가 없다길래 지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완간을 부탁하는 마음에서라도 누구 줄 겸 선물용으로라도 구매를 해야하려나 싶습니다.

  4. !@#… roo님, 마음동화님/ 다행히도! 출판사쪽에서 완결편까지 일괄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클릭). 수습불능의 큰 사고만 없다면, 탄탄대로.

    nomodem님/ 그림체라면, “요사스러운 눈빛”도 상당하죠.

    dcdc님/ 축하용 인사 페이지가 늘었다는건 완전히 새로운 판본인겁니다(레드썬… 얍!). 새로 사시고 이전의 시공사판을 선물로 주는 것도 방법. 아니, 그건 또 그것 나름의 레어가치가 있겠구나. 그냥 망설임 없이 알아서 지르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