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과 어른의 간극에서 하는 재담 – <다르면서 같은> [기획회의0502]

꼭 자서전 차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작품의 생동감 확보라는 측면에서 참 편리하다. 특히 성장이라는 모티브를 가진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자칫 잘못하면 자아성찰이라는 무게에 어깨가 짓눌려서 지나친 자기연민의 어두운 나락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성장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무척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하지만 한국계 미국 작가인 데릭 커크 킴(한국명 김지훈)의 작품집 <다르면서 같은>을 읽다보면, 그런 어려움이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가 풀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쫒아가다 보면, 유머감각과 자기연민은 애초부터 너무나도 친한 파트너처럼 느껴진다.

<다르면서 같은>은 원래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한 같은 제목의 중편과, 기타 짦막한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개인 출판으로 처음 발간되었다가, 대형 출판사에 발탁되어 다시 출간된 후 그 해 북미지역의 대표적인 3대 만화상인 하비, 아이스너, 이그나츠에서 신인상을 모조리 휩쓴 화려한 데뷔를 거두었다.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표제작인 ‘다르면서 같은’를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이 작품은 20대 후반을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인 주인공 사이먼과 그의 친한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인 낸시가 어느 주말에 한 낯선 남자를 찾기 위해 벌이는 작은 모험(?)담이 줄거리인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섬세한 집착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어떤 순간에도 낙천주의에 빠지지도, 유머감각을 잃어버리지도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이 이 모든 것의 척추를 이루어주고 있다.

한국계라고 해서 왠지 뻔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옛 TV시리즈물 의 이상한 이국 공간이 아니라 그냥 미국이다. 정체성과 관련된 고민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민족주의의 차원이 아니라 인종적 출신 성분의 문제다. 이들의 생활은 ‘교포’가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인 것이다. 좋은 예는 사이먼과 낸시가 슈퍼마켓에서 오리엔탈 맛이라고 쓰여진 라면을 놓고 펼치는 짧은 만담대화인데, 미국사회가 아시아계에 대해서 가지는 생활화된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무척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다. 여하튼, 결국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성장은 추상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한 애매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아나가기 위한 삶의 지혜를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는 2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철없이 방황할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활에 찌들고 굳어버리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이기 때문이다. 법적인 성인이지만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않은 시기. 장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는 않지만 직장은 있고, 결혼에 진지하게 목매이기는 아직 싫지만 고등학교 동창 녀석 가운데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시기인 것이다.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조금씩 성장을 이루어내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성장통과 자기연민적 성찰은 결코 과잉된 낭만으로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취미로 만화나 그리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주인공일지라도 삶의 무게에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이유는, 바로 수다다. 혼자 독백으로 중얼거리는 일방향 뱉어내기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 고민은 바로 그 속에서 수정되거나 부정되고, 때로는 북돋아진다. 시시한 고민, 깊은 성찰, 실없는 농담 그 모든 것이 박진감 넘치는 수다 속에서 펼쳐진다. 마치 우디 앨런의 코미디 영화를 연상시키는 자아몰입형 주인공과 주변 캐릭터들의 화려한 재담이 촘촘히 수놓아지면서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모티브들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만화의 표현적인 속성들을 120%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대화가 아닌 ‘수다’의 박진감 넘치는 과정을 이토록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의 일등공신은 칸 안팎을 넘실대며 서로 꼬이고 연결되어 있는 말풍선들이다. 대화하는 주인공들은 서로 말허리를 끊으며, 서로의 말꼬리를 부여잡고 비꼬고, 그 속에서 모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 과정이 말풍선이라는 장치 속에서 완전히 시각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급격한 시점 전환과 긴 응시를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안정감 있는 칸 연출이 결합하여, 더욱 대화의 박진감이 깊이를 더한다. 그림체 역시 인종적 차이나 개별적인 표정을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 세밀함과, 만화적 여유를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약호화된 그림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내고 있다. 4칸 이상 가는 미국만화를 볼 때 한국의 독자들이 흔히 느끼곤 했던 필체나 문법에 대한 거부감은 적어도 이 작품을 읽을 때는 벗어던져도 좋다.

사실 자신이 직접 발굴해서 번역 소개한 책에 대한 리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겸연쩍은 일이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작품 자체의 우수성이 개인적 쑥스러움을 가볍게 넘어서줄 만한 힘이 있다. 물론 신인 작품 모음집이 첫술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실제로 표제작인 ‘다르면서 같은’ 이외의 단편들의 수준은 고르다고 하기 힘들다. 성찰의 무게감에 짓눌린 자전적 초기 작품들도 있고, 너무나 날 것 그대로의 거친 풍자 때문에 김이 빠지는 것도 있다. 그에 비해서 작가가 겪은 한국에서의 일화를 소개한 단편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주는 은근한 미소는 아마도 각별할 것이고, ‘올리버 픽’ 같은 짜증날 정도로 자기연민의 극단을 달리는 이야기들에 매니악한 재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인의 첫 단편모음집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볼 때 그 정도의 들쑥날쑥함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르면서 같은>은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자기연민에 관한 재담이다. 그것을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나간 표제작, 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도를 하고 있는 여타 단편들이 어울려서 각각 다르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르고도 같은, 다르기에 같은, 다르다는 점이 바로 같은 사람들의 관계맺음 – 사실 그것이 우리들의 삶 그 자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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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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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릭 커크 킴의 <다르면서 같은> 출간. 02/25 13:22 캡콜드(capc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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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이버덧글 백업]
    – pinksoju – 글 잘 읽었어요. 퍼갑니다. 2005/02/26 14:17

    – phlip – 잘 읽었습니다. 말끔한 번역에도 감사드리구요. 지적하신대로 표제작은 걸작인데 단편들은 너무 자기비하가 심하더군요. 이 표제작을 그리면서 이 친구가 슬슬 이런 컴플렉스를 극복해 간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근데 놀라운게 서른이 넘은 친구라니…그림으로 보나 정신세계로 보나 딱 20대 초반처럼 보이는데 참 성장이 늦은(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친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2005/03/03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