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의 승리 – <돌격! 크로마티 고교> [기획회의 050205]

!@#… 며칠간 운나쁘게도 내 블로그 업/다운/수정이 모조리 에러로 먹통이 되어있다가 이제서야 다시 정상가동(고객센터에 문의메일 보냈었으나 물론 답변이나 해명은 없음… 역시나 한 불친절 하는 네이버의 위력).

!@#… 지난호 기획회의 원고, 크로마티 고교. 우연히도 <두고보자> 동료이자 만담 라이벌/파트너인 김태권님도 <네트워커>에 연재중이신 칼럼 지난호에서 똑같은 작품을 다루었음. 그것도 하필이면 마찬가지로 개그의 문법에 대한 걸로…;; 음 무서운 일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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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함의 승리 – <돌격! 크로마티 고교>(노나카 에이지/서울문화사)

세상에서 가장 힘든 행위가 바로 남을 웃기는 것이다. 하물며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웃기는 것이라면 더더욱 압박을 받을 일이다. 특히 상대방들의 기대수준이 높을 수록 더욱 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개그 만화는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유머 기법을 고도로 발달시켜온 만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이미 수많은 웃음의 공식과 코드들에 식상하리만치 익숙해져버린 독자들을 만족시키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야심찬 첫단추를 꿰었다가도 아이디어 고갈에 따라서 얄팍한 패러디에 의존하다가 결국 단명해버리는 작품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했던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확실한 반전효과를 연마하거나, 획기적인 소재를 불러내고는 한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허를 찌르기 위해, 극단적일 정도의 무의미함과 뻔한 소재를 뻔뻔하리만치 끝까지 밀어붙이는 수를 쓴다. 상식에서 어긋남을 극단으로 밀고가서, 완벽하게 부조리하고 황당한(매니아층에서는 흔히 ‘아스트랄’이라고 일컫어지는) 요소들이 포진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일상적이고 뻔한 생활세계에 난데없이 그런 부조리한 인물들과 이야기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강렬한 대비효과와 함께 당혹스러운 악취미성 웃음을 터트리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황당한 괴리에 질려버려서 그냥 책장을 덮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벽’을 넘어서는 자에게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웃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돌격! 크로마티 고교>(노나카 에이지/서울문화사. 4권 출간중)는 최근 이러한 계열의 개그만화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줄거리만으로 요약한다면, 무척 단순하다. 카미야마라는 모범생이, 실수로 크로마티 고교라는 깡패 학교에 진학해서 그곳의 여러 인간군상들 틈새에서 일상적인 학창생활을 보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정과 성장의 모티브 따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불량아 집단이라는 설정 역시 양아치와 권력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단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괴짜 캐릭터들을 도입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싸움을 하고 세력다툼을 하기 위한 불량아가 아니라, 분위기는 잔뜩 잡지만 사실은 엄청난 바보인 괴짜들이라는 말이다. 그냥 성격이 괴짜라든지 하는 정도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콧수염 아저씨, 진짜 고릴라, 로봇, 복면 레슬러가 태연하게 학생으로서 등교하고 다닌다. 학원 폭력물의 전통을 이어받아 가끔 이쪽 학교의 누군가가 상대 학교에 납치당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깡패들이기 때문에 별로 불쌍하지도, 분노할 여지도 없다. 심지어 유일하게 ‘범생이’라고 설정되어 있는 주인공 카미야마마저도 실상 하는 짓을 보면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그 어떤 깡패보다도 더욱 악랄하다. 정작 그림체는 거친 선의 극화로 전형적인 조직폭력물을 연상시키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상식을 벗어던지지 않고는 도저히 즐길 수 없는 과격한 개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별다른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수학여행도 가고, 학교도 다니고,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가 악플에 스트레스도 받는, 그렇고 그런 일상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이 만화는 적극적으로 그 시시함을 스스로 강조하기까지 한다. 등장인물들의 실제 대화를 통해서, 사실 원래 현실이라는 것은 별 것 없고 극적인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작중에서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막나가는 허풍을 핵심무기로 하는 개그만화라는 장르에 속해있으면서, 오히려 그 점을 스스로 지적하고 비웃어버릴 정도로 자학적인 정서가 있는 셈이다. 이런 극단적인 뻔뻔함을 처음 접할 때는 당혹감이, 두 세 번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슬슬 어이없는 웃음으로 바뀐다.

연출방식 역시 이런 패턴에 맞추어 짧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결코 복선이나 중층적인 서술을 사용하지 않고, 아무리 당혹스럽고 황당한 전개라고 할지라도 우선 벌여놓고 보는 것이다. 언제라도 갑자기 다음 칸, 다음 페이지에 외계에서 운석이 떨어져서 학교 건물을 덥치더라도 이상하지 않고, 말을 타고 학교에 달려들어와도 태연자약하다. 특별히 결정적인 개그에 앞서서 반전효과를 위해 평온하고 정상적인 정서를 강조하는 연출조차도 왠만하면 그냥 배제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도 아무리 황당한 일이 벌어져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냥 납득해버린다; 엄청난 바보들이니까 말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림체를 통한 시각표현 역시 조금도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막무가내 부조리 개그 분야의 최고 모범사례 작품인 <멋지다 마사루>(우스타 쿄스케 작)에서조차 결정적인 임팩트가 필요한 순간에 그림체의 밀도를 급격하게 높이거나 낮추는 등 상당히 잘 계산된 시각연출을 보여주고 있는데, <돌격!크로마티 고교>는 그것마저도 무시한다. 마치 무표정하게 사랑의 노래와 저주의 폭언을 동시에 퍼붓는 사람마냥, 이 작품은 너무나 균일하게 진행되기에 더욱 더 그 속에 담긴 부조리한 개그요소들이 더욱 돋보인다.

모든 개그만화의 숙명인 ‘독자의 익숙해짐’이다. 독자라는 존재들의 적응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서, 어떤 새롭고 과격한 개그라고 할지라도 어느 틈에 익숙해져서 더 새롭고 강한 자극을 찾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식상해지는 것이다. <돌격!크로마티 고교>는 오히려 처음부터 반복과 지리멸렬, 황당함과 충격효과를 마구 남발함으로써 뻔뻔하게 그 점을 정면돌파하는 길을 택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 결과 2002년 고단샤 만화상 수상을 통해서 대중과 업계의 높은 평가를 증명 받았고, 애니메이션 시리즈 방영에 이어 심지어 최근 실사영화까지 제작되었다. 남을 웃음으로 인도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결국 개성과 뚝심으로 성공에 도달하는 이런 작품들이 나와주고 있기에 여전히 개그만화는 즐거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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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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