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약의 끝에서 웃음을 보다 – 이말년시리즈 [기획회의 291호]

!@#…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부분은 역시 아이디어 고갈이라고 느끼면 휴재를 한다는 것. 에피소드 개그물에 있어서는 필수적이라고 본다.

 

비약의 끝에서 웃음을 보다 – 이말년시리즈

김낙호(만화연구가)

1,2년 전부터 온라인상에는 ‘병맛만화’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병신 같은 맛이 난다”는 줄임말인데, 일반적인 서사의 기준에서 생각하면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극단적으로 밀어붙임으로 결국 웃음을 자아내고 마는 종류의 만화를 지칭한다. 이런 만화의 뚜렷한 원조가 있다기보다는, 00년대 초부터 형성된 몇가지 흐름들이 만나면서 진화한 것이다. 중심이 되는 것은 온라인 서브컬쳐 커뮤니티 등지에 산재한 유머/만화게시판에서 표현기술은 미숙하지만 다분히 허무하고 사소한 공감에 바탕한 유머코드에 의지하는 아마추어 만화들의 유행이었다. 여기에 온라인 만화의 손쉬운 주류화 과정, 90년대 후반 [멋지다 마사루]등 일련의 성공적 부조리 개그물을 보고 자라난 작가 및 독자 세대의 대두 등이 결합되었다. 그 결과 부조리와 파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 집착적으로 활용하며 스스로의 미숙함마저도 유머 소재로 삼아버리는 종류의 만화들이 증가했고, 대중적 성공작들까지 다수 등장하자 언젠가부터 장르로서 이름이 붙은 것이다.

파격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라고는 하지만, 가장 뚜렷하게 그것을 자신의 공식으로 삼아 히트를 기록한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말년 시리즈](이말년, 중앙북스)다. 캐릭터들이 한번씩 까메오 출연을 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독립된 단편들의 모음인데, 모든 이야기들은 비약적 전개와 충족적 완결을 거의 전적으로 배제하는 황당한 결말로 맺는 것이 특징이다. 단편들 가운데 온라인에서 작가의 이름을 처음 화자시킨 대표작인 ‘불타는 버스’의 경우만 해도 그저 버스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는 정도에서 시작하다가, “이렇게 된 것, 청와대로 돌진한다”라는 영화 ‘실미도’를 패러디한 대사와 함께 난데없이 불타는 버스를 몰고 청와대로 가는 식이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이 절묘한 오케스트라가 되기도 하고, 조선시대에 잘 생긴 천민 하인이 못생긴 양반 도련님을 제치고 후광을 날리며 인기스타로 사랑 받는 내용 하나로 작품이 진행되다가 그냥 그대로 끝나기도 한다. 그림체는 조폭극화를 주로 그리는 김성모의 과도하게 비장한 표정과 옛 명랑만화들을 연상시키는 헐렁한 선이 마구잡이로 섞여있다. 그런데 설렁설렁 그린 것 같지만 꽉 찬 연출과 구도를 품고 있던 고우영 만화 같은 식의 느슨함이 아니라, 디씨갤러리 만화게시판에 넘쳐나는 그림 연습을 따로 하지 않은 아마추어 애호가들의 느낌을 연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인기를 끌고, 무엇보다 이렇게 개그만화로서 특출나게 재미있는 것인가.

쉽게 접근하자면 패러디 감각을 먼저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 서브컬쳐의 다양한 유행들이 늘 시기에 맞게 패러디되어 있는데, 가상의 생활을 만들다시피 하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장르들에 대한 열광을 패러디하여 농촌 게임을 만드는 개발사를 다룬 ‘두덕리 온라인’이 한 사례다. 아니면 소위 잘 만든 서사적 틀과 장르를 파괴하는 쾌감 그 자체를 생각할 수도 있다. ‘기승전병’, 즉 기승전결이 아니라 결말이 괴상하게 끝나는 것이 매력이라는 평을 남기는 덧글들이 온라인 연재에서 늘 넘쳐나는 만큼 확실히 중요한 요소일 수는 있다. 아니면 적당히 못 그리고 마구잡이로 전개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 작가와 독자의 경계 흐리기에서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패러디뿐이라면 보편적 공감대를 올릴 정도의 수준으로 올라서지는 못한다. 패러디 하나를 위해서 작품을 전개하는 단발마적 전개는 오히려 꽤 정통파 서사연출과 치밀한 예상 가능한 반전을 필요로 한다. 틀의 파괴나 경계 흐리기 역시, 다른 수많은 마구잡이 전개방식의 온라인 아마추어 작품들과 [이말년시리즈]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말년 시리즈]의 매력은 일관되고 확실하게 어이없는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고정 캐릭터들의 재미있는 일화를 독자들에게 입담 좋게 들려주는 식이 아니라 거의 매번 그럴듯한(?) 서사물에 도전한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한 모험을 떠나고, 마을의 정치권력을 놓고 노인들이 치열하게 싸운다. 다만 치밀하게 서사구조를 쌓아올렸다가 일거에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구 무너트리면서 점점 더 비약이 심해지고, 결국 이것보다 더 어이없게 만들 수 있을까 오히려 기대감이 생길 때 그것마저 결말에서 무너트린다. 그런데 정작 등장인물들은 완전히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소위 ‘사차원적’ 성격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려는 것에 있어서 한계를 모르고 더욱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식이다. 비약의 끝에는 큰 웃음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형식적 장난, 웃음을 위한 웃음이 아니라 몰입하며 읽을 수 있는 것은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오늘날의 현실사회에 대한 연결고리 덕분이다. 하지만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풍자를 할 때라도, 그 사안의 가장 치졸한 측면들을 뽑아내어 황당한 서사물의 밑거름으로 삼되 결코 교훈적인 메시지 또는 냉소를 통한 분노 유발을 유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삼국지의 제갈량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에서는, 대단한 재능을 지닌 책사지만 누구에게도 발탁되지 않은 상태로 은거하는 그를 현재 한국의 취업준비생 백수에 빗대고 있다. 적당히 한심한 정신세계, 사소하고 치졸한 욕심들, 사실은 그렇게 대단히 잘난 구석이 없는데도 고집은 강한 모습의 캐릭터들이 독자들과 공명을 일으킨다. 가장 황당한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그런 방식으로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이다.

모든 개그만화는 연재의 과정에서 패턴 반복의 피로도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특히 파격을 중심에 놓는다면 더욱 그렇게 되기 쉽다. 하지만 파격의 활용에 있어서 가장 까다로운 방식으로 진행되는 스타일의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말년 시리즈]는 기복이 적은 편이다. 막나가는 비약을 통해서 의외의 전개를 만들어내는 것은 금새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힐 듯 하지만, 소재의 풀을 넓힘으로 상당히 효과적으로 그런 동어반복 매너리즘을 피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한동안 네이버와 야후라는 두 개의 포털사이트에서 일주일에 두 편을 연재하는 많은 작업량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휴재 재충전을 활용해가며 질적 일관성을 유지했다. 이번에 출간된 단행본은 그 중에서도 잘 된 작품들을 선별한 모음집인데, 전용 에피소드 추가 등 이제는 거의 보편적이 된 소장가치 향상 기법들을 구사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볼 때와 종이 위에서 볼 때 큰 차이를 일으킬 정도로 어느 한 쪽에 특화된 그림 및 전개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독서경험상의 장벽은 낮지만, 역시 관건은 온라인 서브컬쳐의 색이 강한 이 작품이 독자층을 웹툰 독자가 아닌 종이책에만 익숙한 이들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가 성공의 갈림길일 듯 하다.

이말년 씨리즈
이말년 지음/중앙books(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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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진격의 거인. 혹은, 처절한 박력을 다시 주류 인기요소로 끌고나온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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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궁금이님/ 기본적으로 낙장불입입니다(제게 삭제 요청을 하시면 되긴 합니다). 다만 오타 등을 고려, 30분정도 이내로 수정은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