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을 가도 또 다른 삶 – ‘실종일기’ [기획회의 295호]

!@#… 너무나 담담해서, 중요한 삶의 통찰들도 그냥 스리슬적 흘러간다. 하기야 그것도 삶.

 

도망을 가도 또 다른 삶 – [실종일기]

– 김낙호(만화연구가)

살다보면 드물게 혹은 자주, 도망가고 싶을 때가 생긴다. 현실의 어떤 난관을 바꿔 보리라, 아니면 현실에 억눌린 나를 바꾸자 그런 식의 거창한 건설적 에너지를 할애할만한 이성도 감정도 여력이 남아있지 않을 때다. 해결하자는 결의를 할 힘조차 없기에, 그냥 멈추고 다른 세상으로 사라지고 싶어지는 우울함 말이다. 심지어 도망칠 에너지조차 없어지는 정도에 도달하기 직전의 그 순간, 어떤 이들은 결국 세상으로부터 도망을 간다. 자살 이야기가 아니라, 자발적 실종 말이다. 기본적으로 그간 쌓은 세상 속에서의 위치, 그리고 관계해온 사람들을 등지고 초기설정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인 만큼 충분히 자학적 행위지만,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경로라는 해방감도 함께한다. 어차피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과정은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즐겁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삶에 만족하는 것도 좋고,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면 돌아오는 것도 좋다.

[실종일기](아즈마 히데오 / 오주원 역 / 세미콜론)은 한 만화가가 두 번의 자발적 실종, 한번의 또다른 의미의 사회적 실종을 겪고 돌아온 자전적 이야기다. 작가 아즈마 히데오는 일찍부터 천재 취급을 받았지만, 대중적으로보다는 컬트적 인기를 누린 작품들이 더 많은 이다. 현재 일본 장르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로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여성캐릭터상, 특히 소위 ‘모에’로 불리우는 코드화된 취향선호를 선구적으로 개척했고, 70년대 뉴웨이브 SF만화를 다뤘으며 장르 비틀기의 부조리극까지 뻗어나간 바 있다. 하지만 대중적 히트를 바라는 편집부, 마이너 컬트 취향의 세계와 주류잡지를 오가며 엄청난 양의 원고를 쏟아내야 하는 상황, 그런 것에 휩쓸리며 뭐가 뭔지 모를 상태로 80년대 말을 맞이했다. 작품은 89년의 어느날, 갑자기 작가가 원고를 펑크내고 1주일간 친구 집에서 잠적하다가 야산에서 자살기도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리얼리즘으로 그리면 우울해지는 이야기니까 긍정적으로” 그려내겠다는 선언을 하고 고작 4페이지만에,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그 어두운 이야기가 가감없이 디테일 넘치게 펼쳐진다. 비탈길의 나무에 목을 메었지만 중간에 잠들어서 살아남았고, 첫 번째 실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숲 속에서 작가는 노숙을 하며 주변에서 주워온 쓰레기로 어떻게든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간다. 경찰에 발견되어 돌아와 다시 만화를 그리게 된 몇 년 후, 또 한번 자발적 실종을 감행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숙자생활을 하다가 무려 가스 배관공이 되어버린다. 다시 돌아온 후 몇 년 후, 이번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끌려가서 또 다른 의미에서 사회로부터 실종되는 상황을 겪는다.

도망을 가게 되는 계기란, 언젠가 닥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찾아와 있다. 인기와 비례하여 늘어난 원고작업량을 그럭저럭 해내고 있어도, 회의와 슬럼프는 이미 그곳에 누적되어 있다. 자발적 실종과 노숙이라는 극단적 경험을 뒤로 하고 다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또다른 방랑벽은 이미 찾아와있다. 그리고 다시 도망가지 않기로 하고 나름의 대처를 찾았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알코올 중독이 어느 날 이미 찾아와있다. 일이 벌어지고 난 후 돌아보면 이미 선을 넘어왔다. 숲 속 노숙, 배관공 변신, 알코올중독 치료병동 등 매번의 도망마다 임계점은 점점 더 시나브로 넘어간다. 이쪽의 “정상적” 삶과 도망간 삶 사이의 중첩 부위가 넓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다버린 음식쓰레기에 기뻐하며 생활하는 숲 속 노숙자 생활도, 갑자기 육체노동자가 되어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되는 배관공 생활도, 병동에서 재활하면서 지내는 시간도, 작가의 원래 삶을 ‘일단 정지’시키고 아무 기반 없는 위에서 삶의 근본틀을 다시 만들며 겪어 보는 것이다. 숲 속 노숙은 의식주의 재발견이며, 배관공 생활은 사회관계의 리셋이고, 병동 생활은 그간 실종에서도 나름대로 살아갈 전제가 되어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로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위대한 정신에 관한 감동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그런 열악한 조건도 삶의 또 다른 일면이며, 지나고 나면 담담하게, 그리고 자랑스럽지는 않아도 최소한 밝게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도망을 가봐도, 돌아와도, 다시 도망을 가도 여전히 삶은 삶이다.

[실종일기]는 그저 그런 탈주 체험이 아니라, 가장 기본부터 시작하는 인생 방식들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거나, 만날 만한데도 못 만나기도 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듯 한 숲 속의 이웃 노숙자는 결국 못 만난다. 혹은 처음에는 그저 뭐든 일을 좀 해볼까 하고 시작한 단순 해체 잡부에서, 어느덧 배관공으로 전문기능을 갖추며 팀원들을 만나게 된다. 그저 일을 대충 하는 이들의 모습도 있고, 색마도 몽상가도 그저 사람 대하는 요령이 나쁜 상관도 있다. 알코올중독 치료병동에서 만난 이들도 각자 여기까지 오게 된 삶의 모습들이 있는 상태에서 이곳 생활을 함께 한다. 작가 자신의 삶도 다른 이들의 삶도, 결코 불쌍하지 않게, 반면 무슨 보헤미안 라이프스타일로 억지로 긍정하지도 않게 그저 담담하고 명랑하게 제시한다. 각 상황과 행동들을 세밀하게 보여줄 따름인데,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유머러스한 그림과 연출로 막아낸다. 하지만 희화화하여 폭소로 빠지지는 않게 한다. 실로 미묘한 밸런스인데도 크게 작위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맞춰내는 모습이야말로 작가의 실력이다. 어떤 즐거운 상황도 괴롭거나 기이한 상황에 대해서도, 건조한 설명과 밝고 둥그런 그림으로 일관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실종 이야기 사이사이에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원래의 삶에 대한 단서들을 끼워넣고, 독자들이 뒤로 갈수록 단순히 기인생활담이 아니라 인생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예술을 하다가 도망가서 노숙을 할 때는 육체노동을 하고 싶어지고, 육체노동을 하고 있으면 예술을 하고 싶어지는 욕구의 흐름을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절절하게 설명해내겠는가.

결국 작가는 이쪽 현실로 돌아왔고, 2005년에 [실종일기]로 각종 만화상을 휩쓸었다. 정통파 뉴웨이브SF의 신동, 장르 패러디의 부조리극과 로리콘 성인 동인지 코드의 선구자를 거쳐서, 이번에는 삶을 관조하는 자전적 성장물(!)로 다시 한 번 우뚝 선 셈이었다. 우울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라면 명랑한 그림만 보고 책을 펼쳤다가 딱히 희화화하지 않은 내용 때문에 속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절망 밑바닥의 우울한 생존기를 원하는 이에게는 명랑한 자세가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그저 펼쳐보여주는 또 다른 삶의 일면들을 그대로 삼키고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면, 결국 묘한 충족감을 얻고야 말 것이다.

실종 일기
아즈마 히데오 지음, 오주원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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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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