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엔 불과 바람의 나라로! [한겨레21/629호]

!@#… 이번에는 올해 추석특집호 한겨레21에 들어간 글. 역시 데스크 거친 완성본은 지난주부터 정식 사이트에서 공개중. 분량과 컨셉 조절 상 리드문은 거의 담당 기자님의 재작업(깔끔발랄하게 잘 작업해 주셔서 감사. 정말 운나쁘게 실력없는 데스크를 만나면 대략 피눈물인데). 여기 사이트는 항상 그렇듯 원고 버젼으로 공개. 주어졌던 컨셉은 “대하서사”, 덤으로 고대사 테마도 같이 넣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쪽이었음.

한가위엔 불과 바람의 나라로!

김낙호 (만화연구가)

사람들이 휴일을 맞이하는 자세는 어떠할까. 분위기 전환과 적극적 놀이 활동이라는 방법으로 평소의 스트레스를 ‘해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집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소진된 에너지를 ‘재충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일정 시간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무척 심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쇼파에 비스듬히 누운 우리네들은 TV, DVD, 도서 등 이야기가 담긴 오락을 추구하며 긴 연휴를 보낸다. 그 중 특히 만화 읽기는 높은 몰입도, 그리고 한나절 계속 읽어도 눈과 머리가 아프지 않은 편안함 덕분에 더욱 각광받곤 한다. 그렇기에 특히 긴 이번 추석 연휴, 만화책을 붙잡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왕이면 연휴에 시간을 주욱 내서 읽는 것이라면, 어차피 평소에도 하듯 자투리 시간 때우기 식으로 틈틈이 만화를 읽기 보다는 길고 강력한 작품을 통째로 독파해보는 것이 어떨까. 대하 서사물의 유장한 호흡을 완수했을 때 오는 성취감의 즐거움은 연휴이기에 시도해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섬세함과 선 굵은 서사의 조화

최근 수년간, TV속 사극 드라마들은 기존의 권력암투 일변도에서 벗어나 섬세한 인간적 갈등과 애증을 녹여내는 ‘퓨전’ 방식이 돋보이고 있다. 이렇듯 섬세함과 선 굵은 서사가 조화를 이루는 역사물의 모델은 바로 순정만화에서 찾을 수 있다. [불의 검](김혜린 / 전 6권 / 대원CI)은 순정만화가 대하서사물을 제대로 다룰 때 얼마나 멋들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선수격이다. 이 작품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오는 상고시대를 무대로 하는 격정의 드라마인데, 여러 부족국가들의 치열한 투쟁과 그 속에 담긴 종교와 정치, 민중들의 삶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젊은 왕과 숙명 속에 고뇌하는 장군 등 무게감 있는 인물들과 함께, 부족의 운명을 결정할 철검을 만들어내는 가녀린 여성 대장장이라든지 종교지도자인 무녀 등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여성 캐릭터들이 특히 돋보인다. [바람의 나라](김진 / 22권 발간중 / 시공사) 역시 이 계열의 내로라하는 명작이다. 이 작품은 일개 부족국가에서 대국을 향해 성장해가는 고구려를 무대로 한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되는 주인공 무휼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대업과 개인적 고뇌 사이의 갈등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주몽과 꼭 닮았으며 부도에 고구려의 깃발을 꼽고자 하는 무휼의 꿈을 보좌하는 것은 사신수를 인격화한 매력적인 인재들이며, 나아가 자명고의 신화 역시 인간사의 드라마로 재해석되어 있다. 이렇듯 누구나 창작의 모범으로 삼고 싶을 만한 독창적이면서도 원형적인 힘을 지닌 캐릭터들이 큰 매력. 다만 두 작품 모두, 상당수 성인 남성독자들의 경우 순정만화의 그림스타일이나 연출방식에 낯설어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뒤돌아서는 아쉬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 작은 벽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보람이 있을 것이다.

가상의 상고사를 무대로 벌이는 활극모험물

대하서사물이라고 해서 항상 장중하고 무겁게만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역사적 무게니 의미니 하는 것을 벗어던지고, 활극 도는 무협 모험물로써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 [천국의 신화II – 대단군] (이현세/ 전29권/ 컨텐츠와이드)은 만약 한국의 고대 상고사로 보겠다고 무게를 잡으면 오류투성이에다가 지나친 민족주의로 점철된 당혹스러운 작품이겠지만, 모험활극으로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성인 극화다. 어디로 보나 ‘오혜성’에 가까운 단군왕검의 나라 세우기 활극은 이현세 특유의 남성적 에너지 과잉과 힘찬 비약으로 가득하다. 복잡한 생각보다는 시원시원한 재미로 후련해지고 싶을 때 적격이다. 혹은 그래도 역사적 사명이 자꾸 떠올라서 오락적 독서를 방해한다면, 아예 좀 더 설정이 자유로운 다른 작품 가운데 선택해볼 수도 있다. [단구] (박중기 / 전6권 / 학산문화사]는 상고시대를 무대로 한다. 이야기는 각 민족들이나 문명은 느슨한 상상력으로 만든 작품으로, ‘만신무사’ 라는 특수한 전사의 숙명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각 부족들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전개된다. 만신무사의 피를 지닌 주인공과 그와 함께하는 이들의 격렬한 전투가 힘 있는 필치로 전개되는 와중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민초의 힘

역사를 다루는 대하 서사물은 종종 역사를 만드는 자들을 권력자들에 한정하고, 그 들의 이야기에 전념하곤 한다. 하지만 그 세계 속에 사는 민초들의 삶이 때로는 더욱 강렬할 수도 있는 법. 조선 후기 피폐한 시대에 분연히 일어난 두 도적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이들은 홍길동마냥 절대선의 존재라기보다는 지나친 피폐함이 싫어서 의적을 자처하고 더 나은 세상을 소박하게나마 만들어보고자 온 힘을 다해 노력하다가 산화한, 한국문학의 굵직한 주인공들이다. [장길산] (백성민 / 전20권 /코믹플러스(온라인))은 한국화풍의 강렬한 선을 바탕으로 황석영 원작 특유의 민중적 분위기와 내용을 가감 없이 옮겨낸다. 끝없이 날아오르는 장산곶매의 전설로 장식된 서두의 치열함은 마지막 권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치도 줄어들지 않는다. 또 다른 유명한 도적이라면 바로 [임꺽정] (이두호/ 전32권/ 자음과모음)인데, 이두호의 만화는 홍명회 원작 이외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때로는 해학적으로 때로는 진중하게 그려지는 임꺽정과 청석골 두령들의 이야기는 한바탕 마당극 마냥 생동감 넘친다.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의 장엄함은 단연 백미.

대하 서사의 호흡을 가진 ‘교양물’의 재미

연휴 동안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뭔가 배운 것도 있다고 자랑해야 ‘헛된 시간낭비’를 안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왕 무언가 배울 것을 얻더라도,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하서사물의 호흡을 가진 교양만화는 어떨까. 기억 속 고정관념으로 무슨 조악한 B급 아동학습만화를 생각할 필요 없다. 중국 고대 창세 전설부터 한나라까지의 장구한 역사를 중요한 사자성어 에피소드로 나눠가면서 유쾌하게, 그리고 신랄하게 풀어나가는 [만화 십팔사략](고우영/전10권/애니북스)이라면 그 목표에 충실하게 부합된다. 혹은 좀 더 한국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다면, [조선왕조실록](박시백/ 7권 발간중/ 휴머니스트)을 추천한다. 정사에 충실하면서도 명쾌하게 당대의 권력관계, 사회적 맥락 등을 풍부하게 엮어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 10년간의 인기 조선 궁중사극을 한꺼번에 보는 듯한 드라마적 재미 또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특징. 혹은 아예 스케일을 확 키워서 전 세계, 전 인류의 역사를 대하서사로 읽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래리고닉/3권 발간중/ 궁리)는 미국에서 각종 교육 자료로 쓰일 정도로 높은 정보성을 지님과 동시에, 인류 문명에 전반에 대한 공평한 시각으로 이 세계의 가장 ‘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작품들을 독파하고 나면, 즐거움과 배움은 둘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추천이라는 것이 그렇듯 위의 목록은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즐기다보면 더 많은 좋은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여하튼 동네 만화가게를 털어오든, 인터넷 만화방에 일일 결재를 하든, 아니면 과감하게 작품 전질을 박스세트로 ‘질러’버리든(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채비를 갖추고 한번 스케일 큰 대하 만화의 세계로 빠져들 시간이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PS. 만화 추천할 일이 있어서 ‘바람의 나라’를 소개할 때면, 항상 이 작품이 얼마나 원형적 창작이고 또 다른 창작이 막 따라하고 싶어서 안달일 정도인지를 슬쩍 강조하곤 한다. 태*사신기가 나중에 어떤 성공/실패를 하고 어떤 법적 판단을 받든 간에, 좋은 창작의 영향관계 방향성이라는 요소는 헷갈리면 안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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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1
김혜린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바람의 나라 22
김진 지음/시공코믹스
천국의 신화 2부 29
이현세 지음/다크북
단구 1
박중기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임꺽정 32
이두호 지음/자음과모음
십팔사략 10
고우영 지음/애니북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3
래리 고닉 글.그림, 이희재 옮김/궁리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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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한가위엔 불과 바람의 나라로! [한겨레21/629호]

Comments


  1. 사실 추석인사 드리러왔는데 글이 많아서, 블로그방문자로서 해피하네요.

    임꺽정을 보니 최근 기대하려다 말했던 ‘파행’이 생각나서 씁쓸해집니다.

  2. !@#… nomodem님/ 연재가 파행을 거듭했죠. 제목의 주술적 힘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