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논하는 만화들 [싱크 7호]

!@#… 그런데 이 연재물에 대한 편견은 무엇일까(…뭐 관심이 있어야 편견도 있지만).

 

편견을 논하는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편견’이라는 것은 부정적 어감과는 별개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나무’를 보는 좌뇌와 ‘숲’을 보는 우뇌로 구성되어 있고(좌뇌 우뇌가 이성-감성으로 구분된다는 식의 민간설화가 많지만, 당연히 틀린 주장이다), 인지과정 역시 세밀하게 자료를 받아들여 판단하는 경로와 가로질러 단순화하는 ‘어림법’(heuristics)의 경로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세상을 단순화하는 것의 유리한 점은 사실 명쾌하다. 반복적인 상황에서 더 빠른 판단을 가능하게 하고, 그 덕분에 뇌 처리용량을 덜 낭비함은 물론 지금껏 종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열쇠도 되어주었을 것이다(예를 들어 “이빨 큰 짐승은 닥치고 육식 맹수다”라는 어림법을 생각해보자). 그런 어림법이 사회적 환경에서, 사람에 대해 적용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퍼지며 축적된 것이 바로 편견이다.

그런데 사회적 인간이란 워낙 복잡한 존재라서 그런 편견으로 논하기 힘든 다양한 경우들이 훨씬 많고, 그렇기에 편견이라는 말은 당연히 부정적 어감으로 쓰이곤 한다. 편견의 내용이 너무 자주 틀리는 것은 물론, 편견이 생겨나는 계기 역시 자연스러운 종합화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나치 독일의 “유태인은 탐욕스럽다”, 현대 한국의 “동남아노동자는 게으르다”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편견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최대한 붙들어 놓지 않으면 개인도 사회도 큰 낭패를 본다. 한 사회의 톨러런스 수준과 직경되어, 사회 내적으로 강고한 진영분리가 아닌 건강한 다양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편견에 대한 성찰이다. 뿌리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편견의 존재와 발생 방식을 늘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되새김질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대중 서사문화 작품들이다. 교과서나 인문사회 서적으로 백날 배우는 것은 지식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특화되어, 일상적 인식에 흡수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반면 대중 서사문화는 재미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체화시키곤 한다. 당장 인격개조를 하는 수준은 당연히 아니지만, 무심결에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번 기회에, 편견에 대해 되새김질하기 좋은 만화 작품들을 몇가지 살펴보자.

거시적 기준의 편견

가장 간단히 편견을 직면하는 작품들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그냥 온갖 편견 덩어리인 경우다. 어떤 대중문화나 그런 작품들은 차고 넘치고, 만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단순화를 시키고 몰입감 넘치는 이야기를 꾸미기에 특히 유리한 만화이기에, 가끔 특출하게 오욕으로 빛나는 작품이 나올 때도 있다. [남벌](이현세, 야설록)이 좋은 사례다. 남벌은 편견에 대한 반성을 하는 작품은 결코 아니지만, 현대한국사회에서 흔히 출몰하는 각종 인종적, 남녀간, 계급적, 직종별 편견들이 노골적으로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져서 반면교사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그런 편견 덩어리가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개되기까지 한다. [남벌]의 세계에서 일본인들은 거의 다 비열한 제국주의자고, 유린당한 여성의 ‘명예자살’이 당연시되고, 남북한은 정치적 적대와 달리 함께 믿을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이다. 군 특수부대는 작전에 충실한 슈퍼히어로들이며, 외침에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은 그냥 자원창고이자 열강의 전쟁터이기에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현지조력자 이상이 아니다. 이 정도로 전형적인 편견으로 가득 채우고 나면, 의무교육과정에서 최소한의 시민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가 오히려 힘들 것 같다. 작품이 나온 90년대 초 당시 한국사회는 워낙 80년대의 경직된 인권의식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적 관심사만 스케일이 커진 상태였기에 어느 정도의 한계는 감안해도, 쉽지 않은 경지를 이룬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대 대중독자들과 좋은 호흡을 이루어, 큰 히트를 기록했고 말이다. 그런 작품 내용, 그런 인기 맥락을 지금에 와서는 한번 차분히 돌아보며 보편화된 편견의 호응력에 대해 성찰해볼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편견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민족이나 남녀 말고도 거창한 거시적 집단을 놓고 부리는 편견의 대표적 사례는 뭐니뭐니해도 ‘빨갱이’ 편견이다. 한국사회의 오랜 보편적 정치적 편견의 중심에 놓였던 것이 바로 이것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라기에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별로 알고 있지도 신경 쓰지도 않으며 그냥 적으로서의 북한을 미워하며 그쪽과 무언가 연결되는 듯 보이는 사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포괄적 악으로 몰기 위한 장치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박건웅, 허영철)는 허영철 수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의 만화판이다. 비전향 장기수로서 ‘빨갱이’ 낙인 속에서도 끝까지 그 사상을 굽히지 않은 한 인간이 한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에 대한 담담한 기록이다. 그의 사상에 동의할 필요는 없어도, 왜 그가 각종 편견 속에 모진 세월을 보내야했는지 스스로들에게 자문할 필요는 있다.

외모 편견

좀 더 다양하고 미세한 편견들도 많다. 가장 쉽게 드러나는 편견은 바로 외모에 대한 편견이다. 눈으로 뚜렷하게 보이고, 모습만큼 사람들끼리 어떤 공통의 스토리를 맞추어 내기 편한 것이 없다. [엔젤전설](야기 노리히로)은 엄청나게 험악한 외모를 지녔으나 속마음은 아주 모범적인, 실로 천사 같은 고등학생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코미디다. 무엇보다, 본인은 자신이 험악한 외모로 인해 사악하고 폭력적인 두려움의 대상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악마의 외모와 천사의 마음 사이의 격차, 하나하나의 행위에 대해 타인들은 엄청난 악의로 지레짐작하는데 사실은 평범한 선의라는 격차 사이에서 오는 엉뚱한 오해와 사고들이 유머러스한 이야기의 동력이 되어준다. 현실과 달리 결국 선의가 어떤 식으로든 전달이 되거나 전달되지 않아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소동이 수습되기는 하지만, 외모에 대한 편견으로 전혀 상대의 말을 들고자 하지도 않고 반응부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웃음과 함께 살짝 자신을 뒤돌아볼 기회를 준다(각자가 그런 기회를 실제 활용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외모 편견은 워낙 보편적이라서, 뿌리 깊은 일상을 세세한 디테일로 묘사하면 그런 과장이 필요 없이도 충분히 뼈저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다이어터](카라멜, 네온비)는 현재 한국사회 일반의 몸매에 관한 외모 편견을 가득 채워 넣는다. 건강에 해로울 정도로 비만인 주인공이 트레이너의 도움으로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는 분투기인데, 중간중간에 세간의 인식, 즉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상적 체형으로 생각하는 바에서 벗어나는 몸의 소유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편견을 퍼붓는지 자세하게 묘사된다. 단지 좀 통통하다는 이유만으로 노력도 안하는 게으른 성격일 것이라는 식으로 확고하게 결론짓고 심지어 그것을 당사자에게도 은근슬쩍 들리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감을 과시한다. 부당한 편견 자체도 문제지만, 그런 편견을 대놓고 드러내며 정신적 폭력으로 만들 때 한층 문제는 커진다. 그나마 작품의 성향이 코미디 요소가 강하고 주인공이 정말 차근차근 발전을 보이고 있기에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노력해도 차도가 보이지 않을 때 어떤 식으로 대할까.

편견의 극복에 관하여

“좋은” 쪽 편견이라고 해서 편견의 압박이 덜 한 것은 아니다. [안나라 수마나라](하일권)에는 입시생들의 생활을 다루는 학원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범생 캐릭터가 나온다. 그가 받아온 모범생이라는 주변의 편견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자신을 하나의 닦여진 길만 죽어라 달려가는 기계적 인생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작가는 두꺼운 목, 아예 소시지 같은 머리로 표현한다. 보통의 미형 캐릭터들이 돌아다니는 만화에서, 유독 모범생 캐릭터만은 정상적인 얼굴과 대비되는 기이한 형상의 소시지 머리로 생활하고 독자 말고는 아무도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모범생 편견의 스트레스 무게를 깨닫고 삶의 의미를 살짝 뒤돌아볼 때, 목에 들어간 빳빳함이 풀리며 비로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다른 방식의 삶도 있겠구나 하는 점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범생이라고 생각했던 여주인공이 다른 길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에서든, 내재화된 편견을 깨닫는 것이 극복을 위한 하나의 첫걸음이다.

각자 다양함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편견 극복의 기본이다. [어서오세요 301호에](와난)는 동성애를 다루되 과장된 야오이 애정극이 아닌 ‘퀴어’ 청춘만화다. 평범한 대학생 주인공이, 아는 형의 소개로 들어가 새로 룸메이트로 지내게 된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러 가지로 충돌하며 자신의 여러 편견을 깨는 과정이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 사이에 더욱 여러 성정체성들과 각자 그런 성향 때문에 겪어온 편견의 아픔이 있음을 하나씩 펼쳐보인다. 밝고 화기애애한 유머러스한 청춘물의 기반 위에, 각자의 내적 고민과 주변의 압박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 들어간다. 그리고 항상, 하나의 감격적 포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서로를 그냥 인정하는 것에서 편견의 극복은 진행된다.

그도 그럴 것이, 편견이라는 단순화 기제는 나와 남의 구분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나 혹은 나의 소속집단은 복합적 존재지만, 남은 단순하게 요약될 수 있다는 심리적 편향이 사람들에게는 존재한다. 이성적으로 보면 ‘나’보다는 ‘남들’이 훨씬 넓고 다양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런 타자화에 의한 편견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나’의 범위를 무한정 넓히는 사해동포주의를 취하거나, 아니면 그냥 남들도 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이구나 하고 시민적 이성의 잣대를 세우거나. 아마 둘 다 동시에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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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만화잡지 격월간 [싱크]. 이미지프레임 발간. 테마별 만화들을 소개하며 인문사회적 화두를 넌즈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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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과 이곳 첫 게재본에 실수로 좌뇌 우뇌를 거꾸로 썼는데, @taekie님이 발견해주셔서 냉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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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어림법이 항상 나쁜게 아닙니다. 휴리스틱 없으면 귀납적 결론을 못내지요.

    휴리스틱에 대한 연구는 무제한적 이성의 입장에서 얼치기 사고방식을 비판하고자 나온게 아니라 인간이 얼치기로 사고하고 생활하고 재판하고 법을 만들수밖에 없다는 걸 직시하자는거지요. 카네만 보다 기거렌처가 옳아요.

  2. !@#… -_-님 /예, 저도 항상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쓰고자 했는데(“유리한 점은 사실 명쾌하다”), 혹 열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쓰여진 부분 있으면 제 불찰입니다. // 카네만-츠버스키 vs 기거렌처 논쟁에서 확실하게 한쪽으로 판단내리기에는 제 사회심리학 지식 수준이 일천하지만, 말년(즉 현재)의 카네만은 직관의 효용에 대해서도 꽤 인정하게 되었더군요(기거렌처의 열띤 비판을 수용한 결과일지도?). // PS. 그나저나 추단법 발견법 어림법 도대체 어떤걸 휴리스틱의 가장 정통 번역어로 써야할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