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력과 놀이의 즐거움 – 올라 치꼬스 [기획회의 313호]

!@#… 탄력 아닌, 탈력.

 

탈력과 놀이의 즐거움 – [올라 치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00년대초, 다소 실험적인 만화, 만화에 관한 진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잡지매체가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계간만화]라는 잡지가 나온 적 있다. 취지 그대로 난이도 있는 특집글들, 대중성을 좀 접더라도 작가의 상상력을 최대한 살리는 단편 작품들 등이 주요 레퍼토리였다. 그런데 어느 호에서, 작가적 자의식이 넘쳐나서 부담이 될 지경인 작품들 사이에 괴상한 만화가 하나 끼어있었다. 내용으로만 보자면 주인공이 근육을 길러서 여자친구에게 어필하는 내용인데, 전개가 특이한 것은 물론 중간에 페이지를 들췄다가 내렸다가 하면 덤벨을 든 팔뚝이 움직이는 모습의 그림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작품 속 팔도 덤벨운동을 하지만, 독자도 팔운동이 돼서 함께 몸짱이 된다는, 이마를 치게 만드는(그리고 꽤 여러 번 그 페이지를 들추게 만드는) 그런 만화였다. 유화 붓으로 크게 슥슥 그려놓은 듯한 선으로, 마지막은 뭉크의 ‘절규’를 패러디한 감격하는 여자친구의 모습까지. 보자마자 떠올린 단어들은 ‘탈력’, 그리고 ‘놀이’였다. 힘과 근육을 논하지만 전체 과정은 어찌 그리 실 없고 나른한지, 그리고 만화의 표현 형식 자체를 가지고 놀아버리는 방식까지. 이 작가, 기억해둬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작품 성향상 장르만화지에서는 자리 잡기 힘들 것 같고, 당시 다소 카운터컬펴 취향에 빠져있던 인디만화 동인들 사이에서도 딱히 어울리지 않아 보였는데, 실제로 한 동안 다른 작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년 후, ‘씨네21’이 준비한 성인만화잡지 ‘팝툰’에서 비로소 그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올라 치꼬스](조훈 / 애니북스)는 그 작가, 조훈이 팝툰에서 장기간 연재한 단편들의 묶음이다. 원래 매 호 몇 페이지 안되는 분량이었다보니,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실은 분량 전체를 다 묶어서야 책 한 권이 되었다. [올라 치꼬스]는 통상적인 줄거리 소개로 다룰 수 있는 작품과 거리가 멀다. 혹은 어느 특정한 테마로 묶인 카툰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작가 특유의 탈력 넘치는(!) 만화적 상상력의 결과물들을 가득 바구니에 담아 넣었다는 정도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작품에 자신이 과연 적당한 독자인가 판단할 방법은, 사실 표지에 이미 있다. 먼저 귀여운 고양이가 보이는데, 약간만 아래를 보면 인간 마을에 거대한 롱다리 고양이가 활보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아, 이 작품 참 실없겠구나”라고 웃음을 터트리면, 그럭저럭 좋은 궁합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고양이 발 밑에 뭔가 얼룩이 있다. 그리고 책 뒷표지를 보면, 고양이 발이 확대되어 있고 그 밑에 사람이 깔려서 피범벅이 되어있다. 여기서 “아, 이 작품 잔인한 엽기 개그물이겠구나 재미있겠다” 하면 좀 더 나은 궁합이지만 이 작품의 재미의 반쯤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 이 작품 정말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실없구나”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궁합이다.

이 작품을 느슨하게 설명할 만한 키워드는 ‘탈력’과 ‘놀이’다. 우선 탈력의 정서는 크게, 실없음과 집착 없음으로 나타난다. 실없음은 대단히 사소한 궁금증이나 시시한 상상을 결국 구체적으로 이야기로 만들고 시각화하면서도 별다른 심오한 동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접근법에 있다. 고양이 코 아래에 달린, 수염이 나는 공 같은 부분을 뭐라고 부르는지 궁금해본 적 있는가. 축구공이 꿈을 가지고 살며 말을 하면 어떨까.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그런 시시한 상상일 뿐. 그리고 집착 없음은 그런 식의 내용을 펼쳐나감에 있어서 억지로 장르코드를 쑤셔 넣거나 기승전결을 부여해서 어떻게든 원하는 효과 – 웃음이든 교훈이든 – 를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의지를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병맛만화’라는 느슨한 장르명으로 히트를 친 여러 작품들과 길을 완전히 달리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형화에 가까운 결말 반전의 구조(속칭 ‘기승전병’), 즉각적 어필을 위한 대중적 소재나 당대의 장르코드 패러디 그런 것에 딱히 의존하는 구석이 [올라 치꼬스]에는 좀처럼 없다. 그냥 느슨하게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대충 진행되다가, 한 발짝 뒤에 상상력의 기발함에 반하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정직한 전개의 불 같은 직구도 급반전의 날카로운 변화구도 아니라, 헐렁하게 들어오는데 어디로 갈지 모르는 너클볼이다. 아니 가끔은, 야구공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어느새 스트라이크다.

다른 하나의 핵심정서는 ‘놀이’다. [올라 치꼬스]는 만화를 가지고 논다. 뫼비우스의 띠 만화는 실제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 붙여서 복수의 무한반복 고리를 이야기하고(사실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하지 않지만), 친절한 출판사는 진짜로 제작해볼 수 있도록 부록으로 다시 넣어주기도 했다. 칸 형식, 이야기 흐름의 앞뒤가 가끔 뒤섞이며 새로운 읽기를 만들어내는데, 모든 것은 예술적 실험정신의 숭고함보다는 탈력 가득한 유머 감각의 속에서 움직인다. 예를 들어 모음집 형식 측면과 시각적 놀이라는 접근에서 비슷한 구석이 있는 후루야 우사마루의 [파레포리]에서 가까이에서 볼 때와 멀리서 전체 형상을 볼 때 달라지는 그림들을 볼 때, 가장 먼저 오는 느낌은 미학적 기발함에 대한 경탄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우선 웃음부터 새어나온다. 개구리와 물고기들이 얼굴을 만들 때, 전체 형상의 감동보다 묘한 발레틱한 포즈로 폼 잡는 그들의 실없음에 먼저 초점이 가버리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또 어떤가. 눈코입 글자로 얼굴이 된다는 미학적 감동 이전에, 그 표정이 우선 웃기다.

탈력과 놀이라는 초점을 놓고 보면 [올라 치꼬스]에 없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 작품의 개그에는 우선 위악이 없다시피 하다. 과장된 찌질함, 폭력묘사를 통한 패러디 같은 것보다는 우스운 상상력을 시각적 이야기로 구현하는 그 자체가 핵심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엽기라고 할 만한 요소도 그다지 없다. 엽기는 묘사의 과격함 자체를 감상의 승부처로 내세우는 방식인데, 이 작품에서는 사자가 사람을 물어뜯어 피범벅이 되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묘사의 자극성보다는 그냥 실없는 농담 자체만 보이도록 유도한다. 덤덤하고 느슨한 필체로 지나가는 그림 때문일 수도, 그 상황을 더 강조하지 않고 그냥 한번 찍어주고 대충 다음 이야기로 지나가버리는 무심함 때문일 수도 있다. 남는 것은 힘주지 않아서 오히려 상상력만 더 강렬하게 남는 개그, 웃기기 승부가 아닌 만화 놀이 동참이라서 더 몰입하는 즐거움이다 (물론 작품에 나타난 결과로서 그렇다는 것이지, 작가는 창작의 고통에 많든 적든 시달렸겠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당연히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올라 치꼬스]의 유머에는 진입장벽이 있다. 흔히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난감하고 우스운 사연 중심 개그패턴을 선호한다면 이 작품은 그 정반대 지점에 있다. 찌질함에 대한 비웃음도, 절묘한 생활 속 공감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몸의 힘을 주욱 빼고, 실없는 상상력과 그것을 어떻게든 그림으로 그려내 버리는 솜씨에 미친듯이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것은 대대손손 물려줄 명작이다.

올라치꼬스
조훈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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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러브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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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본지 오래되었지만, 세탁기 에피소드 정말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