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성장, 이어지는 기억 – 화자 [책내서평]

!@#… 미디어다음에서 연재했고 단행본이 절찬리 판매중인 [화자] 단행본 하권에 수록된 책내서평.

 

소년의 성장, 이어지는 기억

김낙호(만화연구가)

마음에는 쏙 들었는데 무엇이라고 분류하기 어려울 때, 작품을 소개하고 싶은 이는 고민에 빠진다. 다소 구식이고 평범한 여성 이름을 그대로 쓴 제목만으로는 전혀 내용을 짐작할 수 없을, 바로 이 책이 그렇다. [화자]는 세 가지 이야기다. 연작집이나 단편선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사회파 스릴러 줄거리로 압축할 수도, 심령물로 왜곡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연애 성장물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란 말인가.

가장 먼저, [화자]는 소년의 성장 이야기다. 작품의 시작은 소년시절의 추억담 같다. 아직 소년들이 친구와 골목을 뛰어놀던 모습이 남아있던 시절인 1988년, 아홉 살 소년 두 명이 있다. 여느 동네가 그랬듯 적당히 촌스럽고, 동네에는 빈집이 하나쯤 있고 귀신이 있다는 괴소문이 돌며, 그곳에 가는 것은 두려움과 호기심의 모험이다. 그 집에 들어가게 된 리유와 재윤은 소문의 ‘귀신’을 보고 놀란다. 이후 여러 차례 돌아오며, 귀신소문의 진상인 사춘기에 막 들어선 느낌의 소녀 화자와 친구가 된다. 늘 아이들의 그림을 그리고 죽은 아이들이 보인다는 독특한 소녀와 두 사람의 추억이 쌓인다. 이것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 구조의 완숙한 구현으로, 낯설음과 아련한 동경의 대상과 만나며 점차 성장해 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낸다. 동경하던 대상과의 첫 만남과 이별의 과정이 있으며, 그리움에 관한 감성과 소년스러운 설레임을 보여준다. 사람들과 골목길을 바라보는 약간 바랜 듯한 색감과 적절한 명암은 향수의 분위기가 되며, 간략한 선은 순박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약간 특이한 추억담으로 끝나지 않고, 그 다음 이야기를 펼친다. 재개발로 이사를 떠난 두 친구 중 리유는 다른 곳에서 살며 그간 살았던 달동네의 기억이 희미해진다. 10년 후, 어느날 어린 시절 친구가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그 직후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돌아온 그 동네에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어릴적 기억 그대로의 화자가 있고, 동네의 모든 남자들이 관여된 커다란 비밀이 있음을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이제부터, [화자]는 다중의 무감각한 잔인함에 대한 이야기로 변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행동으로 균열을 만들어내는 저항과 변화의 내용이 펼쳐진다. 모두가 공범이기에 쉬쉬하는 것, 상대가 같은 인간이 아닌 이질적 존재라는 안도감에서 더 잔인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습이 있다. 그 공고한 반복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결국 리유 역시 다른 모든 공범들과 똑같아질 수 있는 조건들에 처하는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동화될 것인가. 감정의 과잉된 묘사 없이 차갑게 바라보는 사건의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같은 색감과 명암이 더 어두운 세상을 다시 비출 때, 일상 속에 꾸역꾸역 자리 잡은 폭력의 마음이 흘러나온다. 순박하던 간략한 선은 그대로 어둡고 긴장감 넘치는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 모든 과정 전체에 스며든 세 번째 이야기가 있다. [화자]는 기억에 남고자 하는 간절함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기억하는 세상, 그런 관심에서 슬쩍 비껴난 이들은 잊혀진다. 그렇게 망각에 묻혀있기에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하는, 심한 일을 당해 죽은 아이들의 원혼이 있다. 그런데 그들을 기억해주는 것은, 또 다른 심한 일을 당한 소녀 화자다. 그렇게 해서 죽은 아이들과 화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빈 집에서, 멈춰진 시간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화자만 기억해줄 뿐, 나머지 세상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기억의 낯설음은 구천을 떠도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화자의 그림(이 부분을 전담한 노을구름 작가의 순박함과 귀기가 공존하는 그림체의 공이 크다)에 탁월하게 드러난다.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몰래 그 집을 드나들었지만, 긴 세월동안 화자의 그림은 그저 기이한 그림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화자는 기이한 그림을 그리는 약간 모자란, 자라지 않고 누구에게도 저항하지 않는 이상한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 화자를, 리유가 기억해준다. 원래 소년이었던 자신을 기억하고, 그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자유로운 소녀를 기억하며 오늘의 화자를 대한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화자가 기억하는 아이들도 함께 기억이 이어진다. 바로 그런 이어지는 기억이야말로, 리유가 현재에 대한 음습한 보호에 집착하는 다른 동네 주민들의 광기어리고도 일상화되어버린 폐쇄적 집착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아이들, 화자, 리유의 기억이 온전히 이어지게 될 때 비로소 시간은 굴레와도 같은 정지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기억을 해주면서 비로소 존재를 확인받고 화해든 속죄든 동질감이든 이루어질 수 있다. 그저 기억의 희미해짐이든, 현재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적극적 은폐든, 쉬쉬하고 잊기에 바쁘면 이룰 수 없는 무엇이다.

기억은 그곳에서조차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 화자, 리유, 그들의 이야기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해주는 작품 속의 소설가가 있다. 그가 남긴 글을 통해 모두의 기억은 이어질 것이기에, 다시 10년 뒤에 올 좀 더 희망찬 엔딩을 꿈꿀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끝이 아니라, 그 이상의 누군가가 있다. 바로 작품 바깥의 여러분, 독자들이다. 여러분이 기억해주는 만큼씩, 누군가는 성장하고 집합적 폭력은 경계되며 간절한 이들이 존재를 확인받게 된다. 이어지는 기억 속에서, 소년 소녀는 성장하고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굴러간다. 책 속의 화자와 아이들도, 책 바깥의 더욱 많은 또 다른 화자들과 아이들도 말이다.

화자 – 상
홍작가 글.그림/미들하우스
화자 – 하
홍작가 글.그림/미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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