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법관 실명 공개로 유신의 개그성을 생각하다

!@#… 최근 공개된, 인혁당 법관 실명 공개를 둘러싼 논쟁. 덤으로 과거사위에서 긴급조치 관련 판사 명단까지 공개. 뭐 공개 전까지 논쟁이었지, 사실 공개가 되자마자 논쟁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많이들 버로우했지만. 음… 하지만 이런 것이 논쟁이 붙는 것이 용납되는 사회분위기 자체가 capcold로서는 이해 불능. 기자가 자기 이름 내걸고 쓰는 것 당연하고, 국회의원이 자기 이름과 당적 내걸고 법안 표결하는 것 당연하고, 장관이 자기 이름 걸고 정책 추진하는게 당연하다. ‘공공’의 일을 ‘공식적으로’ 하겠다면, 당연히 이름을 걸고 해야 한다. 이름을 걸고 해야 책임을 지니까. 사회심리학의 꽤 고전적인 실험이 있지 않던가. 길거리에서 “도와줘요!”하니까 아무도 안 도와주는데, “거기 붉은 스웨터에 청바지 입고 안경낀 분, 도와줘요!” 하니까 꽤 도와주더라는. 공공적인 일을 공식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권리를 위임받는 것이고, 그 권리에는 딱 그만큼의 책임이 따라주어야 균형이 맞다. 초등학교에서도 배울 내용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기초중의 기초가, ‘누가‘ 그 결정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법정, 의정, 행정 기록은 사후 참조를 위해서 당연히 전부 공공 도메인으로 공개되어야 하고, 특히 어떤 시각 어떤 입장에서 판결이 내려졌는지를 알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필수적인 것이 바로 ‘누가’ 라는 측면이다. 판결을 내린 것, 그 사람들을 억울하게 옥살이시킨 것은 “암울한 시대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 암울한 시대에 법관으로서 일조하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지. 인터넷은 실명제하자니 어쩌니 잘만 오버질하시는 어르신들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거사의 법관 실명 공개는 머뭇머뭇하고 있다니 참 당혹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모기불님의 이야기처럼, 당시의 검사들도 같이 목록화해서 올려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라고. 솔직히 그 때 돌아다니며 프락치질을 하고 다니던 안기부(국정원) 직원들 명단도 덤으로 다 공개하면 좋겠다.

!@#… 그보다, 인혁당 사건이나 긴급조치 관련 법관 실명들이 지금까지 공개되어있지 않았나 보구나. 아니, 그런데 공공의 법정 기록이 비밀에 붙여졌을 정도로 이 나라의 사법시스템이 야매란 말인가? 설마.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주욱 정리해서 목록화한 것이 없었던 것이었겠지. 분명히 할 만한 작업이고, 필요한 작업이다. 비전문가들이 법정문서 주루룩 찾아보기가 좀 힘들게 되어있나. 그렇다면 문제는 모 분들이 항상 부르짖는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인데, 뭐 언제라도 똑같이 나올 이야기니 별로 생각해볼 가치도 없고. “특정세력 죽이기용 정치공세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신의 아들딸들을 거꾸러트리기 위한 정치공세 맞다, 당신들 참 똑똑하다 라고 대답하면 대략 오케이. 그보다 좀 더 합리적인 비판은 “실명을 공개하면 그 개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서 유신 체제 전체에 대한 고찰이 옅어진다”는 것인데, 다행히도(?) 연루된 법관들이 조낸 많기 때문에 유신체제 전체의 사악한 야매성과 그것을 하나도 극복하지 않은 현재의 한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즉, 역시 핵심은 한국사회가 유신체제를 극복한 적이 없다는 것. 오로지 통치효율성에 올인하여 모든 사회적 다양성을 말살하고, 대신에 경제적 풍요를 수치로 보여주며 (실제로 더 나아진 삶이 아니라, 더 잘 살고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움직이는 극단적인 사회체제. 세계적으로 욕먹는 북쪽의 모 국가의 수법과 워낙 똑같은, 그런 식으로 움직였던 역사 자체가 쪽팔려 쓰러질 체제 말이다. 물론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겉으로 민주화는 되었지만, 민주주의라는 정치사회적 가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경제적 지향도 분간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던가. 그 사람들도 ‘민주주의적’ 투표권을 하나씩 모두 가지고 있고.

!@#… 도대체 어떻게 하면 유신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억압적 행태’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심지어 부당한 고문당해서 고생한 이야기에도 리플로 박정희는 영웅이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다는 리플들이 달릴 정도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는 유신 시절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마치 도시의 바쁜 일상에 찌든 사회인들이 고향의 편안함을 그리워 하듯이, 또는 소년소녀시절의 단순명쾌함을 동경하듯이. 즉 획득가능해 보이는 목표가 있고(돈) 뚜렷한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지니며(국가) 확실하게 미워할 적(북괴)이 있는 편안한 유신 세상에 대한 향수인 것이다. 이러한 완성된 안정적 자아에 대고 사실 유신정권은 비열했다느니 경제성장 역시 실제 정권의 힘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의 힘이었다느니 사실을 아무리 이야기한들 전혀 소용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을 위협한다고 방어 모드로 돌입할 뿐.

!@#… 따라서 진짜로 뿌리부터 유신을 극복하고 싶다면, 박정희 정부의 체제나 개발독재에 대한 비판이라는 정도의 선은 가뿐히 넘어서야 한다. 그 속에 살아가던 평범한 ‘민초’들의 일상, 생활, 믿음의 우매함을 총체적으로 비웃어줘야 한다. 독재정권이니 미국이니 거대한 적, 외부의 적을 만들어 싸우는 것에만 익숙한 자세로는 힘들다. 스스로 자신 속에 있는 우매함에 메스를 들이대는 10배 아프고 위험하고 불편한 짓을 해야한다는 말인데, 너무 아프기 때문에 유머로, 희화화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사람들은 그저 속고 살았다는 식의 민중에 대한 무한한 애정따위 필요없다. 스스로 자신들의 자유를 헌납하고, 되지도 않을 경제 개발 이야기에 동의하고, 자신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성과도 국가와 각하에게 돌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우매함을 희화화해야 한다. 유신의 피해자이자 적극적 공범역할을 한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생태가 코미디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 개그만화의 소재, 개그콘서트의 소재가 되어주어야 한다. 있지도 않았던 아름다운 향수에 빠져 사는 것이 얼마나 골때리는 일인지 쉬지 않고 웃음거리, 조롱거리로 만들어줘서 스스로 겸연쩍어 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다. 웃음이 세상을 구원할지니. 사람들을 스스로에게 쪽팔리게 만들어 줌으로써.

!@#… 그런 의미에서, 법관 실명 공개 덕분에 다시 조명을 받게 된 당시 사건기록들은 쓸만한 코미디 소재로 이어질 요소가 많아서 좋다. 당시 법정을 무대로 하는 시트콤이나 개그만화는 어떨까.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끌려오고도 죄 지은 것 맞는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어리둥절해 하는 피의자들, 맹목적이 되어 거품을 물로 기소하는 검사들, 법의 잣대대로 할 뿐이라며 스스로 나름의 정의감에 도취된 판사들, 그저 혀나 끌끌 차면서 끌려갈만한 짓을 했으니 끌려갔겠거니 하는 피의자 동네의 이웃들. 사태가 긴박해지고 진지해질만 하면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새마을노래. 혹은 상황이 꼬이면 꼭 등장하는 궁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대통령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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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인혁당 법관 실명 공개로 유신의 개그성을 생각하다

Comments


  1. 마지막 부분에서 ‘원피스’ 생각 났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거죠.

    그러고 보면 바보가 열심히 하면 정말 안습이군요

  2. 서두에 쓰신 사회심리학 실험 재밌는데요?

    정확한 출처를 알려주실수 있을까요?

  3. 멋진 발상입니다. 한번 유신이나 박정희도 개그거리가 되야죠. 그런데 그런 개그를 했다가는 길가다 칼맞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박정희 골초 숭배자 분들이 워낙 많아서…

  4. !@#… CJ님/ 사회심리학 시간에 필기해놨던 노트가, 지구 반대편에 있습니다-_-; Moriarty(1975)의 개인 책임 부여 실험과 연결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기억력이;;; 하지만 이 “방관자 효과”를 설명하는 책임 분산 이론에 관련된 가장 기초가 되는 (그리고 훨씬 더 과격한) 실험으로는 Latane & Darley(1968)의 발작 실험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