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연애에 관하여 [학교도서관저널 1209]

!@#… 지난호, 가을의 포문을 염장으로 열었다.

 

은근한 연애에 관하여

김낙호(만화연구가)

연애를 다루는 작품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상상하게 되는 것은 TV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트렌디드라마들의 격렬함이다. 결국 사귀게 되는 두 주인공을 엮어내는 기발한 사건들, 격렬한 감정들의 충돌, 그렁그렁한 눈물 가득한 눈망울 위로 흐르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과잉인 고음의 주제가 뭐 그런 것들부터 말이다. 연애는 뜨겁고 달달한 애정으로 가득하고, 가슴이 막 터질 것 같은 아픔과 설레임으로 넘치며, 수많은 난관 속에서 더욱 결의가 다져진다. 연애는 한바탕 폭풍이다. 세상에 그런 종류의 연애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연애를 극적 소재로 삼을 때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 그런 방식이기는 하다. 작품 전개의 극적 롤러코스터를 위해, 연애를 롤러코스터 태우는 셈이다.

그보다 좀 더 심심하기는 하지만, 그윽한 여운이 우러나오는 방식으로 연애를 다루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은근한” 연애 말이다. 당사자들의 고백다운 고백 없이도 연애가 진행될 수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이 주인공들이 과연 사귀는 것 맞나, 혹은 사귀고 싶기는 하는가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서서히 조금씩만 연애감정이 노출된다. 격렬한 연애물의 등장인물들이 종종 독자들에게는 격렬함을 보여주고 서로에게는 연애감정을 숨김으로서 생기는 격차로 재미와 몰입감을 만들어낸다면, 은근한 연애물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정작 독자들에게도 서로에게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에게도 연애감정을 숨긴다. 그런 갑갑함이 어떤 면에서 더욱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그들의 뭔가 움직여주기를 바라고 속마음을 궁금하게 만든다.

다만 은근한 연애물은 자칫하면 재미가 없어지기 쉽다. 마치 고추장이 덜 들어간 떡볶이 같이, 격렬한 감정적 충돌이 겉으로 마구 드러나지 않을 때 심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덜 매워서 심심한듯 했더니 사실은 좋은 떡에 담겨 있는 구수한 쫄깃함이 더욱 강력하게 느껴지는 명품 떡볶이같은 작품들을 발견할 때 그만큼 더 즐거워진다.

긴 호흡의 인생

연애의 은근한 측면을 가장 확실하게 강조할 수 있는 방식은 긴 호흡의 인생을 담는 것이다. 1주일 동안의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서 꾸준히 조금씩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었는데 어느덧 돌아보니 마음이 있었고 그리움도 있었고 지금 결국 강렬하게 사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정들어 있는 친구가 되어있을까 하는 방식이다. [초속 5000킬로미터](마누엘레 피오르 / 미메시스)는 사람들이 성장하고 일을 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국가와 지역을 널리 누비게 된 오늘날의 유럽을 무대로 하고 있다. 두 친구 피에로와 니콜라, 그리고 갖 이사를 온 소녀 루치아는 이태리의 전원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른이 되어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데, 노르웨이에 일자리를 얻은 이도, 이집트에서 고고학을 하는 이도, 그냥 그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 자리를 잡은 이도 있다.

교통과 통신은 발달했는데 반면 경기상황은 어디나 풍요로운 황금기와는 거리가 멀기에, 청년들은 자신들이 자라난 환경이 아니라 낯선 각지로 기회를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이 되었다. 그 안에서 함께 했던 인연과 마음은 잊혀지고, 기억되고, 흩어졌다가 다시 뭉친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공간 각자의 삶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연애의 감정이었던 예전의 기억들을 되새김질한다. 이집트와 노르웨이 사이에서 전화를 할 때 소리는 1초 만에 이동한다. 하지만 삶의 공간은 5000킬로미터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연애 감정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금방이지만, 이미 많이 흘러가고 지금은 각자의 삶이 있다. 그것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연애의 성공/실패 여부에 환호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들을 담고 또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에 섬세한 여운을 남긴다. 수채화 기법을 통해 흐릿하고 따스한 연애감정 가득했던 과거, 어딘지 차가운 현재의 모습, 각자의 공간에 따른 색감 등을 절묘하게 담아내는 시각적 쾌감 또한 이런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

혹은 가지를 소재로 삼은 연작 단편모음집 [가지](쿠로다 이오우 / 세미콜론)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중 하나인 가지 키우는 중년 농부의 이야기는 어떨까. 아마도 글을 쓰던 사람인데 귀농한 듯 하다. 그에게는 젊은 날의 여러 사연이 있는 듯한 어떤 성공한 여성 사업가가 가끔 들른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마다, 이곳에 오면 푹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일어날 때 즈음, 자기가 키우는 가지로 요리를 해준다. 작품집은 여러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장르도 주인공도 전혀 다른 작품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늘 곤란한 일들은 있어도 결국 일상은 여차저차 계속되니까 일희일비하지 말고 느긋하게 지내자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별 것 없는 일상적 삶으로서 중년남의 가지 키우고 책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 와서 한 잠 청하고 가는 것이 또 다른 일상인 사업가 여성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친근함과 애정 사이 오랜 시간 줄다리기하다가, 결국 오랜 시간 뒤 둘 다 중년이 된 상태에서 온전한 연애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깊이 아는 깊은 정서적 유대가 생겨버린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다. 긴 호흡의 인생 속에서, 탱탱한 열매보다는 넓고 깊게 자라난 뿌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은근하게 밀고 당기기

앞의 사례들이 연애의 감정을 은근하게 삭혀낸 방식이라면, 연애의 과정 또한 은근하게 만들어서 재미를 줄 수 있다. 연애의 과정은 연심을 품은 상대와 거리를 좁히는 것과 다시 멀리 벌어지는 것 사이에서의 긴장감, 흔히 ‘밀당(밀고 당기기)’이라고 부르는 것의 연속이다. 격렬한 감정과 화려한 사건이 아니고서도 은근한 방식으로 재미 넘치는 밀당을 만들어내서 더욱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집요한 디테일을 들 수 있다. [어쿠스틱 라이프](난다 / 애니북스)는 게임제작 종사자 남편과 만화가 부인의 자전적 생활만화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연애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당기기가 계속 되는 이상 연애는 진행형인 것이나 다름없다. 서로를 계속 재발견하고, 관계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신경전을 하고, 그 모든 것이 그래도 서로에 대한 연심을 가지고 이루어지면 그냥 연애다. 이 작품의 경우 게임 오타쿠 기질이 있는 남편의 행동패턴에 대한 집요한 관찰, 두 사람의 협상하는 부부생활에 대한 미화하지 않은(하지만 유머화한) 묘사, 그 안에서 조금씩 얻는 통찰들을 무거운 훈계나 닭살 돋는 치장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관찰 발견처럼 던지는 솜씨 등으로 훌륭하게 디테일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죽네 사네 하는 격렬한 연애가 아니라, 생일선물을 올해도 쿠폰으로 때워도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은근한 연애의 뛰어난 재미가 만들어진다.

다른 요소로는 바로 섬세한 단서들이 있다. 은근한 연애라는 소재라면 빠질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아다치 미츠루인데,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연애의 흐름이 섬세미묘하게 흘러가는 것이 바로 야구만화 [H2](아다치 미츠루 / 대원CI)다. 두 남자 주인공 히로와 히데오는 각각 천재적인 투수와 타자인데, 원래 중학교에서 콤비였으나 일련의 사정으로 다른 고등학교에서 맞수가 된다. 히로는 남매처럼 자라난 소꿉친구 히카리를 수년 전 히데오에게 소개팅시켜줘서 그 둘이 사귀고 있고, 현재 다니는 고등학교 야구부의 매니저 하루카가 히로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히로는 뒤늦게 자신이 히카리에 대한 연심이 있었음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도, 동시에 히데오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멋진 친구임을 알고 늘 진심인 하루카도 눈에 들어온다. 히카리 역시 늘 꼬마 같았던 히로를 지금은 의식하면서도, 히데오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히데오 역시 그런 미묘한 연심의 기류를 모르고 있지 않으면서도 우정과 사랑 둘 다 놓을 생각이 없다. 이런 마음의 흐름이 사랑의 눈물과 따귀 때리기 같은 것으로 전개되지 않고, 그저 함께 친하게 농담 던지며 지내는 일상 속의 작은 손길과 눈빛들로 제시된다. 그리고 연애가 캐릭터 관계의 중심이지만 야구 승부는 또 야구대로 열혈만화에 버금갈 정도로 긴박감 넘치게 전개된다. 그리고 결국 야구 속에서 주인공들의 마음이 표현되고 엇갈리고 풀려나간다.

사실 겉으로만 보고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갑갑한 상황이 넘쳐난다는 측면에서, 은근한 연애물의 모습들은 현실세계의 연애에서 매우 자주 접하는 일이다. 특이한 사건으로서의 오락성은 손해를 보더라도, 일정 정도의 리얼리즘과 나아가 인간사에 대한 좀 더 깊숙하게 생각해볼만한 화두를 던져주는 장르인 셈이다. 실제 연애를 하면서 작품을 통해 반추해보는 것이든 아니면 실제 연애 없이 그저 작품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든 간에, 가끔은 롤러코스터 연애물 말고 은근한 연애물도 즐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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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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