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필수요소는 디테일 – 미생 [기획회의 328호]

!@#… 막판 신기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올해 신작 가운데 베스트.

 

공감의 필수요소는 디테일 – [미생]

김낙호(만화연구가)

어떤 전문소재를 다루는 작품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 위한 대표적 기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감이다. 그런데 흔히 착각하기 쉬운데, 공감을 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멋진 캐릭터나 드라마틱한 재미, 탁월한 연출력 같은 쪽이 아니다(물론 경우에 따라서 적지 않은 도움은 되겠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바로 세계의 디테일이다. 특히 현실세계를 무대로 한다면, 세부적 디테일이 얼마만큼 위화감 없이 잘 들어가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독자들 앞에서 자료 조사를 뽐내듯 휘황찬란한 용어들이 난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라면 꼭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이런 식의 반응을 한다는 것에 가깝다. 이야기 예술로 풀어나갈 때 가장 재미있는 방식의 사람들과 행동양식이 아니라, 그 소재분야에서 정말 있음직한 것들 말이다. 병원 장면을 다루는 작품에서 정의롭고 다정한 열혈의사가 나오는 것은 극적 전개를 위한 필요성일 수 있지만, 공감의 기반을 닦는 것은 빠르고 확실한 결정과 효율적 일처리를 선호하며 환자와 늘 일정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행동거지에 박혀있는 ‘의사스러운 의사’들의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창작자의 고난이 시작된다. 더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사는 작품을 만들고자 할수록, 디테일이 어긋날 때 그것을 눈치 채고 불편해할 이들이 늘어난다. 디테일을 충분히 넣기 위해서 필요한 집요한 취재도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세부 지식 나열에 매몰되어 이야기로서의 재미나 보편적 메시지를 넣을 여력이 없어진다면 처음부터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컨셉트가 아니었다면 작품으로서 무의미해진다. 이런 경우 몇 가지 선택의 기로가 있다. 하나는 소재가 만들어내는 특수한 재미는 사실상 무시하고, 단순히 원형적이고 피상적인 연애드라마 같은 것을 풀어내는 식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지는 못해도, 반드시 나쁜 선택인 것만은 아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수많은 ‘일상물’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어쨌든 자기가 매일 겪는 생활에 대해서는 세부적 디테일을 그럭저럭 잘 알기 때문에 취재의 문제는 덜하다. 다만 이 경우 문제는, 작가 본인의 생활이 정상적으로 평범하다면 소재 고갈이 무척 빠르게 온다는 점이다(특히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와 패러디 개그가 늘어나기 시작하면 위험신호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이 하나 있다. 바로 소재를 집요하게 취재하고, 이야기를 깊숙하고 철저하게 구상하고, 매 회마다 치열하게 그 결과물을 보란 듯이 풀어내는 것이다.

[미생](윤태호 / 애니북스 / 2권 발매중)은 화이트칼라 샐러리맨의 생활이라는 전문소재를 다루는 만화다. 오늘날의 관료화된 기업 환경에서는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거나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분야이며, 덕분에 이 소재로는 좋은 작품으로 완성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일본의 [시마 과장]처럼 대형 히트를 친 경우도 있지만, 소재 말고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을 추구하기보다는 승승장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현실도피성 쾌감을 줄 뿐이다. 하지만 [미생]은 출세의 신화가 아닌,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디테일을 통해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숙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성공한다. 성공담을 통한 현실도피나 풍자를 통한 웃음의 쾌감이 아니라, 생생하게 있음직한 삶들을 보여주고 그 안에 아주 살짝 희망의 메시지들을 담아냄으로서 공감하는 독자들의 현실에 응원을 보낸다.

그러다보니 줄거리로서의 이야기는 요약해서 설명하려면 심심하다. 어릴 적 바둑 프로기사를 꿈꾸고 기원에 들어간 청년 장그래가 성인이 되어서도 입단에 실패하여 재능의 한계에 부딪히고는, 화이트칼라 샐러리맨으로 진로를 바꾼다. 바둑이라는 폐쇄적 전문세계에 살고 있던 그가, 종합상사에 친지 인맥으로 인턴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채용을 향한 경쟁, 회사라는 환경에서 보고 배우는 여러 생활 방식들, 사람들의 모습들을 백지 상태에서 차분하게 흡수한다. 자신의 유일한 장기였던 바둑이라는 틀을 통해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사를 이해하고자 정리해 나아간다.

바둑의 기보를 세상사에 대한 해석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그리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강철수의 [바둑스토리] 같은 만화가 이미 그 방향의 명작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따지고 보면 천문을 모델로 했다는 설을 따르든 왕이 자식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을 따르든 바둑의 유래 자체가 세상의 이치를 반상 위에 표현하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사회의 샐러리맨들이 겪는 지극히 구체적인 상황들, 동기들 사이의 경쟁, 상급자와의 마찰, 부서간 알력, 과로로 얼룩진 일터와 가정의 경계, 사무와 현장의 거리감 등을 뛰어난 디테일로 풀어내면서 각 회의 전개 내역을 실제 바둑 대국 – 제1회 응창기배 결승전 제 5국이라고 한다 – 의 한 수 한 수에 순서대로 비유하는 구성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편적으로 하나의 순간을 비유하기 위해서 특정한 일화와 개별적인 바둑 수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 풍부하여 널리 공감할 수 있는 샐러리맨 생활의 유연한 흐름을 온전한 하나의 대국에 비유하며 담아내는 것이다. 즉 절묘한 비유 하나가 아니라, 그냥 온전한 삶의 과정을 한 순간 한 순간씩 연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바둑 기보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샐러리맨의 삶에 대한 폭넓은 공감을 위해 얼마나 집요한 디테일을 넣었는지는 작품을 읽어보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인턴에서 정식 채용으로 올라서기 위해서 조별, 개인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신경쓸 요소들과 마찰, 큰 회사 조직에서 직급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여성이 겪는 일과 육아 이중부담의 굴레, 사람 좋은 것이 오히려 자신과 가족들에게 독이 되는 전혀 신사적이지 못한 회사 사이 갑을 관계의 굴레 등이 어설픈 과장의 악화나 미화 없이 던져진다. 냉엄한 관찰자 격인 장그래조차, 결국은 사회경험 없고 지식이 부족한데 어떻게든 빨리 익혀서 살아남아야하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상황과 캐릭터들에게 이 정도의 디테일이 가득하면, 드라마는 저절로 생겨난다. 우리 삶이 사실 그렇지 않던가 – 디테일 가득하고 드라마 넘치는 것 말이다. 다만 자신의 삶이다 보니 사느라고 바빠서 잘 느끼지 못할 뿐. [미생]은 바로 그것을 효과적으로 슬쩍 알려주고 더불어 응원까지 해주는 소중한 작품이다.

덧붙여, 이번 단행본은 처음부터 종이만화책을 염두에 두고는 웹 연재에서 오히려 칸을 쪼개서 배치한 것이 역력한, 밀도 있는 칸 배치가 장점이다. 나아가 비록 웹 연재에서도 바둑을 볼 줄 아는 무명의 독자들이 덧글로 설명하고 있지만, 단행본에서는 좀 더 일관되게 이야기와 접점을 맺어주는 전문 기자의 해설을 매회 시작마다 수록했다.

미생 1
윤태호 글 그림, 박치문 해설/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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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엄브렐라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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