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에 관한 만화들 [학교도서관저널 1211]

!@#… 바보같은 상황들 말고, 사람을 규정하는 방식으로서의 ‘바보’.

 

바보에 관한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바보와 만화를 함께 거론하면 아무래도 과거 많은 이들이 (그리고 지금도 그런 과거의 저급한 수준에 고착되어 있는 일부 사람들) 흔히 만화 자체를 바보스러운 것 취급하곤 했던 편견이 떠오른다. 그런 식의 좁은 식견을 펼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보같다고 반론하고픈 마음은 뒤로 하고, 그렇다면 한번쯤은 도대체 그 바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가장 단순한 뜻으로 보자면 바보는 지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을 칭한다. 그런데 그 지적 능력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지칭하는 속성이 천차만별이 된다. 그렇기에 IQ검사 점수가 낮아도 바보고, 사랑을 해도 바보고, 일평생 끈질기게 정치적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적 박애정신을 실천한 추기경도 ‘바보’다. 코미디 배우는 위대한 바보고, 어떤 기업의 전 회장이 인용해서 널리 격언이 되어버린 문구에도 “계속 바보스러우시길”이라는 내용이 들어간다. 이쯤 되면 바보는 열등함을 나타내기 위한 욕으로 쓰이는 만큼이나, 우리가 ‘지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반문하기 위한 비교지점으로 쓰이는 셈이다.

바보의 유머

지적 정상성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꼬집는 가장 간편하고 경쾌한 방식은, 바보를 유머 코드로 쓰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양날의 칼이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정상적 반응과 완전히 달라서 의외성의 웃음을 주는 바보 코드는 쓰이는 방식에 따라서 정상성에 대한 우월감과 거기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한 모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섬세하게 잘 구현된 바보일수록, 오히려 바보짓에서 오는 웃음과 그 안에 숨겨진 의외의 현명함을 잡아낸다.

후자를 원형적인 방식에 가깝게 이런 것을 구현한 것은 80년대까지만해도 소년독자 대상 만화의 큰 주류 중 하나였던 명랑만화 장르고, 그 대표적 명작으로 [꺼벙이](길창덕)가 있다. 주인공인 꺼벙이는 머리에 땜통도 있고 눈꼬리도 늘 반쯤 감겨 쳐져있는 실로 꺼벙한 표정의 어린이다. 이 작품은 꺼벙이가 부모님, 여동생, 동네 골목놀이 친구들과 함께 벌이는 일상의 소소한 소동들로 이루어지는데, 심부름이든 기타 흔한 일상적 일을 꺼벙이가 잘못 처리해서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수습되는 시트콤 전개방식을 따른다. 그런데 작품을 계속 읽다보면 꺼벙이는 진짜 바보인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어린이다운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짧은 주의력, (잘 모르기 때문에) 기성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판단, 아이스크림이든 눈깔사탕이든 순간의 소소한 감각적 욕구에 대한 충실, 그리고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기본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선의가 깔려있는 패턴 등이다. 공부에 집중하는 ‘정상인’ 기준으로는 꺼벙하지만, 사실은 원래 가장 자연스러운 어린이이기 때문에 한 세대를 휘어잡은 인기를 누렸다.

반면 오늘날의 동시대적 바보 코드는 좀 더 영악해진 측면이 있다(물론 그런 것이 어떤 의미로든 더 나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인기 개그만화 [마음의 소리](조석)의 주인공은 의식적으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조석이다. 그리고 실제 자기 주변인들을 모델로 한 다른 캐릭터들과 일상의 에피소드를 겪거나 말장난에 기반한 가상의 상황들로 개그를 풀어낸다. 등장인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각자의 욕심에 충실한데, 주로 말이 잘못 전달되어 발생하는 분란이라든지 서로의 과잉된 자의식에 대한 찬물 끼얹기 같은 공격적 개그가 주를 이룬다. 여기서 바보짓이란 한쪽으로는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오해에 그냥 휘말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는 자신들의 자의식 과잉 때문이든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서든 정상적인 해결보다는 너무 훤하게 속보이는 꼼수를 시도하는 애처로움이다. 그렇다보니 그 만화에서만큼 아마도 극단적이지는 않겠지만, 독자들이 웃다가 속으로 뜨끔하는 부분이 생길 때가 있는 것이다.

바보코드로 정상성을 돌아보기라는 방향을 좀 더 파보면 나오는 것이 풍자다. 풍자 유머를 위해서는 꼭 장르로서의 시사만평이어야할 필요도 없다. 이상한 감각의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만화적 과장으로 가득한 열혈 사원들의 샐러리맨 활극 개그만화인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몰락인생), 압도적 폭력성을 지닌 죄수들이 형량 감경을 위해 신분을 숨기고 일반 회사에서 회사원 실습을 해야한다는 [와일드와일드 워커스](김진태) 등이 그렇다. [질풍기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들의 행동에 있어서 브레이크가 없다. 그런데 다만 몰두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하나를 시작하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가장 기본적인 상식 비슷한 것조차 가볍게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바보들이다. [워커스]의 주인공들은 회사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생활관습들을 모르고 부적응하기에 바보들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결국 그런 바보스러운 모습들을 통해 정작 실제 이뤄지고 있는 한국 샐러리맨 사회의 이상한 모습들을 가득 풍자해낸다.

순수함에 대한 갈망

비교기준으로서의 바보라는 속성을 작품 전반에 흩뿌리기보다는 평범한 사회 안에 있는 바보 등장인물, 예를 들어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곤 하는 ‘동네 바보’에 집중하면 메시지가 훨씬 노골적으로 집중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작품 안에서 곧바로 대비효과를 보여주기에, 독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도 바보를 통해서 사회가 잃은 – 정확히는 원래 한 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잃은 것이라고 믿고 싶은 – 어떤 순수함에 대한 회귀를 꿈꾸게 된다.

제목부터 노골적인 [바보](강풀)가 바로 그런 점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작품 중 하나다. 여기에서는 어릴 적 사고로 뇌를 다친 주인공 승룡이가 동네 바보 주인공이다. 그는 토스트 가판대를 운영하고, 똑똑한 고등학생 여동생과 함께 산다. 그리고 그 동네에 사는 각기 다른 사연의 많은 이들이 승룡이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스치며, 자신들이 살아온 나름대로 열심히 산 것 같지만 이상하게 원하는대로 된 것이 없는 삶의 분기점들을 다시 되짚게 된다. 마냥 착하고, 어떤 이야기든 경청해주고, 복잡하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그를 보며 스스로 다시금 기준을 성찰하는 것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HUN)은 다소 다른 의미에서 동네 바보를 다룬다. 여기서 동네 바보 주인공은 사실은 북한의 엘리트 특수공작원인데, 방동구라는 가명을 달고 달동네 바보 백수로 위장하며 살고 있다. 남한 사회 최하계층의 생활과 여론을 보고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이다. 동네에 오래 살았던 고정간첩, 인기 없는 인디밴드 지망생으로 숨어 지내는 다른 전투요원 등 다른 재미있는 캐릭터들과의 일화도 재미있지만, 역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동네 바보와 동네 사람들의 상호 관계맺음이다. 동네바보라고 놀리는 와중에서도, 그는 아이들에게는 놀아줄 형, 슈퍼 할머니에게는 둘째 아들 같은 존재, 옆집 남매에게는 든든한 동네의 일상 같은 존재다. 주인공의 의지와 관계 없이, 그가 연기하는 바보가 동네를 동네답게 연결해주는 구심점이다. 작품이 남북한 문화충돌 개그로 시작하다가, 점차 슬그머니 우리 현실 속에 필요한 순수함으로 따뜻한 시선을 키우는 전개가 자연스럽다(다만 소재 속성상, 결국 비극적 첩보극으로 갈 만한 복선이 계속 깔리지만).

물론 바보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항상 큰 깨우침을 위한 것일 필요는 없고, 그저 여러 방식으로 한번쯤 살짝 건드려보는 것으로 족할 수도 있다. 이왕이면 바보스럽다고 경시당해온 만화들로 그런 것을 파본다면 더욱 통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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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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