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이 칠면조다 [한겨레 칼럼/121014]

!@#… 게재본에는 마지막 문장이 “검사가 이해 못하는, 가끔 농담도 할 자유”로 교열되어 나갔다. “‘검사가 이해 못하는 농담’을 할 자유”를 의도했지만, “농담의 자유를 검사가 이해 못한다” 쪽으로 읽혔나보다(…)

 

박정근이 칠면조다

김낙호(미디어연구가)

한 노인이 몸보신하고자 칠면조를 키웠는데, 누군가가 훔쳐갔다. 아들들이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칠면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둑맞았다는 사실이다. 칠면조를 찾아라.” 아들들은 이 말을 경시하고 금방 잊어버렸다. 그런데 다음에는 낙타가 없어졌다. 아들들이 어떻게 할지 묻자 노인은 “칠면조를 찾아라”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 말이 없어졌고, 또 노인은 “칠면조를 찾아라”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가족이 강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인이 한탄했다. “칠면조 때문이다. 칠면조를 빼앗아가도 괜찮다고 그놈들이 알게 되었기에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이다.”

평소 애독하는 블로거 소넷님을 통해 알게 된 프리드먼의 책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에 소개된 우화로,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사소한 취약점이 점층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는 내용이다. 동시에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발점이 되는 “작은” 문제부터 확실하게 막아내야 한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북한을 조롱하는 농담의 일환으로 북측 트위터 계정의 메시지를 재전송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싸이보다 먼저 월드스타가 된 박정근씨에 대해, 검찰이 최근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사건 자체만 놓고 보자면, 시대착오적 공권력이 사소한 트집을 잡은 작은 촌극이다. 이 사건 하나로 한국사회에 독재가 시작된 것도 아니며, 대외신인도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아마도). 하지만 이 작은 사건은, 여러 커다란 문제요소들이 겹쳐있는 하나의 징후이자 더 커질 수도 있는 씨앗이다.

슬쩍 살펴봐도, 먼저 국가보안법의 건재함이 보인다. 이 법의 매력적 이름과 난감한 내용물은 익히 알려진 바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해놓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다. 단계적 무력화를 배제하고 정면충돌에 몰입하여 오히려 악법에 힘이 실리도록 한 정치력 부재 말이다. 또한 검찰의 시스템적 문제도 보인다. 기소에 대한 합리적 재평가 장치가 없기에, 기소유예 타이밍을 놓치면 아무리 멍청한 사건임이 드러나도 끝까지 갈 수 밖에 없다. 그럴듯한 명분이 생기면 슬쩍 무마할 수도 있겠지만, 박정근 사건은 당사자가 자신의 농담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거부하는 올바른 자세를 취하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무지에 기반한, 미디어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다. 개인의 트위터 알티(RT: 재전송)행위는, 북괴의 지령을 받아 출근시간 광화문에 대자보를 걸어놓는 것과 많이 다르다. 빠르게 여론이 모여 지상파 뉴스와 맞먹는 강력한 전파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그냥 한 줌의 사람들끼리 킬킬거리다가 끝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매체 자체를 물고 늘어지기보다, 훨씬 정밀하게 소통 상황을 인식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외에도 각자의 관심사와 식견에 따라서 더욱 많은 문제요소들이 보이리라.

이런 것들이 꼬여나가며 더욱 황당한 인권 침해 사건들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근본적으로는 정치개혁, 검찰개혁, 미디어교육 등 참 많다. 하지만 당장 할 일 하나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칠면조를 찾아와라”. 여론의 망각과 대선후보들의 외면 속에 박정근이 어떤 식으로든 유죄 판결이 나면, 혹은 무죄라도 검찰이 당당하게 항소하여 그의 일상을 계속 괴롭히면, 우리는 칠면조를 찾아오지 못한 것이다. 박정근이 칠면조다. 검사가 이해 못하는 농담도 가끔 할 자유가 있는 우리 모두가 칠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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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2030 잠금해제] 필진 로테이션. 개인적으로는, 굵은 함의를 지녔되 망각되기 쉬운 사안을 살짝 발랄하게(…뭐 이왕 이런 코너로 배치받았으니) 다시 담론판에 꺼내놓는 방식을 추구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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