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화하지 않은 농업으로 성장담을 이야기하기 – 은수저 [기획회의 331호]

!@#… 연재 첫 몇 회가 공개되었을 당시, 이 정도로 잘 전개되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라, 상당하다.

 

낭만화하지 않은 농업으로 성장담을 이야기하기 – [은수저]

김낙호(만화연구가)


바쁘게 톱니바퀴처럼 살아온 도시 사람이 어떤 계기로 도시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며 그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좀 더 소박하고도 소중한 가치를 발견해나간다는 내러티브는 세계 각지의 대중서사물에서 너무나 흔하게 쓰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이 흔히 공감할 수 있는 도시의 현실적 각박함과 대비되도록 도시 바깥(작은 마을이든 거친 초원이든 농촌이든)이라는 도전적이지만 매혹적 공간이 등장한다. 도시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무언가도 사실은 꽤 힘든 과정을 거쳐야 이뤄낼 수 있음을 깨달으며, 주인공은 매사에 좀 더 감사할 줄 알게 되는 방향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과정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런데 흔하다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그간 나온 명작들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새로 만들어내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적당히 공식만 지키는 선에서 만족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매력을 새로 부여하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애든 스릴러 요소든 당장의 자극적 소재로 빠진다면 이런 내러티브의 원래 장점인 소박한 가치의 재발견과 성장이라는 테마가 덮여버린다. 그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스테리오스 폴립]처럼 미술 사조와 철학적 인식론에 대한 형식 실험을 할 수도 있고 [그루밍 업]처럼 촘촘한 인간관계를 장기간에 걸쳐 펼쳐놓을 수도 있다. 물론 그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던 작품들은 훨씬 더 많고 말이다.

[은수저](3권 발간중 / 아라카와 히로무 / 학산)는 농업고등학교의 터프한 일상 자체를 시끌법적하게 그려내면서 신기하게 그런 매력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기본 얼개는 전형적이다. 도시적 부모님 아래 공부 성적이라든지 하는 도시적 가치를 강요받아 우등생 생활을 하던 주인공 소년 하치켄이 반항의 의미로 홋카이도의 농업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강도 높은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다른 농가 출신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 와중에 친구도 생기고 좋아하는 여학생도 생기고 학교생활 관련 각종 일화들이 펼쳐진다. 학교에서 하루하루를 공부, 실습을 구실로 한 식량생산 노동 등으로 보내면서, 하치켄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바라보며 살 것인지 여러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조금씩 단서를 찾아나간다. 성장물 소년만화의 정석이다.

하지만 [은수저]는 강력한 독특함 한 가지를 지닌다. 이 작품 속 농업의 세계는 낭만화된 농촌이라기보다는 지극히 현실적 효율성으로 가득하다. 18세기 목장 판타지가 아니라, 현대의 유통과 현대적 기계 기술을 염두에 두는 농업이다. 육용 가축은 귀여운 생명체이기 이전에 고기를 키우는 것이고, 우유는 손으로 젖을 짜는 기술보다는 수집통의 뚜껑을 제대로 밀봉하는 공정이 중요하다. 가게에 내놓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내려질 둥글지 않은 감자는 바깥에 출하할 수 없다. 힘들게 만들어낸 식량이지만, 시장에서 쳐주는 값어치는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업종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인 농고의 일상 역시 만만치 않아서, 입시공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고된 일정이 가득하다. 공부와 농업을 함께 하며, 야구든 승마든 특별활동도 병행하고 나면 남는 수면 시간은 길어질 일이 없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이곳의 대부분을 차지하는(즉 주인공 이외에는 모두) 농가 출신 청소년들에게는 그냥 평생 그렇게 보고 지내온 생활이다.

도시 바깥 세상을 낭만화하는 작품들의 경우는, 그 낭만이 파괴의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아내거나 무사히 그곳에서의 임무를 마쳐야 한다는 방식으로 극적 긴장을 만들곤 한다. 하지만 애초에 낭만화하지 않는다면 다른 접근이 필요한데, [은수저]의 경우는 농업생활의 ‘상식’이 일반적 도시민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너무나 호쾌해서 대모험처럼 보일 수 있음을 공략한다. 엄청난 노동 강도도 그렇고, 기계화된 농가 바깥에는 야생곰이 나오는 숲이 있는 현실도 그렇다. 이런 요소들은 작가가 실제로 홋카이도 농가에서 태어났고 농업고등학교를 다닌 직접 경험에서 디테일의 생명력을 얻어내는데, 다른 작품인 부정기 연재 일상 코미디 [백성귀족]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활용한 바 있다. 이미 전작인 대형히트작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완성시킨, 스타일리쉬하게 시선을 흩뿌리기보다는 단단한 느낌의 캐릭터를 강조하는 그림체와 연출방식 또한 이런 현실성을 그려내기에 매우 적합하다.

낭만화하지 않은 농업이라는 특징은, 주인공과 나머지 세상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변주를 가져다준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도시 주인공은 보통 이미 성립된 도시 밖 세상에 그저 녹아들어가는 것에 그치기 쉬운데, 이 작품은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하치켄 또한 이쪽 세계에서 당연히 받아 들여온 방식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그 결과 그 공동체의 인식지평은 한층 넓어진다. 흡수나 교화가 아닌, 상호자극에 의한 발전이다. 이상향에 물드는 현실인의 모습이 아니라, 두 가지의 현실이 서로 부딪히고 인정하며 무언가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농업 생활에 대해서 초보자인 하치켄이지만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이곳에 왔음을 직시하며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해서 늘 성실하게 대하기 때문에, 종종 어느덧 가장 어설프면서도 가장 선두에 선 경우들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명시적 리더가 아니면서도 협업 공동체의 구심점이 된다. 버려진 화덕을 버려진 채로 놔두지 않고, 그가 보여주는 호기심과 성실함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누군가는 그간 만들어놓은 치즈를 공수하고, 또 누군가는 기계를 수리하며 결국 피자 파티를 만든다. 돼지를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축산업 실습의 과정이, 자신이 처음 키워내고 이름까지 붙인 돼지의 고기를 통째로 구입하여 함께 나눠먹으며 더욱 그간 투여한 감정과 노력을 되새기는 충족감으로 이어진다. 농업의 일상에서 하치켄의 발상은 비효율적이고 감상적인 면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치켄은 농업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농업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은 그의 새로운 시각에 자극받으며 결국 좀 더 재미있는 일상을 만들어낸다.

이런 매력적인 틀을 이미 가지고 있다 보면, 전문소재 만화들이 장르적 재미를 접목하기 위해 쉽게 빠지곤 하는 함정인 승부 만능에 빠지지도 않는다. 연애도 인간관계를 꼬아놓아 긴장감을 올리기 위한 소재라기보다는 성장담의 일부다. 서로의 상식과 일상과는 이질적인 시각을 접하며 한층 업그레이드하는, 하치켄뿐만 아니라 모두의 성장물인 셈이다.

은수저 Silver Spoon 1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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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현 발간호 글): 우리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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