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보다, 감성의 관찰 – 달콤한 인생 [기획회의 342호]

!@#… 어째 이 리뷰를 보낸 후 얼마 안 지나 웹 연재 완결.

 

감성보다, 감성의 관찰 – [달콤한 인생]

김낙호(만화연구가)

웹연재 만화의 초기 히트작에는 감성 에세이 형식이 많았다. 아직 웹 환경에 최적화된 긴 호흡의 이야기 연출 기법도, 그것을 경제적 안정성을 지니고 이어갈 매체도 충분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없었다는 것은 물론 전혀 아니라, 단지 온전히 안착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에피소드 단위로 끊을 수 있으며 즉각적 공감대를 극대화하는 것이 먼저 돋보였던 셈이다. 소위 에세이툰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던 그 부류 대다수는 일상의 따뜻한 감성을 칭송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연애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드라마틱한 연애의 롤러코스터라기보다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식의 팬시점 문구 같은 내용들이 자연스럽게도 흔했는데, 덕분에 [파페포포] 시리즈 같은 초대형 히트작도 나오곤 했다. 다만 이런 작품들이 흔히 부딪히는 한계가, 달달한 연애 교훈은 동어반복이 넘치며 두루뭉술 좋게 좋게 넘어가다가 끝난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추상적 훈계와 깊은 염장을 떨다가 지나가기 쉽다. 에세이툰의 붐이 지나가고 웹툰이 다양한 장르로 주류화되어버린 현재에 이르러서도, 은근히 흔하게 출몰하는 방식이다.

네이버에서 큰 호평을 받으며 연재하고 있으며 최근 단행본이 출간된 [달콤한 인생](이동건 / 미디어샘)은 제목만 보면 정확히 그런 식의 흔하고 흔한 연애 에세이툰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현명하게 피해가는 재주를 지닌 작품이다. 오히려 많은 에피소드들이 제목과 정반대로, 연애의 달콤함 자체보다는 연애 당사자 및 주변인들의 치열한 잔머리를 최대한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것을 매력으로 한다. 물론 연애라는 소재를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 자체가 이미 상당한 달콤함을 기본으로 하지만, 염장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재미를 퍼올리는 것에 능하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남녀들은 오래된 연인들, 새로 사귀는 연인들, 평생 솔로들 등 다양하다. 젊은 솔로 직장여성이자 꽃미남과 지름신에 약한 나니, 눈치 없지만 적당히 착한 동건, 솔로를 벗어나겠다는 열망과 달리 요령부득인 영진 등 여러 적당히 흔한 성격의 인물들이 복잡한 과거 사연을 생략하고 현재형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어떤 이들에 대해서도 감성적으로 대충 뭉개면서 상황을 넘어가지 않는다. 다들 각자의 철저한 동기에 의거하여 나름대로 전략적으로 움직이되,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거의 본능적인 부분들과 충돌한다. 그리고 서로, 또는 자기 자신과 그렇게 부딪히는 모습들을 돋보기를 들이대듯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절묘하게 코믹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공감대의 유머효과를 살려내는 것은, 사소한 심경의 흐름과 사고 전개 과정의 섬세한 디테일이다. 식탐, 구매욕(‘지름신’), 일에 대한 회피, 허세, 상대에 대한 의심 등이 추상적 풍자가 아니라 구체적 에피소드로 매번 묘사된다. 그러다보니 자극적 소재보다는 가장 일상적 장면에서 자세하게 파고드는 것이 기본이다. 온라인상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 즉 출처가 지워지도록 각종 게시판에서 펌질과 재펌질을 당한 – 하나의 에피소드는, 새침함과 괄괄함을 동시에 지닌 ‘나니’(망나니의 나니다)가 마음에 든 남자가 서로 사귀기 시작하려는 단계에서 문자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에피소드다. 별 내용도 없는 안부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내면서 어미 하나, 이모티콘 하나에 담긴 뉘앙스를 따지고 여러 번 수정하고, 나아가 보내고 답신하는 타이밍을 치열하게 각자 조율한다. 너무 매달리는 것 같지도 않게, 하지만 호감이 드러나게 균형을 맞추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그 과정에 주변인들의 오지랖도 끼어들며, 난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장된 상황들이, 연애(를 시도해본) 많은 이들에게 대단히 공감을 자아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사귀는 과정, 또는 사귀고 싶어하다가 아무것도 안 되는 과정은 시적 감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 대결과 서로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냉엄함을 내세우며 연애 감정 자체에 찬물을 끼얹는 수준은 다시금 피해가며,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보다는 경쾌한 웃음을 주는 균형을 맞춘다. 여느 부부생활 만화들처럼 아예 생활의 무게를 끌어들일 정도로 본격적 현실로 들어가지는 않고, 연애의 밀고 당김에서 각자의 잔머리를 좀 더 우스워질 때까지 세밀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감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을 이성적으로 관찰하는 식이다. 과도한 감성적 의미부여를 피하다 보니, 이 작품에서 연애는 비장한 아픔, 미칠 듯한 감동의 무언가가 아니다. 이왕이면 솔로가 아니고 싶고, 짝사랑이든 밀당 과정이든 이별이든 현재의 선택이다. 평생의 배필을 찾고 삼각관계 사각관계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치를 읽어가며 적절한 연애 대처를 하는 과정이다. 감성적 섬세함이 아니라 소소한 디테일에 대한 관찰로, 앞서 설명한 초기의 ‘에세이툰’과 비슷한 시기에 발아한 ‘공감툰’ 계열의 흔적이 더 뚜렷하다. 공감툰이라 불리던 이 만화들은, 서사적 구성이나 그림의 완성도 같은 것은 한참 후순위로 놓은 상태에서 오로지 생활 속 대충 지나쳤지만 누구나 한번 겪어봤을 법한 작은 디테일을 포착하여 확실하게 묘사해내는 방식의 작품이었다. [달콤한 인생]은 그런 식의 소재 선정 위에, 연애라는 요소와 캐릭터들의 이야기성을 살짝 접목하여 결국 꽤 안정감 있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공감이 강조되는 작품들이 흔히 쓰는 적당히 거친 열린 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균질한 닫힌 선의 디자인 아이콘 느낌이 강한 그림체도 은근히 이런 접근법과 잘 어울린다. 물씬 넘치는 즉흥적 감성이 충만해진다기보다는, 비행기 안전수칙 팜플렛처럼 무언가 과정을 설명하는 연속 도해의 느낌이 오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연애하는 남녀들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는 크고 작게 틀어지는 부분들을 뚜렷하게 외부에서 바라보는 식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기에, 과정을 관찰하고 설명해내는 담담함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시각요소 선택인 셈이다. 풀어서 설명하려니 대단한 이야기처럼 포장되었지만, 이 작품의 에피소드 하나를 책이나 온라인에서 펼쳐본 후 머릿속에서 그 장면들을 [스노우캣] 그림체로 한번 다시 그려보면 어떤 차이인지 극명해질 것이다.

물론 [달콤한 인생]이 탁월한 세부적 관찰력을 오로지 현재형으로서의 연애를 그리는 것에만 할애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의 마음 혹은 잔머리 전략을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방해 조건도 없는 세계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잘한 부분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모습이 동화적 따뜻함의 교훈보다 훨씬 현실적 공감대를 부르는 이런 미덕은 결코 흔치 않으니, 충분히 즐겨두는 것이 좋다.

달콤한 인생
이동건 글 그림/미디어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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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발간호): 주먹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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