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급 오지랖의 거품을 빼자 [팝툰 15호]

!@#… 전체주의니 파시즘이니 하는 거창하고 편의적인 개념말고, 일상의 오바질과 성찰을 논할 때는 일상의 용어와 논리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추진하는 일련의 capcold 캠페인 가운데 하나다. 추석 특집인 줄 알았으나 알고보니 추석 이후에 들어간 원고. 뭐 별로 애초에 추석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원래는 “한가위를 맞아 풍성한 마음으로 자제 좀 하자”라고 썼던 바 있다 (당연히, 타이밍이 어긋나는 만큼 그냥 뺐다).

국가급 오지랖의 거품을 빼자

김낙호(만화연구가)

워낙 항상 이슈를 이슈로 덮어버리는 세상인지라 아직 기억할 분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아 자동차의 어떤 직원들이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렸다고 해서 적잖은 국민적 분노가 사회를 뒤흔든 적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 그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벌금형 이상으로 아예 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그 이유는 “국부 유출”이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뭔가 이상하다. 민간기업의 기술을 빼돌렸으니 기업이 민사상의 손해배상을 받는 것이 정상이 아니려나. 국가가 대주주인 공영/국영 기업도 아닌데 말이다. 형사상의 처벌이라도 절도죄의 범주에서 규정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게다가 이 논리라면, 해당 기술을 중국이 아니라 다른 국내 자동차 업체에 팔아넘겼다면 불법 유출이라는 똑같은 죄를 지어도 죄과가 가벼워진다. 법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사법부 특유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왜 무려 나라 생각하며 국부 운운할까. 아아, 이런 국가 단위 오지랖 정서라니.

하기야 그런 정서는 기껏해야 취향으로 취사선택하고 향유하면 족할 장르 오락영화 한편을 둘러싼 소란에서도 차고 넘치게 나타났지, 아마. 9월 중순에 『디워』가 미국에서 개봉하자, 눈먼 분노의 일갈들로 가득했던 한여름의 생쑈를 지나 한동안 잠잠했던 불은 다시 지펴졌다. 여전히 제멋대로 초등영어로 외신을 왜곡번역해서 잘나가는 한국영화라는 신기루를 만들어내는 어떤 자칭 주류언론들의 진두지휘와 함께, 흥행선전을 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가 난무한다. 또 한쪽에서는 미국 평론가들의 악평 폭격과 함께, 영화가 너무 질적으로 떨어져서 국가망신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도 비등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이상하게 과열되어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국가 규모로 거창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 투자수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영화가 흥행하든 말든. 마찬가지로, 영화가 너무나 말도 안되게 엉망이어서 욕을 먹어도,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욕을 먹든 말든. 물론 한국영화는 다 그래, 한국인들은 다 그렇다며 싸잡아 욕하는 인종차별주의 멍청이들이야 좀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인의 지나칠 정도의 국가 단위 동질감은 약간만 바깥의 시선으로 보기만 해도 상당히 신기한 현상이다. 일본의 장수 음식만화 『맛의 달인』중 한 에피소드는, 일본 기자인 주인공들이 한국에서 쇠고기 요리로 대결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저 일개 신문사의 특집기획을 위해서 각국의 미식요리를 취재하는 주인공들과 달리, 이들을 맞이해준 한국 측의 대표는 한국 쇠고기의 깊이와 우월성을 강조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 회사의 고기가 최고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 쇠고기가 훌륭하다는 국가 단위의 동일시가 당연하다는 듯이 전제되어 있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기자나 요리전문가라기보다 ‘일본인’이기를 요구하여 초대받은 일본 손님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처해한다. 물론 그런 것은 무슨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전체주의 운운할 정도로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어떤 국가적 실속을 예상할 수 있는 애국심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이상한 오지랖일 뿐.

정말로 국가단위로 경합을 벌이는 것이 아닌 상황인데도, 자꾸 모든 것을 국가 단위의 틀로 보고 싶어 하거나 무언가를 국가대표 취급하며 멋대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속된 말로 일종의 ‘자뻑’이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국가 단위로 무언가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허세고, 후자의 경우는 온 세계가 한국에 엄청난 관심이 있어서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볼 것이라는 도취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정작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진짜 세부적 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는 대충 두루뭉술 잊혀지기 마련이다. 계급이든, 취향이든, 정치성향이든, 뭐든 간에. 국부를 그렇게 찾고 싶으면 차라리 버스터미널 가판대의 에로잡지를 펼쳐보시길. 스스로를, 주변 모든 것을 국가대표로 자꾸 격상시키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속편하고 실속 챙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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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양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만화를 가져오는 방식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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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국가급 오지랖의 거품을 빼자 [팝툰 15호]

Comments


  1. 무슨 일이든 사사건건 국가와 연관짓는게 확실히 우습긴 하지만, 예로 드신 자동차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상품이기도 하고, 기간산업이기도 한만큼 실제로 국부
    유출의 예로 충분히 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예로서는 조금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런 분야의 산업 스파이의 경우에는 꼭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충
    분히 엄하게 벌하고 있구요.

  2. !@#… 미들네임님/ 글쎄요. 미국이나 유럽이 산업스파이에 대한 처벌이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을 훔친 것 자체에 대해서 처벌하지 국내 기업으로 빼돌렸냐 해외 기업으로 빼돌렸냐 가지고 특별히 ‘법원’이 나서서 챙겨주지는 않습니다 (배심원들이나 일반 여론이라면 또 몰라도). 군사 기술만이 예외라면 예외인데, 그건 산업스파이가 아니라 아예 국가안전 이슈로 다스리니까요. 제대로 된 법원이라면, 기밀을 삼성자동차에 팔았든 포드에 팔았든 똑같이 엄하게 다스려야 했습니다. 법으로 자동차를 ‘국가기간사업’으로 정하고 국가가 대주주로 기능하며 별도의 처벌 법령을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법적 판단보다도 무려 국부를 걱정해줘서죠. 법원이 그러고 다니면, 명랑사회는 멀어집니다.

  3. 진짜 문제는 그런 정서나 경향이 언론을 통해 자꾸자꾸 재생산되면서 국민들을 국가 바보로 만든다는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작 윗분들은 한국 경제가 흥하든 망하든 별로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데 말입니다(알고 있다면 비정규직 문제를 그 따위로 처리할 리가 없…).『맛의 달인』의 한국요리 시합 에피소드는 뭐랄까… 한국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그런 국가간 대결 구도로 몰고 간 것이 아닐까요? 사실 원래대로라면 강제 징용 같은 일본 정부가 과거에 행한 악행이 본문 중에 소개될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4. !@#… stirner님/ 때로는 언론에 끌려서, 때로는 언론에 반발하겠답시고 결국 항상 다시 국가만세로 돌아오는 경우들이 허다하죠. 재밌는 현상입니다. // ‘맛의 달인’의 경우 굳이 한국에 대한 입장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빚을 스스로 제대로 알고 갚을 것은 갚자는 쪽이죠. 그렇게 해서 떳떳한 일본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오히려 정말 희귀한) 도덕적 우파의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5. 근데…. 가판대 에로잡지에 국부도 나옵니까? 스무살 이후로 사 본 적이 없어서…

  6. !@#… 모과님/ 물론 저는 순진한 청년이라서 그런 거 잘 모릅니다. 본문의 국부도 아마 ‘국부마취’라고 할 때의 국부가 아닐까 합니다. (시침시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