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후보 수락 연설, 사회적 합의와 참여에 관하여.

!@#… 며칠간 계속된 미국 민주당 전국 전당대회, 오바마의 대통령 후보 수락. 안그래도 연설 잘하기로 소문난 오바마, 주목도에 있어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될만한 이벤트인 만큼 기합이 잔뜩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수락 연설. 게다가 마지막까지 후보 자리를 놓고 다퉜던 힐러리가 워낙 포스 넘치는 명연설을 한데다, 빌 클린턴이니 앨 고어니 한 말빨 하는 거물들이 워낙 기대수준을 높여놨던 자리. 하지만 예상된 바 대로, 오바마는 레토릭 연구의 모범 텍스트로 다루어볼 만한 연설을 들고 왔다. 1) 평범한 용어로, 2) 뚜렷하게, 3) 감성과 이성을 골고루 건드리며, 4) 미국의 현 상태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비전을 펼치며 동시에 정적들도 버로우시키고 궁극적으로 듣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편이 되도록 치켜세워주는(…) 미션을 거의 흠잡기 힘들 정도로 충족했다. 그 중 한국에서 언론 보도로 요약된 내용들은 주로 외교 관계에 대한 비전이나 전체적 정국운영에 대한 전망 정도지만(그게 한국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니까), capcold가 주목하는 것(그리고 아마 실제 미국 대중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바로 오바마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합의’와 ‘시민 참여’에 대한 관점. 억압적 정부와 싸워 얻어내는 전리품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이 주인이 되어 사회를 운영하는 체계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필요한 통찰이다. 물론 학자들의 연구에서 이미 어떤 식으로든 충분히 나온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힘있고 사람들이 알아먹게 소통한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기에, 해당 부분을 옮겨본다. 해석은 최대한 직역.

“우리는 낙태에 관해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원치 않은 임신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는 합의할 수 있죠. 총기소지의 현실은 오하이오의 농촌 지역에 사는 사냥꾼들과 클리브랜드에서 조직폭력에 시달리는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정헌법2조를 지켜나가면서, 동시에 범죄자들이 손에 AK-47을 넣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동성 결혼에 대해 입장차이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동성애 형제 자매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이들을 병문안 갈 수 있으며, 차별받지 않는 삶을 살 자격이 있다는 것에 합의할 수 있습니다. 이민에 관한 여러 열정적 주장들이 충돌하지만, 어떤 어머니가 아기와 떨어질 때, 혹은 어떤 고용주가 불법고용을 통해서 미국의 임금을 깎아내릴 때 이득을 볼 이를 저는 아는 바 없습니다. 이것 또한 미국의 약속 가운데 일부입니다. 바로 민주주의의 약속이며, 우리가 서로의 차이에 다리를 놓고 공동의 노력으로 하나되기 위한 힘과 품격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그저 행복한 허풍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공공의 삶에 있어서 더 크고 굳건하며 정직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고집을, 그들은 단지 더 많은 세금을 걷고 전통적 가치를 내던지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 정도로 취급합니다. 예상된 바 입니다. 왜냐하면 신선한 발상이 없다면, 식상한 전략을 통해서 유권자들을 겁주곤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전력이 스스로에게 없다면, 바로 상대방을 사람들이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색칠하게 되니까요.

큰 선거를, 작은 것들에 대해서 하게 됩니다.

이것 아십니까 – 이전에 그 방법은 통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정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냉소주의를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워싱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모든 약속은 공허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희망이 매번 좌절당했다면, 희망하기를 멈추고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최선이죠.

알겠습니다. 제가 가장 그럴싸한 대통령직 후보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저는 전형적인 계보에 들어맞지도 않고, 워싱턴의 정가에서 이력을 쌓아올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은, 미국 전역에서 무언가가 울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번 선거는 결코 저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여러분에 관한 것입니다.

긴 18개월동안, 여러분은 하나씩 일어났습니다. 과거의 정치에 이제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선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위험은 같은 헌 사람들과 같은 헌 정치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보여주었습니다 – 지금 같은 결정적 순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워싱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변화는 워싱턴으로 갑니다. 변화는 미국 국민들이 요구하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국민들이 일어서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지도력, 새로운 정치를 고집하기에 이루어집니다.

미국이여,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문은 여기로: barackobama.com)

!@#… 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보다 큰 차원의 합의를 원칙으로 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참여를 하는 것. 민주주의의 이상향의 본질을 담은, 군더더기 없는 정론이다. 팬시한 표어만 있지 실상 목표하는 뚜렷한 사회적 비전도 뭣도 없이(부국강병 그런 하나마나한 말 말고, 반공 같은 네거티브 캠페인 말고) 현행 기득권 세력들의 느슨한 이해관계 결합에 불과한, 그래서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행복할 수 있는 방식의 사회를 만들기보다 당장의 떡고물 획득을 기원하기에 눈먼 사랑을 보내는 기복정당™이 부동의 지지율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한국에서, 반드시 배워둬야 할 접근법이다.

PS. ‘기복정당™’이라는 capcold식 컨셉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PS2. 알아요 알아. 현재 한국은 지금껏 확보한 민주주의의 물리적 조건들마저(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라든지) 흔들릴 지경이라는 것. 하지만 이런 발상들은 민주주의가 ‘그 다음 단계에 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다져야 할 내실’인 만큼, 끝없이 되새겨야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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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thoughts on “오바마 후보 수락 연설, 사회적 합의와 참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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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A Piece Of Cake (ver tistory)

    오바마와 이명박의 차이…

    토요일 오전에(왜 휴일엔 눈이 일찍 떠지는건지…) 오바마의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 동영상을 봤다. 화려하고, 열정적이고, 한편의 잘짜여진 쇼처럼 진행되더라. 연설문 잘쓰고, 연설 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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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정치와 신화의 정치 – 두 대통령 후보의 이야기 : 버락 오바마와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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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막 넷. 이전에 언급한 기복정당™ 컨셉과 관련된 이야기 약간만 더. 기복정당이라는 발상의 근간은, […]

  4. Pingback by capcold님의 블로그님 » Blog Archive » 오바마 대선 승리 연설, 합의와 연대에 관한.

    […] 승리 연설. 지난번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도 합의와 참여에 관한 구석구석 좀 무척 쓸만한 명연설을 남겨서 이번에도 뭔가 속편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니나다를까 […]

Comments


  1. 저는 NPR로 전당 대회 내내 연설들을 라디오로 들었죠. 정말 다들 연설 정말 잘하더군요. 전 미국 생활이 11년째지만 아직도 영어가 그렇게 잘 들리는 편이 아닌데, 이들의 연설은 일부 어려운 표현을 제외하고는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 오바마도 연설 잘했지만 버지니아 주지사인 Tim Kaine도 한 연설하더군요. 솔직이 이렇게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설을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이렇게 많은 것도 부럽고… 보좌관이 써 준 연설문을 떠듬떠듬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물 흐르듯이 쏟아내는 걸 보니…

    아무튼 우리말로 번역하니 느낌이 또 다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몇 군데 퍼가겠습니다.

  2. ‘저런’ 연설이 통하고 먹히는, 그런 이야기를 할 토양이 마련 되어 있다는게 정말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3. !@#… Crete님/ 하지만 너무 말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싫어할 사람들은 싫어하죠… OTL 여튼 참 명연설의 대향연 같은 며칠간이었습니다. 그걸로 영어교재 만들어서 한국 입시시장을 휘어잡… (어이)

    nishi님/ 물론, 지지자분들은 굉장히 싫어하실 컨셉이죠. (핫핫)

    mil님/ 사실, 통하고 먹힐 때까지 꾸준히 계속 해온거죠.

  4. 덧2에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번역해주신 것도 잘 읽었습니다. 오바마에 대한 호감이 쭉쭉 오르네요!

  5. !@#… dcdc님/ 덧2가 사실 핵심일지도;;; // 여튼 오바마의 시각은 참 보고 배울 것이 많은 접근법과 통찰이죠. 유감스럽게도 국내 언론에는 보통 이런 중요한 내용은 쏙 빠지고 그냥 “꿈과 화합을 부르짖었다” 정도지만…;;; 물론,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인 만큼 외국(예를 들어, 한국)에 대해서도 저렇게 해피하게 나오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지요(외교란 자고로 피도 눈물도 없는 각축의 현장…).

    nomodem님/ 그리고 8만8천 청중은 열광의 도가니.

  6. 우와…’조낸 정론’을 ‘조낸 잘’ 말하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까지 감동적인 연설이 나오는군요. 이거야말로 정통파의 힘.

  7. 아 이런 거 너무 멋져 ㅠㅠ.
    가끔 한국 정치인들 연설 듣다보면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지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규모있게 악할 수 있는지를 조리있고 유려하게 표현한다면 내 그놈을 찍어주리라 하는 마음이 들 정도. 이건 뭐 국민학교 웅변대회도 아니고…. 듣는 내가 쪽팔려!(난 왜 여기서 화풀이?)

  8. !@#… Rivian님/ 한국에서 흔히 닥치고 애국심 호소로 오해받곤 하는 케네디의 “국가가 널 위해 뭘 해줄지 묻지 말고 네가 국가를 위해 뭘 할지 물어봐” 연설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죠. 민주주의니까 바로 여러분이 주인노릇을 해야 한다, 라는 진정한 정론.

    모과님/ 앗, 그렇다면… “저는 제 사상으로 점진적으로 얍삽하게 사람들을 세뇌시켜서(체계적!), 세계를(규모!) 정복(악!)하겠습니다. 이것은 무척 논리적인 귀결이며(조리!), 광활한 시대의 대세입니다(유려!).” 한 표 굽신.

  9. 번역해놓으신걸 알았으면, 이거 보고 오바마 연설을 볼걸 그랬네요. 트랙백걸었지만, 오바마의 연설을 보고서 느낀건 거대담론에서 조금은 비켜서 평범한 언어로 정부와 국민 그리고 자신의 비전에 대한 약속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우리네 대통령과의 큰 차이로 다가오더군요. 사실 씁쓸했습니다.

  10. 정치에 대해 적어도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명박입니다.
    정말 오바마의 연설은 주목할 만한 하더군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땅의 정치인들이 좀 보고 정신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대안부재의 우리 정치 현실이 안타깝끼만 합니다.
    – 트랙백 쏘았습니다~ ^^

  11. !@#… 시린콧날님/ 민주주의의 근원에 대한 거대담론을 척추에 깔고,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의 장면, 구체적 정책의 사례로 살을 붙였죠. 실로 교과서적인 사례랄까요. 음…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네 현 대통령은 비교범주로서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패쓰.

    ZZiRACi님/ 뭐 늘 주장하는 바지만, 대안도 보완도 찾아보면 항상 있습니다. 한번에 짜잔하는 마법적 해결책은 없기에 첫술에 배부르지 않다곤 해도, 항상 더 나은 방향이란 존재하며 그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있으니까요. 대안, 보완의 존재가능성을 부정해서 결국 그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결과적으로 부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