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만화/애니사

(추가: 아래 내용의 확장판 및 다른 시대의 이야기들까지 합쳐서, 2010년 말에 책으로 묶여나온 바 있습니다: 클릭 )

!@#… 한국의 각 문화예술분야의 역사를 10년 단위로 종합하여 집대성한 역작, <한국 예술사대계>. 그 90년대편에 수록된 90년대 만화/애니메이션사. 나중에 소위 ‘정사’ 로 불리울 물건이다(원튼말든). 여튼 최근 오마이뉴스 사건에서도 드러났듯 만화판을 걱정하기 좋아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의외로 90년대의 역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해서, 80년대 기준으로 2000년대를 이야기하는 괴이한 현상들이 난무. 그래서 이번 기회에 본문을 여기에 공개. 어차피 연구비 형식으로 작업한 것이고 이미 책은 나왔기 때문에 여기 공개하는 것에 문제는 없음. ‘사관’과 ‘자료’로 뒷받침되는 역사 서술을 하고자 했는데, 여튼 당시 지면이 부족해서 참 많은 내용을 오히려 커트.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 책에는 도판도 좀 들어가 있으나… 이 황폐한 문자 블로그에서는 문자만 그득.

!@#… 이외에도 90년대 이후 만화판도에 대한 종합적 접근을 더 보시고 싶다면, <만화세계정복>(두고보자 저, 2003)을 보시길. 지금은 나름대로 레어아이템. 자 그럼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클릭.

 

90년대 만화사

 

 글/ 김낙호 (만화연구가)

I. 개관: 90년대적 현상의 시작

병영사회 지속과 대중문화 부흥의 공존이라는 기형적 상태에서 잉태된 80년대적 양상들은, 애초부터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시대에 길을 내줄 운명이었다. 87년의 정치적 민주화 확보, 그리고 이에 힘입어 촉발된 80년대말-90년대초 문화연구 담론의 폭발적 유행 덕분에 각 대중문화 장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관심을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특히 대중문화의 풀뿌리로서 자리매김해온 만화라는 분야에서 90년대적 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오락성 소일거리라는 기존의 인식틀에 산업적, 예술적 담론이 본격적으로 더해지면서 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활력을 발휘했다.

산업적 측면에서 90년대적 현상의 기반이 되는 사건은 1988년 잡지 <<아이큐점프>>와 <<르네상스>>의 창간으로, 장르별 특화 및 독자 세분화의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여성지와 타블로이드 신문을 전문으로 하던 출판사인 서울문화사에서 출간한 <<아이큐점프>>는 일본 만화출판사들의 기업화된 잡지관리시스템을 수입해서 한국시장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빠른 발간 스케줄 및 사춘기적 감수성을 지닌 준청소년층이라는 특화된 대상 공략은 한국에서는 대단히 신선한 시도였고, 이현세/야설록의 <아마게돈>, 이상무의 <제4지대> 등 대담한 발상의 작품들이 히트로 이어졌다. 또한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 잡지인 <르네상스>는 80년대에 농축되었던 순정만화 향유층의 열망을 수면 위로 급부상시키며 순정만화 붐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한국 주류 만화시장의 구성방식은 점차 대본소 중심에서, 잡지 연재 및 이를 묶어낸 단행본으로 체질 변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90년대식 만화 지형도의 분기점은 그 다음에 뒤따랐다. <<아이큐점프>>지의 주요 인기 작품들이 연재 종료되면서, 출판사는 떨어져 가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새로운 작가 발굴과 시스템 개혁과는 다른 손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1989년 말, 결국 일본의 검증된 히트작 <드래곤볼>이 한국 연재를 시작하고, 대형 히트를 기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다양한 일본 만화들이 본격적으로 대량 수입되기 시작하여 만화 시장의 급격한 외적 성장과 일본만화 출판 비중의 과반이라는 산업적인 현상으로 정착했다. 이러한 시작은 90년대 중반 만화 위주 도서대여점의 기형적 성장, 90년대 후반의 시장 위기론 등으로 이어졌다.

담론적 측면의 변화로는 민중문화론의 쇠퇴와 함께, 페미니즘이나 수용자 중심 시각 등 다양한 방식의 문화연구적 측면이 부각된 점을 들 수 있다. 리얼리즘이나 학습성을 미덕으로 삼았던 민중문화적 시각에서, 장르 문화적 완성도와 향유자와의 유대가 평가를 받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소년지향 장르만화에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진짜 사나이>등 밀리언셀러가 탄생하는 동안,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성인만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만화광장>>이 점차 힘을 잃고 결국 93년에 폐간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9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담론이라면 역시 문화산업론인데, 만화는 그 폭풍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쥬라기공원 효과’1) 와 함께 만화는 정당한 사회적 위상이나 산업적 건전성이 채 정립되기도 전에 먼저 문화산업의 원동력으로 추켜세워진 것이다. 즉 산업적 측면에서의 성공 및 프랜차이즈 가능성이 만화로서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부각된 셈이다. 이것은 정식 개방된 일본만화 및 일본만화식 제작시스템의 영향과 함께 90년대 만화 작품들의 가장 중요한 경향성인 장르성의 공고화에 기여했다.

장르성의 발달은 특정 작품 차원에서는 장르적 규칙의 도입이 강화되는 것을 일컫고 작품군에 있어서는 특정 요소에 따른 취향의 다양한 클러스터화가 진척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구만화, 무협만화 등 단순히 소재에 따른 ‘OO만화’라는 커다란 범주보다는, 하렘물, 야오이물 등 세부 취향과 장르적 규칙에 따른 ‘OO물’이라는 범주가 작품들의 경향성을 이해하고 즐기기에 더 유효한 잣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나 아류작 양산의 수준을 넘어서서, 취향 기반 독자군의 형성과 함께 개별 작품들의 기술적 완성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독자 취향층을 연령별, 성향별로 세분화시켜온 일본만화의 직접 유입과 함께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수준은 급격하게 높아졌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에 실패한 분야인 명랑만화는 한국 만화사에서 지금껏 차지해온 영광에도 불구하고 명멸 직전까지 가는 심각한 침체를 겪어야만 했다. 반면에  잡지연재-단행본 판매의 공식을 바탕으로 한 소년만화와 순정만화는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수혜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렇듯 장르성 공고화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하는 큰 맥락 속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장르 도입 실험, 90년대 중반 이후 캐릭터 중심 전개의 강화, 90년대 말 이후 지나친 취향 세분화에 따른 역효과 등의 주요한 흐름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지나친 장르공식화,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서 제기된 독립만화 움직임 역시 90년대적 맥락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애니메이션 분야의 90년대는 이 용어 자체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다. ‘만화영화’라는 기존 용어의 사용이 급감하고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가 급부상한 것은,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움직이는 만화 정도로 치부하던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위상정립을 의미했다. 애니메이션을 유망한 고수익성 영상산업으로 바라보고자 한 산업계의 요구, 자유로운 영상 예술의 분야로 인정받고자 하는 독립 창작계의 부흥, 그리고 TV 만화영화를 보며 자라나서 자기 취향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 젊은 세대의 성장이 맞물린 것이다. 87년 <떠돌이 까치>를 필두로 하여 지상파 방송 전용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큰 호응을 얻어냈고, 이러한 움직임은 올림픽 붐과 융합한 <달려라 하니>, 캐릭터 프랜차이즈로 이어져 성공모델을 제시한 <아기공룡 둘리>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화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체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와중에 외부에서 수입된 대형성공 사례로 인하여 전체 판도가 급속도의 변화 물결에 휩쓸리는 패턴이 나타나게 되었다. 극장판에서 그러한 계기가 된 것은 91년 미국 월트디즈니사의 극장 장편 뮤지컬 재기작인 <인어공주>의 히트로, 아동층에 한정되어 있다고 여겨졌던 극장 애니메이션에 대한 광범위한 수요층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수차례의 극장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는 <블루시걸>의 당혹스러운 성공, <아마게돈>의 시행착오 등 명암이 교차했다. TV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SBS의 개국과 함께 최신 일본 TV물들이 급격한 증가가 시청자의 눈높이와 취향을 주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응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제작 작품들도 <영혼기병 라젠카>의 사례처럼 기획단계부터 세부취향과 장르성에 대폭 집중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90년대는 대중오락문화의 모호한 덩어리로 존재하던 만화/애니메이션에서, 세분화된 취향과 구체적인 산업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인하며 열렸다. 그리고 이후 십여년 동안 만화는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지우는 문화연구적 시각, 문화와 산업을 융합시키고자 하는 문화 산업론적 시각 속에서 장르 문화적 속성을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키며 시스템화의 길을 걸었다.

 

II. 90년대의 만화/애니메이션 환경

1. 90년대 전반 잡지 판도의 재편

대중문화예술로서의 만화는 생산과 유통의 맥락이 작품 내용의 경향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88년 <<아이큐점프>>와 <<르네상스>>의 창간이 한국 만화계의 90년대를 열어놓았다는 시대구분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잡지 판도의 재편은 새로운 세대의 작가군, 새로운 장르와 취향을 만화계에 선보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어주었다. 기존의 만화잡지들이 성인과 아동으로 나누어질 뿐이었다면, 이 두 잡지에 실린 작품들은 그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타협하거나 또는 학업을 명목삼아 만화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청소년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각각 남성과 여성의 사춘기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층 자유로운 표현, 인간관계와 성장이라는 호소력 있는 모티브 등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결국 잡지의 추진력을 <드래곤볼>이라는 외국작품에 맡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큐점프>>는 80년대 만화잡지들의 속성과 더 가깝게 맞닿아 있었다. <아마게돈>의 이현세, <헬로 팝>의 김형배, <영심이>의 배금택, <스카이 레슬러>의 장태산, <전설의 야구왕>의 고행석 등 80년대를 통하여 인기를 끌었던 작가들이 여전히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인 경쟁자 역시 허영만의 <날아라 슈퍼보드>가 연재되던 <<만화왕국>>, 여전히 분투중이던 <<보물섬>> 등 80년대를 살아온 잡지들이었다. 신인작가의 경우도 기성 중견 작가의 화실에서 문하생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 데뷔하는 방식을 따랐다. 당시 파격적인 신인 등용으로 취급받았던 김준범의 <기계전사 109> 역시 허영만 화실 출신이라는 경력과, 80년대에 허영만과 작업한 스토리 작가(<담배 한 개비> 외) 노진수의 협업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주로 아동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 및 수입을 전문으로 하던 대원동화에서 91년 주간지 <<소년챔프>>를 창간하면서 일어났다. <<소년챔프>>는 제호에서부터 <아이큐점프>와 경쟁할 것을 노골적으로 암시하였으며, 실제로 같은 독자 취향층을 노리고 시장에 진입해 들어왔다.

창간 당시 고행석의 <마법사의 아들 코리>를 주요 작품으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 잡지는 후발주자이자 기존 만화계와의 연계가 부족하다는 핸디캡 때문에 유명 기성작가들을 다수 확보하는 일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한 것이 <슬램덩크>라는 일본 인기 만화의 유치, 그리고 과감한 신인 등용이었다. 공개 공모전을 시도하는 등 신인 등용에 집중한 결과, 기존의 기성작가 인맥이 아닌 새로운 감수성의 작가군이 등단하는 기회가 열렸다. 만화 동호회 활동을 통해서 만화를 그려온 젊은 세대가 화실 문하생이라는 중간역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면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신인 작가의 자리는 해오름(의 서영웅, 손희준 등), 그래피티(고병규, 이명진 등), AAW(양재현, 김태형 등) 등 유명 동호회들의 광장이 되었다. 이들 젊은 작가군이 여타 잡지의 기성작가들과 차별화되었던 특징은 철저하게 독자들과 동세대적인 감수성으로 무장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결과 <<소년챔프>>는 이내 상업적 성공가도로 올라선다. 공모전을 통한 신인등용, 인기투표 수치에 의한 철저한 작품관리, 작품내용과 연출에 대한 편집부의 강력한 개입 등 일본식 만화잡지 시스템이 성과를 발하는 순간이었다. 산업 모델 역시 잡지연재분이 모이면 곧바로 단행본으로 묶어내며, 단행본 판매가 주요 수익원이 되어주는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 개별 창작물의 모음이라기보다는 조율에 의한 제작 시스템이 보다 강조되는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모델의 도입에 어느정도 성공한 것은 결국 <<소년챔프>>와 <<아이큐점프>> 뿐이었으며, 적응에 실패한 <<보물섬>>, <<만화왕국>>, <<소년중앙>> 등 여러 잡지들이 결국 사라졌다. 이들은 이후 연령별 취향분화를 한 사업확장을 시도, 94년에 각각 중고생층 이상을 노린 <<영챔프>>와 <<영점프>>, 아동층을 노린 <<팡팡>>과 <<샤크>>(95년 창간, 각각 <<월간챔프>>와 <<월간 점프>>를 계승) 등의 자매지를 창간했다.

순정만화 역시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창간 이후 한동안은 잡지만화와 대본소용 장편만화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대본소 독자 자체가 줄어들고 잡지시장이 부흥하면서 대세는 잡지로 기울었다. 비록 단명한 졸속 기획도 많았지만, 시장의 형성과 경쟁구도의 강화 속에서 정기적인 창간 러시가 일어나며 풍부한 지면이 형성되었다. <<요요>>, <<미르>>, <<댕기>>, <<터치>>, <<윙크>> 등을 위시한 수많은 잡지들이 90년대 초반에 창간되었다. 이들 순정잡지들은 초반에는 비슷한 성향의 재탕에 불과했으나,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점차 연령별 취향별 세분화를 시도해 나아가 성인여성만화를 표방하며 98년 창간된 <<나인>>에서 완연히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아동성향 순정지 역시 약진하여, <<밍크>>, <<파티>>, <<비쥬>> 등으로 이 시기 순정만화잡지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성인만화2) 영역의 90년대는 신문지면의 성장과 함께 개막했다. 90년의 스포츠조선 창간은 스포츠신문 간의 경쟁구도를 심화시켰는데, 뉴스거리가 한정된 스포츠 연예 소식보다는 연재만화 분야에서 오히려 차별성이 부각되었다. 그 결과 스포츠신문 만화의 터줏대감들이었던 고우영, 강철수 등의 명성과 함께, 이두호, 허영만, 이현세 등 80년대 극화풍 만화계를 풍미한 굵직한 이름들이 스포츠신문에서 이름을 비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타 만화분야의 대본소 쇠퇴와 잡지창간 붐은 결국 95년도에 성인만화 영역에서도 효과를 발휘하여 중견 작가진들이 주주로 참여한 격주간지 <<미스터블루>>라는 결실로 나타난다. 같은 해 연령별 세분화를 노리고 있던 대형 만화잡지 출판사들 역시 성인만화 영역으로 확장을 꽤하여 <<소년챔프>> 브랜드의 대원에서 <<트웬티 세븐>>, 그리고 <<아이큐점프>> 브랜드의 서울문화사에서 <<빅점프>>를 창간했다. 이들 잡지들은 새로운 90년대적 취향과 80년대 대본소와 <<만화광장>> 류 잡지들의 전통적 성인 독자들의 만화 독서 성향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기 위한 균형점을 모색해 나아가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90년대 말의 여러 산업적/사회적 악조건 속에서 조락하고 만다.

가히 잡지의 춘추전국시대라고도 볼 수 있는 90년대에는 이외에도 <<코믹테크>>, <<만화창작>>등 만화 관련 잡지들이 창간되었으며, <<애니메이툰>>, <<모션>>, <<애니테크>>, <<한국판 뉴타입>>등의 애니메이션 전문지도 제한적으로나마 활성화되었다. 또한 이후 글에서 다시 다루고자 하는 독립만화 성향의 잡지들인 <<오즈>>, <<히스테리>>, <<화끈>> 등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무협에서 강세를 보인 홍콩 및 대만 만화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92년 창간되었던 <<천하만화>> 등의 잡지 역시 90년대 잡지시장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2. 90년대 후반과 문화산업 논리 지배

90년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문화산업’이다. 때로는 그것은 때로는 신지식인이라는 캠페인 표어와 붙어 다녔으며, 때로는 원소스 멀티유즈라는 방법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도 하며, 결국 문화콘텐츠라는 국산 신조어로 귀결되었다. 나아가 90년대 후반 전국을 강타한 경제적 침체의 물결은 산업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을 한층 더 부채질했고, 산업적 효용성은 대중문화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판단의 척도로 정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만화의 90년대는 사회적 지위, 시장의 관심, 실제 산업적 가치 등의 다양한 시각들이 서로 어긋나는 모순적인 시기로 마무리 지어졌다.

산업적 맥락이 만화계 전체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던 가장 극명한 사건은 <드래곤볼>을 필두로 한 일본 만화 직수입 물결3) 이었다. 이전에도 물론 한국만화는 일본만화의 영향을 계속 받아왔고 또한 해적판의 형식으로 많은 유입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문호개방으로 들어온 <드래곤볼>의 히트는 만화의 창작 및 유통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잡지 연재과정에서 단행본을 출간하는 연계 구조가 한층 보편화된 것은 물론, 단기적 상업적 성공을 노린 해적 출판을 엄청나게 성행시켰다. 호호샘 코믹스, 그림터, 구호 등 다양한 해적판 프로덕션들은 기존 해적판 출판사들이 표현수위나 정서적 이질성 등을 우려하여 손대기 꺼려했던 <북두의 권>, <시티헌터> 등 일본의 오락성 높은 대형 인기작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었다. 이것 역시 연속 히트를 기록하자 일본만화 번역출판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정식 라이센스 수입을 하는 잡지 출판사의 경우도 처음에는 단행본 출간을 위해서 먼저 잡지 연재를 거치는 방식을 취하다가, 96년 이후부터는 이러한 물량공세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연재 없이 곧바로 단행본을 출간하는 패턴을 확대해나갔다. 그 결과 만화 단행본의 종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4) , 그 중 일본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약 60%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만화와의 경쟁이 없고 종수가 많은 대본소 만화를 제외한다면 이 점유율은 훨씬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나아가 이에 발맞추기 위한 한국만화의 물량 역시 증가했고, 이러한 붐 속에서 만화는 엄청난 외형적 성장을 거듭하여 만화의 산업적 효용성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90년대 후반 만화시장의 외형적 성장과 관련된 또 하나의 키워드는 도서대여점이다. 대체로 만화단행본은 발간주기와 권당 열람시간이 빠르며, 원가가 낮고 시리즈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 문자서적보다도 대여점의 운영방식과 궁합이 잘 맞는 편이다. 정작 속칭 ‘만화방’이라고 불리우는 대본소들이 유통망의 한계와 문화적 취향의 변화로 쇠퇴를 맞이할 때, 도서대여점들은 실질적인 만화대여점으로 빠르게 전환해 나아갔다. 출판사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독자대상 판매량을 감소시키는 존재이기에 “대여점에서 책을 빌리면 세균이 감염된다”는 논리까지 동원하는 등 90년대 중반까지 노골적인 적대관계를 표명했다. 하지만 단행본 출간 종수의 급격한 증가 속에서, 출판사들은 대여점이 수천부 이상의 초판 물량을 고정적으로 소화해주는 탄탄한 소매시장이라는 점에 착안, 실질적인 공생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즉 대형출판사들을 위주로, 작품의 품질관리나 치밀한 마케팅 기획보다는 종수에 기반한 물량 자체에 집중하는 출판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97년 IMF 금융관리체제의 여파로 많은 실업자들이 저자본 저기술 창업의 출구로 도서대여점을 시작하여, 일시적으로 대여점의 숫자가 급증했던 것 역시 이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대형출판사들은 서울문화사의 서울미디어랜드, 대원의 학산문화사 등, 잡지를 위시한 출판 라인 자체를 확장하기 위한 자회사를 키워냈다.5) 또한 98-99년도 시기에 즈음하여 시공사, 삼양, 대명종 등을 위시한 여러 기존 문자 출판사와 대본소 만화 전문 출판사들이 속칭 ‘코믹스’ 판형으로 불리우게 된 만화단행본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질적 수준 관리를 도외시한 일방적인 외적 성장은 이내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는데, 거품효과 제거 및 출판업 전반의 불황으로 인하여 도서대여점이 감소하면서 실질적인 대여점 공급용 단행본 물량에 의존하던 주류 만화시장 역시 침체국면에 들게 되며 90년대를 마무리했다.

90년대 후반의 움직임으로 특기할 것은 바로 높아진 관심과 사회적 지위 사이의 괴리다. 만화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허황됨으로, 어린 독자들도 흡수하는 포용력이 유치함으로, 빼어난 오락성이 불량함으로 왜곡되어 탄압과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박정희식 문화억압정치의 전형적인 부산물이며, 상당히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70년대 이래로 주기적으로  대대적인 불량만화 소탕 캠페인이 벌어지곤 했는데,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사건을 촉발점으로 하고 그것의 원흉으로 만화를 상정, 도덕적 비난을 집중시키며 사회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이었다. 90년대는 특히 학부모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만화의 물량 증가 및 경쟁적 표현 수위 상승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조직적 담론구성으로는 YWCA의 만화 모니터 활동이 대표적이었다.6)

97년을 뒤흔든 속칭 ‘일진회’ 사건은 조직화된 학원폭력의 원흉으로 만화를 지목하여 오랜 악습을 반복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 결과로서 만들어진 청소년보호법 조례는 이후 만화계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보법은 만화를 청소년 유해 품종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고 있으며, 성인만화로 선별된 작품에 스티커표시를 하고 별도 서가로 비치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도록 정하고 있다. 이것은 만화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산업적으로도 소형 서점에서 만화가 사실상 사라지도록 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나아가 검찰이 이현세의 상고사 환타지 <천국의 신화>를 음란물 유포죄 명목으로 기소하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되어주었다. 수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2004년에 최종 무죄 처리되기는 했지만, 과정상의 직접적 영향으로 성인만화잡지 <<미스터블루>>가 폐간되는 등 이미 위축되고 있던 성인만화 장르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작가, 출판사, 스포츠신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무더기 검찰기소가 줄이었다. 문화산업으로서 육성해야 한다는 당위와 여전히 낮은 사회적 위상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90년대 후반에 연출된 것이다.

높아진 관심과 산업적 불황 사이의 괴리 역시 90년대 말의 모순적 상황을 구성하고 있다. 90년대 후반의 거품호황을 지나서 만화산업의 성장은 명백하게 시장포화점에 도달하고 있었고, 대여점 역시 98년의 11223개소를 기점으로 2000년에는 6200개까지 줄어드는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대형출판사들은 오랜 기간 단행본 물량에 의존하다 보니 새 시장층을 개척해내는 일에 둔감해져 있었다. 이러한 시장 위기는 97년의 사회적 파동과 함께 성인 잡지시장에 먼저 타격을 주었는데, <<미스터 블루>>가 98년 3월 폐간된 이래로 같은 해에 <<트웬티세븐>>이, 그리고 00년에 <<빅점프>>까지 폐간되어 성인용 만화잡지의 명맥이 사실상 끊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업 경쟁은 더욱 강해져서, 신규 사업 진입자인 시공사, 삼양, 대명종 등이 일제히 신규 잡지를 창간했다. 단행본 물량을 성공의 주요 척도로 하는 판도 속에서 잡지는 완성된 상품이라기보다는 단행본 작품들을 소개하는 곳에 불과하다는 ‘팜플렛론’이 지배했고, 건실한 만화출판사로 인정받아 해외 라이센스 취득에 유리해지기 위해서는 여하튼 잡지를 발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업계속설이 맞물린 것이다. 그 결과 99-2000년 사이에 여러 잡지들이 졸속으로 창간되어 이내 사라지는 패턴을 걸었고, 급격한 인터넷 붐 속에서 온라인 만화잡지까지 가세하면서 시장의 형국을 더욱 파악하기 힘든 곳으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혼란은 더욱 가중시킨 것은 바로 원소스 멀티유즈 논리의 도입으로, 실제 산업적 성과를 검증받지 않고도 주변의 투자를 부추키는 특이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만화의 핵심적인 가치를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의 중추역할에서 찾는 이러한 논리는 만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일으키는 장점이 있었지만, 정작 만화예술 자체의 매력을 호소할 수 있는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폐단도 동시에 발생시켰다. 

3. 애니메이션 부흥의 시행착오

90년대는 애니메이션 부흥의 각종 시행착오가 농축되었던 시기다. 80년대 후반 내내 위축되어 있던 극장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는, 91년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시금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문화산업이라는 논리를 업고, 애니메이션은 영화의 대중적 호소력과 캐릭터 프랜차이즈의 산업적 파급력을 동시에 지니는 매체로 조명 받았다. 이에 오랜 일본 하청작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체 작품 제작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 있던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야김찬 자체적 극장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들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90년대 들어서 더욱 현저해진 인건비 상승에 따른 하청 물량 감소라는 산업적 위기감도 작용했다.

90년대의 극장 애니메이션 붐은 새로 발굴한 청소년/성인 관객층에 대한 공략을 목표하며 시작했다. 그리고 95년을 전후로 1차 극장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나서 여러 작품들이 일거에 쏟아졌다. 가장 먼저 개봉한 것은 94년의 <블루시걸>이었는데, 본격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전국 45만명 관객동원이라는 당시기준으로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성인취향의 코드로서 성애와 폭력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첩보 모험물으로, 9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재기라는 상징적 의미를 평가받아 서울정도 600년 타임캡슐에 안장되는 영예도 누렸다. 하지만 작품의 품질은 이야기 영상 연기 등 전 부문에 걸쳐 매우 조악한 수준에 불과하여, 졸속 기획과 화려한 마케팅으로 관객을 우롱했다는 악평을 들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90년대화된 청소년 취향을 노리고 등장한 <돌아온 영웅 홍길동>, <헝그리 베스트5>, <협객 붉은매>, <슈퍼차일드> 등이었는데, 모두 타겟층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소품으로 단명하고 말았다.

90년대 극장판 중 가장 주목받았던 프로젝트는 바로 <아마게돈>으로, 이현세/야설록의 인기 청소년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었다. 개봉시기는 96년으로 가장 늦었지만 실제 기획은 가장 먼저 공개되어 관심을 집중시켜왔던 작품으로, 인류의 기원과 우주문명, 지구의 멸망을 구원하기 위해서 미래로 파견되는 초인이라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가 담긴 SF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다. 제작이라는 측면에서도 선녹음 작업, 컨소시엄식 투자 유치 등 여러 선진적인 시도를 하는 등, 기대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오히려 이야기 구성이라는 기초적인 부분에서 심각한 난조를 보이며 실망을 자아냈고, 따라서 개봉 성적 역시 초라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기대를 자아냈던 첫 번째 극장판 애니메이션 붐은 실패했다.

1차 붐의 실패 이후, 대상연령층을 대폭 낮춘 작품들로 96-97년간 다시금 여러 시도들이 집중되었다. 반응도 작품 완성도도 가장 양호했던 것은 96년의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이었는데, 인기 캐릭터와 탄탄한 이야기구성이라는 핵심을 지켰기에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다. 나아가 <아마게돈>을 제외한 이 시기 개봉작들이 대부분 일본인 스텝에 의해서 제작되었던 것에 비해서 순수 국내제작 작품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동영화에 대한 극장가의 지분 자체가 사실상 소멸되어있던 90년대 중반 영화계의 상황과 맞물리며, 제한적인 성공에 머물렀다. 이후 교훈적인 내용의 위인전이라는 컨셉으로 <난중일기>가 개봉되었고, 7-80년대를 풍미한 김청기 감독이 들고 온 <왕후 에스더>와 <임꺽정> 등이 이어졌다. 물론 반응은 지극히 미미했으며, 작품의 완성도 역시 아무리 아동 대상이라도 90년대의 취향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착오에 가까웠다. 대기업의 투자로 화제를 모았던 <전사 라이언> 역시 비슷한 결과만을 냈다. 80년대처럼 방학철 이벤트로서 고정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90년대적 문화 취향을 풍부하게 제공해주고 있는 여타 극장 영화 일반과 경쟁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한겨레신문 시사만화로 유명세를 떨친 박재동의 야심찬 프로젝트 <오돌또기>가 닻을 올렸으나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표류하게 되는 등, 여러 기획들이 결국 기획에 머무는 모습을 보였다.
 
TV의 경우는 아동이라는 고정 시청자층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80년대 후반의 기조를 이어받아, 90년대에도 KBS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계속했다. 1주일에 25분짜리 1편이라는 많지 않은 시간배정이었으나, 국산 TV 애니메이션이 시청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귀중한 통로였던 것이다. 89년 <원더키디>의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둔 무국적성이 국내 반응 미진 속에 침몰한 뒤, 배추도사 무도사라는 한국적인 캐릭터들이 전래 동화를 들려준다는 내용의 <옛날옛적에>로 이미지를 회복하였다. 이후에도 유명 한국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시리즈물 <영심이>, <날아라 슈퍼보드>, <사랑의 학교> 등이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서유기를 모태로 한 현대적인 환타지 모험물인 허영만 원작 <날아라 슈퍼보드>는 아동층의 강력한 호응 속에 이후 3개 시리즈가 더 만들어지는 인기를 누렸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을 ‘사오정’이라고 부르는 문화적 유행까지 탄생시켰다. MBC는 이두호 원작 <머털도사>의 성공 이래로 연재물보다는 특집방송용 장편 작품에 집중, <머털도사> 연작, <장독대>, <요정핑크> 등 여러 작품들을 활발하게 제작했다. 90년 개국한 SBS는 기본적으로는 최신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입에 주력했지만, 자사 마스코트를 주연 캐릭터로 삼은 입체 애니메이션 <빛돌이의 우주 2만리>를 통해서 야심찬 자체제작의 첫발을 딛었다. 하지만 극장판의 붐 속에서 TV시리즈 역시 상대적인 축소를 겪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극장판들의 연이은 실패로 애니메이션 전반에 대한 투자가 감소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케이블 TV의 개국과 애니메이션 전문채널 투니버스의 도입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했다. 하지만 투니버스의 야심찬 기획인 SF환타지 <영혼기병 라젠카>는 역시 스토리상의 난맥상을 드러내며 시청자들과의 교감에 실패하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와중에서 틈새 시장을 노린 것이 바로 비디오 전용 애니메이션(OVA)이다. 양영순의 동명 코믹 에로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누들누드>가 그것으로, 98년 출시되어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성인용 에로 애니메이션이 일정한 지속적인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7) 

90년대 애니메이션 환경의 또 다른 특징은 기술적 혁신이다. 오랜 하청작업으로 축적된 전통적 원화 및 동화 작법에 대한 노하우와 더불어,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다양한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특히 3차원 기법의 경우 전통적인 2차원에 익숙한 일본보다도 먼저 일정 숙련도에 올라서는 등 각광받았다. 이것은 특히 저예산 작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여 교육기관 등을 통한 일련의 독립작가군의 등장을 독려했다.

4. 향유 환경의 진화

80년대는 대중문화가 부흥하기는 했지만, 획일적으로 주어진 몰취향적인 집단 유행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은 87년 민주화와 88년 올림픽을 통한 국제적 감각 개방을 계기로 하여 급격하게 바뀌어 나아갔고, 90년대의 문화수용자들은 다양한 개별적 취향들을 능동적으로 주장하는 향유자로 진화했다. 애초부터 독자와 가까운 거리를 자랑하던 만화라는 분야에서, 향유자의 권한 확대는 창작 및 생산 양식 자체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소년향 만화 잡지에서 편집시스템에 대한 독자 목소리 반영 확대가 하나의 예다. 물론 80년대에도 잡지에서 독자 엽서 집계를 통해서 인기순위를 책정하는 일은 있었지만, 경쟁이 심화되고 작가군이 다양해진 90년대에 작품의 지속과 중단에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이것은 주간이라는 빠른 발간주기, 공모전을 통한 신인등용, 잡지 내 완전 경쟁 시스템 등 본격적인 일본식 잡지 편집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대의 대중문화 현상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움직임 역시 확연해졌다. 특히 작가군의 연령이 한층 내려가며 독자들과의 동세대성이 증가하면서, 또래 취향문화에 대한 작품 내 참조와 반영이 긴밀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성작가군 역시 이들과의 경쟁을 위하여 앞 다투어 그런 소재들을 다루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연재만화 전반에 동시대 대중문화적 유행이 고르게 반영되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작가데뷔를 하여 일본 대중문화 흡수를 포함, 가장 동세대적인 감수성을 그려냈던 이명진의 <어쩐지… 저녁>의 경우는 당연하거니와, 중견작가 김영하의 전방위 대중문화 패러디물 <짬보람보>만 보더라도 불과 수년전에 <펭킹라이킹> 같은 전형적인 80년대식 명랑만화를 그린 작가의 것이라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만화를 통한 소통경로 자체가 확대 및 세분화된 것 역시 취향의 반영이다. 80년대의 대표적인 만화전문지 <보물섬>만 해도 순정 지향 만화, 소년향 만화, 명작동화류 만화 등이 하나의 지면에 혼재되도록 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연령별로도 청소년 지향인 것과 아동 지향인 작품들이 구비되어 있는 종합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향 독자에게 특화한 <아이큐점프>, 순정향으로 특화한 <르네상스> 등의 창간은 이러한 판도를 일거에 바꾸었다. 성별, 연령별 취향에 따른 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쪽이 독자 동원 및 결속에도 더 효율적이라는 점을 깨달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판세 변화 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기존 ‘종합지’들이 하나씩 폐간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것은 독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만화를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장르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철저하게 벽을 쌓게 되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단점은 이후에 취향의 과잉세분화와 만화문화 전반의 매니아화라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취향의 전체적 발달에는 일본만화의 공식적인 영향력 역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주류 만화계는 80년대를 거치면서 극심한 잡지간 경쟁 속에 다양한 세부 취향 장르와 효율적 장르공식을 창조해낸 바 있다. 그리고 정식본과 해적판을 아우르는 일본만화 수입의 물량공세 속에서 독자들의 눈높이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안목이 까다로워졌으며 취향 역시 급격하게 세분화되어 갔다. 특히 90년대 초창기에는 정식본보다 해적판의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500원이라는 낮은 가격에 문구점 유통을 한 소형 판본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8)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일본만화에서 개발시킨 ‘웰메이드’ 장르규칙들을 먼저 도입해내는 국산 작품들이 큰 인기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일본식 학원 폭력물, 속칭 경파물 캐릭터들의 구성원칙을 효과적으로 도입한 이명진의 <어쩐지… 저녁>과 박산하의 <진짜 사나이> 등이 단행본 판매 누계 100만부를 돌파했고, 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소년만화의 격투형 대결구조를 무협 장르의 틀에 맞추어 넣은 소주완/지상월의 <협객 붉은매> 역시 가담했다. 따라서 장르규칙과 동세대 취향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겸비하기 유리한 젊은 작가층이 부각되었고, 공모전의 도입은 그것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었다.

취향과 안목으로 무장한 독자들은 스스로 커뮤니티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 먼저 주목할 부분은 아마투어 창작 커뮤니티인데, 80년대 후반~90년대 초 무렵에 지역 및 학교 단위의 만화창작 동아리들이 번창했다. 특히 취향별로 분화된 잡지들은 독자 홍보란을 통해서 이들의 인력모집과 홍보에 있어서 좋은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또한 “90년대의 순정 스타들은 모두 <르네상스> 독투란에서 데뷔했다”는 속설이 생길 정도로, 독자투고란에서 그림실력을 자랑하던 이들이 수년 후 정식으로 데뷔하는 현상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나아가 동호회 PAC 출신인 강경옥의 경우처럼 80년대 유명 동호회 활동을 거친 작가들이 프로로 데뷔해서 두각을 나타내자 동인 창작에 대한 관심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 결과 90년대에는 소년향 만화, 순정만화를 불문하고 동호회 출신 인력들이 폭넓게 판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의 결속력 역시 강화되어, 80년대에는 ‘크레파스연합’ 등의 이름으로 소규모 연합체를 이루며 활동하는 것에 그쳤던 것에 비해 89년에 전국규모의 정식 연합회인 ACA(아마투어 만화인 연합)이 결성되어 정기적 회지 판매전과 축제행사를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90년대 들어서 PC통신과 함께 더욱 활성화되었다.

나아가 독자들은 결코 창작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향유 일반에 대해서도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이들은 신간 정보, 작품 감상, 해외 동향, 각종 도서자료 등을 폭넓게 교환하며 향유자의 힘을 키웠다. 이전에 학급 내, 기껏해야 학교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정보교류는 PC통신의 붐과 함께 전국 차원으로 퍼졌는데,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주류 PC통신 서비스회사는 물론 각종 사설 BBS에서도 만화 애니메이션 향유 커뮤니티는 확실한 인기 아이템이었다. 만화는 지극히 대중적이면서도, 접근방식에 따라서는 상당히 매니아 성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등 취향 기반 대중문화로서의 속성이 강하다. 또한 주류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영역이 적기 때문에, 광범위한 정보 공유와 세밀하게 취향별로 분화된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초창기 PC통신인들의 성향과 잘 부합했건 것이다. 이들은 온라인 정보공유와 오프라인 상영회를 통해서 커뮤니티성을 키워나갔고, 이 과정에서 전문적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규합되는 경우도 발생하여 90년대 후반 이후 업계에서 평론가나 기획자로 활약하는 이들도 다수 등장했다. 초창기의 온라인 동호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일종의 얼리어댑터 역할을 하며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의 수요층에 대한 중요한 참조자료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야에서 매니아층의 질적 수준이나 시장의 양적 규모를 과대평가 하도록 만든 단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또한 초창기의 향유정보 공유 차원에서 벗어나, 90년대 말에는 불법 복제 자료의 공유가 급증하여 오히려 산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증가했다.

취향을 지켜내고 보장받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행보 역시 이들을 통해서 촉발되었다. 90년대 말 이후, 독자들이 업계와 정책추진에 직접적인 발언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TV 애니메이션 방영시간 이동 운동, 극장 애니메이션 재개봉 운동, 절판 도서 재판 서명운동, 관련법 재편 촉구 등 다양한 활동이 이어졌다. 정작 업계가 해내지 못한 부분에 향유자들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선 것인데, 이러한 경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또한 향유 방식 역시 더욱 포괄적으로 변모하여, 좋아하는 작품 및 취향을 바탕으로 한 동인 창작, 캐릭터 분장(‘코스프레’), 팬시물품 제작 유통 등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5. 관련정책과 기관의 범람

우선 만화 심의제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90년대의 시작은 여전히 암울했다.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는 89년을 기점으로 이전의 법정기구에서 민간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바 있으나, 여전히 사전심의를 실시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만화 전 분야에 걸쳐서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당시의 핵심 판단기준이었던 89년도의 실천요강은 “만화를 아동의 인격과 개성 도야에 공헌을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명문화시켜놓았다. 심지어 “만화가 아동에게 아무 보탬을 줄 수 없는 저질 또는 무가치한 내용이어서는 안되며, 작가는 저급한 필명을 쓰면 안된다”고 세세하게 잡아주고 있을 정도다. 만화 내용에 대한 내용분석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서 이러한 움직임에 실체적 근거를 제공해준 것은 YWCA 청소년 유해환경 감시단 등 시민운동 진영이었는데, 이들과 대립하며 만화의 위상을 회복시켜줄 체계적인 운동은 세력이 미약했다.

만화의 물량은 늘어나고 향유층의 안목이 달라졌으며, 산업적 관심 역시 증가하여 담론과 실제의 괴리가 커지고 있던 차에, 97년 ‘일진회 사건’을 계기로 청소년 보호법9) 이 발효되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사전검열은 사후심의제로 바뀌고 간륜은 법정기구로 복귀했으며, 성인만화 판단 여부는 작가 자율에 우선적으로 맡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용 만화에 대한 소매 차원의 제한 규정이 강력해지고, 성인용을 표방하지 않았으나 사후심의에서 성인용으로 규정되어버릴 경우에 대한 불이익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으로 만화 창작과 유통 자체를 심각하게 경색시켰다. 제도 도입 초창기의 우려와는 달리 간륜에 의하여 성인만화로 사후 규정되거나 아예 ‘청소년 유해물’로 낙인찍히는 경우는 제한적이었지만, 창작 상황을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저작권 측면에서 90년대는 암중모색의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문화산업논리, 특히 원소스 멀티유즈 개념이 적극적으로 주창되면서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어떻게 활용되고 어떤 이익을 낳는지에 대한 폭넓은 고민을 해야 했다. 잡지 고료를 받고 혹시 단행본으로 만들어질 때 약간의 작업비를 더 얻어내는 정도에 그쳤던 주먹구구식 관행과, 종합 문화산업적 저작권 라이센스 산업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저작자의 허락 없이 특정 작품과 캐릭터를 팬시사업에 활용하는 경우에 대해서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온라인 만화방의 저작권료 지급 문제도 점화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일찌감치 캐릭터 프랜차이즈에 입문한 <아기공룡 둘리>는 ‘둘리나라’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저작권 사업 개념을 서둘렀고, 개인, 단체, 사업체 차원에서의 움직임들이 뒤따랐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2000년대에 발생하게 될 각종 저작권 개념 재정립의 중요한 기틀이 되어주었다.

지원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 제작 지원 사업의 도입이 가장 특기할 만 하다.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체들은 문화콘텐츠 산업의 부흥을 위하여 가장 가시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지원사업들은 크게 창작 지원을 위한 공간 및 설비 임대, 그리고 직접적인 자금투자 등으로 이루어졌다는데, 이러한 취지에서 98년도에 부천시가 부천 만화정보센터를, 99년도에 서울시 산업 진흥재단이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를 설립했다. 98년에 문화체육부에서 문화관광부로 재구성된 문광부 역시 문화상품과(현 문화콘텐츠 진흥과)라는 부서를 통해서 직접적인 지원책을 강구해나갔다. 그리고 2000년에 재단법인 문화콘텐츠 진흥원을 설립하여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특히 부천시의 경우는 지원기관으로서의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설립함과 동시에 만화도서관 건립, 프랜차이즈 사업을 육성하기 위한 사업체인 PCN 등 다각도로 만화 애니메이션 지원에 투자하여 ‘만화도시’라는 도시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만화계와 공공기관 양측의 전문성, 일관성, 지속성의 문제가 빈번하여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지원정책과 사회적 관심의 또다른 형태는 바로 축제 행사다. 90년대 후반은 실로 행사들이 난립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급증했다. 서울시에서 주최하여 95년 시작된 서울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를 필두로, 97년 동아 엘지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DIFECA)와 춘천 만화축제(CAF) 등이 생겨났다. 또한 98년 말 설립과 동시에 부천 만화정보센터 역시 부천 만화축제(BICOF)를 개최했고, 나아가 이듬해에는 부천 학생 애니메이션 페스티벌(PISAF)를 별도로 개최하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행사들은 만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난립에 따른 중복과 행사 내실의 전문성 부족 등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면모도 보였다. 공모전 역시 활성화되어, 각 잡지사의 신인공모전은 물론 스포츠조선 등 신문사의 카툰 중심 공모전, DIFECA 공모전이나 신한은행의 ‘새싹만화상’ 등 민간 스폰서 역시 활성화되었다. 91년부터 8년간 실시된 스포츠서울의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 역시 이 시기의 만화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이외에도 발표된 작품 가운데 수여하는 출판만화대상 등의 시상식 역시 도입되었다.

이러한 붐과 밀접하게 연관된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전문 교육기관의 증가다. 최초로 만화관련 개학 학과가 생겨난 것은 90년 공주문화대학이었으나, 90년대 중반 이후 지방 사학 설립 붐 및 문화산업 논리에 따라서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결과 99년 당시에는 4년제 14개, 2년제 17개 학과가 집계되었고10) , 일반 미술 대학에서 만화관련 전공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모두 포함시킬 경우 약 100여개까지 달한다는 비공식 통계도 나왔을 정도다. 나아가 애니메이션 특성화 고등학교 설립계획까지 진행되어, 2000년 하남시에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물론 이들 중 대다수는 애니메이션 기술, 즉 움직임을 창조하는 영상기술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실제 장르문화예술로서의 만화/애니메이션을 엄밀하게 다루는 학과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히 만화 전공의 경우 사실상 10여 곳에 지나지 않았으나 11), 이 분야에 대한 사회적 인식 향상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급격하게 불어난 학과 수에 비하여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미비하고 전문 교육 인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누적되었다. 출판문화인 만화와 영상문화인 애니메이션 교육을 무리하게 묶어서 병행하는 폐단은 물론, 학문적 교수능력보다는 창작계와 응용미술학계의 명망을 척도로 교수진을 꾸리는 등 한계가 작용한 것이다. 게다가 산업적 거품의 제거로 인하여 장기적 진로 역시 불투명하여 90년대 말을 지나면서 애니메이션 학과는 영상 기술 분야로 다시 전문화하고, 출판만화 관련 학과나 커리큘럼은 장기적 침체 국면에 빠지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90년대의 혼란스러우면서도 활발한 움직임 속에서, 각종 이익단체 역시 다양하게 조직화되었다. 우선 작가 단체로서는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만화가협회(만협)와 신생 우리만화연구회(우만연)가 양대 체제를 구축했다. 우만연은 88년 설립된 민중문화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바른만화연구회의 연장선으로, 만화 및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주가 되고 평론가, 제작자 등을 아우르며 92년도에 우리만화협의회로 출범했다가 95년 현재의 모습으로 확대 개편했다. 이들은 이후 각종 공공 행사에서 만화계를 대표하는 자격을 부여받았는데, 90년대 초반의 활발한 담론 활동과는 달리 중반 이후에는 다소 침체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97년 만화탄압에 대한 비상대책위원회 운동에서 드러나듯이 작가 권리에 대한 조직적 대응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대두되었는데, 그 결과 같은 해 젊은작가모임(젊작모)과 한국여성만화가협회(여만협)가 설립되었다. 제작자들 역시 90년대 들어서 만화애니메이션제작가협회, 잡지만화출판인협회, 한국만화출판인협회, 만화방 업주들의 모임인 만화진흥공동협의위원회 등 다양한 단체를 결성했으며, 학술 분야에서도 한국만화문화연구원12), 만화평론가협회,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등이 90년대 후반을 장식했다. 단체들의 실제 내실에는 편차가 있었지만, 실로 다양한 단체들이 활기찬 실험을 거듭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III. 90년대의 작품 경향

1. 소년만화: 90년대의 축소판

소년 취향의 만화로서 내용이나 장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은 50년대에 개별 장르들이 분화된 이래로, 60년대의 <라이파이>, 70년대의 <주먹대장>, 80년대의 <곤충소년>등 사실상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러나 여기에 확고한 작가군과 특유의 생산 시스템, 그리고 소비문화가 더해져서 본격적인 소년만화라는 장르가 형성된 것은 전용 지면이 생겨난 88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아이큐점프>>의 창간과 함께 거물급 대본소 및 기존 잡지 작가들이 소년만화잡지 진출을 시도하였고, 이현세의 <아마게돈>, 이상무의 <제4지대>, 허영만의 <망치>, 황미나의 <슈퍼트리오> 등 다양한 인기작을 남기게 되었다. 이로서 일본식 잡지연재 소년만화의 체계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일본식 잡지형태를 띄고 있었지만 그 내용물은 한국 기성작가들의 만화만으로 채워졌다. 따라서 청소년들을 위한 잡지 연재식 대본소 만화 같은 냄새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만화들은 상당한 인기를 얻으며 나름대로 적응에 성공했다고 평가될 수 있지만, 이후 세대교체의 바람까지 버티지는 못했다. 세대교체의 첫 번째 시도는 대본소 도제 시스템을 거쳤지만 일반적 연고서열을 깨는 파격 데뷔를 하는 방식으로, 김준범/노진수의 <기계전사 109>등의 사례를 남겼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89년 12월, 일본만화 <드래곤볼>의 연재가 시작하고 폭발적 인기몰이를 하면서 생겨났다. 이로서 한국 소년만화 잡지가 일본만화 연재를 통해 상업적 기반을 확립하는 방법론이 확립되었는데, 91년도 창간된 <<소년챔프>>에서 더욱 세련된 방법으로 승계되었다. 애니메이션 및 아동영화 제작사였던 대원동화가 출판만화시장에 진입했고, 초기의 짧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이내 주류 만화계를 양분하는 서울과 대원의 양강 구도가 명확하게 갖추어졌다.

92~96년은 새로운 작가세대가 속속 데뷔하는 소년만화의 중흥기였다. <어쩐지…저녁>, <협객 붉은매>, <진짜 사나이> 등 일본소년만화의 장르적 법칙들과 어법을 과감하고 태연하게, 마치 밥을 먹고 호흡하듯이 구사하는 작가군이 등장한 것이다.13) 이들은 대본소의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채 사춘기 시절 자연스럽게 일본만화를 호흡하고 자유롭게 친구들과 만화를 그리고 돌려보던 소년들이었으며, 자신과 비슷한 연령이거나 혹은 약간 더 어린 소비자들의 욕구와 취향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기존 한국만화 장르와의 퓨전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예를 들어 이충호의 <마이러브>는 일본 소년만화풍 캐릭터 러브 코미디로 시작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명랑만화의 모험 컨벤션을 기반으로 하는 전혀 다른 장르로 전환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장르 가운데 하나는 또래문화를 다루는 학원물이었는데, 기존의 한국식 학원물이 갇혀있던 연애물과 ‘얄개전’류 학교 미담의 틀을 과감하게 깼다. 격투에 의한 세력싸움이라는 조직폭력물의 문법을 학교사회로 적용시킨 작품들이 등장했고, 대결과 성장이라는 모티브 덕분에 동세대 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가상 세계의 대형 서사극 역시 다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요구가 잘 짜여진 치밀한 세계관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고, 장편 이야기가 주는 매력이 여전히 컸기 때문이다. 하나는 톨킨(J.R.R. Tolkien)식 세계관을 응용한 대하 환타지인데, 주역의 8괘 사상을 톨킨식 환타지 세계관과 결합시킨 박성우의 <팔용신전설> 등이 이에 속한다. 무협물 역시 이러한 발전방향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재학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무협만화가 원한과 복수에 의한 인생무상을 다루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의 속칭 신무협은 다양한 캐릭터들의 끝없는 결투와 성장이라는 모티브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소주완/지상월의 <협객 붉은매>, 양재현의 <열혈강호>와 문정후의 <용비불패> 등이 이 경향의 대표적인 주자들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90년대 중반까지를 아우르는 이 시기에는 다양한 소재와 장르들이 중구난방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롭게 도입되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완성도에 대한 독자들의 수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거꾸로 서영웅의 <굿모닝 티쳐>, 권가야의 <해와 달> 등 장르의 틀에서도 다소 이례적인 방향으로 파격을 시도하는 경우 역시 나타났다.

90년대식 소년만화의 이야기진행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바로 캐릭터성의 강화다. 즉 드라마를 끌고 가는 두 가지 원동력인 사건 자체의 발생과, 그러한 사건에 대처하는 각 캐릭터들의 반응양식 사이에서 후자의 비중이 이전보다 더 커졌다는 말이다.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 전형성 또는 몰개성을 통해서 독자들의 범용적 이입을 이끌어냈던 이전 시대의 만화와 달리, 자신들의 취향 추구에 솔직해진 90년대 소년들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독특한 성격의 캐릭터들의 행동들이 서로 엇갈리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 원동력으로 부각되어 소위 ‘캐릭터 드라마’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90년대 중반을 넘어서고 세대교체가 완전히 이루어지면서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96년의 <짱>과 92년의 <진짜사나이>의 감수성 차이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90년대의 소년만화는 시각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이전 세대와 가장 급격한 차이를 보였다. 미형 캐릭터에 대한 강한 집착, 세밀하고 깔끔한 장면연출 등의 기본적인 요소는 차치하고서라도, 연출의 바탕에 있는 정서적 욕구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다. 90년대의 경험은 소년 독자들이 원하는 것이 단순한 노출이 아닌 성적 상상력에 대한 자극이라는 것을 드러냈고, 단순히 폭력적인 장면이 아닌 화려한 승부묘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관음증적 시선 연출, 스타일리쉬한 격투 묘사가 크게 발달했다. 특히 다소 고연령층의 소년만화 독자들을 노리고 94년 만들어진 <<영점프>>, <<영챔프>>는 한층 높은 수위의 자극적 표현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각연출의 완성도를 본격적으로 추구한 형민우의 <프리스트>(<<소년챔프>> 연재), 양경일/윤인완의 <아일랜드> 등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시도는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점차 감소, 뚜렷하게 인기가 검증된 학원폭력물, 퓨전 무협 환타지, 스포츠물 등 일부 장르로 독점현상이 일어났다. 문제는 이러한 장르들이 감수성 면에서 그다지 일본 만화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급진전하다보니 일본만화 수입량의 폭증과 함께 한국 소년만화의 자체적 창작역량이 급격하게 고갈되어 갔다. 나아가 대중 오락문화에 있어서 컴퓨터 게임과의 불리한 경쟁이 확대되면서 소년만화는 장르적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김수용의 <힙합>, 임재원의 <짱> 등 대결과 성장의 재미와 동세대 한국 소년들의 현실을 조율해가면서 중용의 미덕으로 히트를 기록한 경우도 끊이지 않았지만, 대세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또 다른 문제는, 취향 세분화의 과잉이었다. 일본 작품을 위시하여 지나치게 많은 작품과 장르들을 접하면서, 소년만화 작품들의 내용은 지나치게 장르 내적인 클리셰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취향의 매니아화는 신규독자들의 진입을 막는 것은 물론 장르 동종번식을 통하여 점차 부실한 서사구조와 공식화된 캐릭터 구성이라는 폐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소년만화의 동력을 다른 방식으로 재건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는데, 대본소 만화 특유의 저밀도 전개와 소년만화 문법을 결합시켜서 대여점 중심으로 히트를 기록한 김성모의 <럭키짱> 등의 상업적 성공사례도 남겼다. 다른 방향에서는 동인지 창작 문화를 바탕으로 소년만화 감수성에 익숙해진 여성만화가들의 소년만화계 진출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도 했는데, <굿타임>의 김은정, <천녀강림>의 유현 등이 대표적이다.

만화계 주류로 자리잡은 소년만화의 불황은 한국 만화계 전반의 불황이라는 위기의식으로 연결되었다. 소년만화는 90년대라는 기간동안 생성부터 노쇠까지 모든 단계를 빠르게 거쳐지나간 독특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2. 순정만화의 힘

90년대 초의 순정만화는 대본소용 단행본과 순정만화 잡지라는 두 양식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80년대 후반을 풍미했던 대본소용 단행본은 주로 대하 서사물의 호흡을 가진 장편 연재물이었고, 여기에 잡지만화를 통해서 도입되기 시작한 단편과 옴니버스 구성의 작품들, 특히 학원물이가세한 것이다. 먼저 순정 대하서사물의 경우 드라마틱한 세계관과 주연 캐릭터들 사이의 감성적 관계 진행이 맞물리면서 완성도 높은 서사를 추구했는데, 80년대 후반 동안 축적된 역량이 90년대 초 화려한 전성기로 돌입했다. 하지만 90년대는 순정만화가 대본소에서 잡지로 넘어오는 시기로,  90년 강경옥의 <별빛속에>와 김혜린의 <비천무>, 그리고 뒤이어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가 완간되면서 대본소 작품의 시대가 실질적으로 끝나갔다. 따라서 순정 대하서사물 역시 대본소용의 호흡에서 잡지 연재용 작품의 호흡으로 변화했다. 92년 <<댕기>>에서 연재를 시작한 김혜린의 <불의 검>과 김진의 <바람의 나라>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90년대 순정 대하서사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두 작품들은 내용면에서 한국 고대사를 재해석하며 환타지적 요소를 첨가하는 방식을 통해서 80년대 순정 대하서사물이 지향했던 서구적 세계관과 차별점을 나타냈으며, 또한 잡지연재라는 호흡에 맞추어 철저하게 연재 챕터 및 단행본 단위로 극적 전개의 완급 조절을 하는 능란한 구성을 선보였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이후 80년대 데뷔 작가들이 90년대 세대들과의 동세대적 감수성에서 한계를 드러내면서 점차 순정 대하서사만화의 맥이 옅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순정만화 잡지는 연령별 세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동호회와 매니아층을 노린 <<펜팬>> 등 세부 취향 잡지도 시도되었다. 순정만화잡지의 본격적인 90년대적 구도는 93년 <<터치>>와 <윙크>>의 창간에서 확립되었는데, 이후 세대가 이전 세대를 완전히 밀어내다시피 한 소년만화의 90년대와는 차이점이 확연했다. 대원의 <<터치>>는 소년만화잡지 <<소년챔프>>의 경험을 계승하여 <아기와 나>, <내 사랑 앨리스> 등 유명 일본 소녀만화와 신인작가들로 승부수를 던진 반면 서울문화사의 <<윙크>>는 이은혜의 <BLUE>, 신일숙의 <리니지>, 강경옥의 <노말 시티> 등 지명도 높은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간판으로 걸었는데, 커뮤니티 충성도가 높았던 순정만화 독자들은 <<윙크>>지에 더 좋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94년 <<르네상스>>가 기존 작가진의 이탈을 견디지 못하고 폐간되면서 잡지구도의 백가쟁명은 사실상 잦아들었다. 96년 <<댕기>>의 폐간은 이러한 흐름에 있어서 확인사살에 불과했다.

90년대에는 또래의 동세대적 생활을 공감할 수 있도록 묘사한 학원물이 부흥했는데, 잡지연재가 주도적인 형식이 되면서 여학생들의 순정만화 독서공간은 대본소가 아닌 학교, 집 등 사적 공간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잡지의 넓어진 데뷔경로를 통해서 순정만화계에서도 새로운 감수성의 신인 작가군이 급부상하게 되었고, 하나의 주류를 형성했다. 특히 93년도에 <<윙크>>에서 데뷔한 나예리, 박희정, 유시진 등이 대표적인 경우로, 강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성찰적 작품들을 구사했다. 나예리의 <네멋대로 해라>(93), 유시진의 <쿨핫>(96)은 학원물의 형식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지닌 서로 섞이지 못하는 강한 자의식 사이의 거리감을 묘사하고 있으며,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95) 역시 친절하지만 주변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신비한 캐릭터들의 서로 다가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러한 감수성은 90년대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여 탄탄한 팬층을 구축하도록 해주었다.  96년 발표된 천계영의 <언플러그드보이> 또한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이야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0대들의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문화적 감수성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지나친 자의식의 고민보다는 멋있는 캐릭터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방법론을 구사했던 것이다. 후속작 <오디션>은 이 방법론을 한층 더 세련화시켜서 당대 순정만화계의 최고 히트작으로 군림하게 만들었다.

순정만화의 연출경향에 있어서 90년대적 변화는 더욱 감각적인 이야기진행과 시각구성을 의미했다. 수려한 문체와 주관적 정서의 흐름을 극대화하는 것에 집중한 80년대 데뷔 작가들 특유의 대하서사 작품들과는 달리, 90년대 데뷔 작가들은 세밀한 배경묘사와 화려하고 감각적인 칸 편집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또한 이전 순정만화의 대표적 이미지인 과장된 포즈의 호리호리함보다는, 전체적으로 스타일리쉬한 분위기가 풍기는 쪽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전혀 다른 필체에도 불구하고 이은혜의 <BLUE>와 천계영의 <오디션>의 성공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이러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극 진행 역시 중추적 서사보다는 개성적이고 자의식 강한 캐릭터들의 조합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상을 전개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97년 잡지 <<나인>>의 창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인>>은 이미 순정만화의 문법에 익숙한 채로 성장한 성인 여성층14)을 타겟으로 삼으며 주류와 비주류, 신인과 중견을 아우르는 고품질 지면을 지향했다. 잡지 <<MiX>> 등을 통해서 페미니즘적 자의식을 드러낸 바 있는 이진경, 이애림 등의 작가는 물론, 이강주, 한혜연, 문흥미 등 90년대 중반을 관통하는 쿨한 감수성의 작품들을 발표한 작가들 역시 여기에서 빛을 발했다. 나아가 최인선, 이향우 등 비주류적 감성의 소유자들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이진경의 <사춘기>, 이강주의 <캥거루를 위하여> 등 이 시기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이외에도 90년대 말에는 김미영, 석동연 등 유희 능력을 강화한 작가들이나 권교정, 박은아, 서문다미 등 서사 화법을 다시 강화한 세대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나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말 순정만화 전반의 흐름은 저연령화로 가고 있었으며, 순정만화가 소녀들의 문화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순정만화의 장르적 취향에 대한 강한 충성을 보이는, 속칭 야오이물 등으로 대표되는 매니아 지향 문화가 새롭게 부각되며 90년대가 저물었다.

3. 성인만화의 분투

성인만화는 그간 이 장르를 지탱해주었던 대본소의 점차적 쇠락과 함께 90년대를 맞이했다. 박봉성에서 개화하고 이현세가 제패한 80년대식 대본소 극화의 특징은 비극적인 영웅의 비장미였는데, 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같은 캐릭터, 같은 이야기구조로 소재만 바꾸어나가는 노쇠현상이 뚜렷했다. 오혜성-마동탁-엄지의 삼각관계가 스포츠, 기업경영, 조직폭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없이 반복되었고, 종국에는 SF를 표방한 오컬트 소재까지 다루었으나 여전히 장르적 완성도보다는 단순한 소재차용에 그쳤다. 이러한 환경에서 80년대를 지탱한 두 거목 가운데 한명인 이현세는 <엔젤 딕>, <남벌> 등을 통해서 기존의 작품 정서에 90년대적 취향의 에피소드들을 삽입하며 적응을 꽤했고, 허영만은 대본소용 만화생산을 접고 소재면에서도 비장한 비극보다는 트렌디 드라마 방향으로 전업하여 <아스팔트 사나이>, <미스터큐>, <비트> 등 새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적 영웅담이 가장 잘 통용되는 장르인 무협물 이외에는 박봉성 등 극히 소수의 작가들만이 대본소용 만화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다가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외로 신문지면이 성인만화의 새로운 수용공간이 되어주었다. 90년 스포츠조선의 창간과 함께 신문들은 이현세, 허영만, 이두호 등 대본소와 잡지계의 인기 작가들을 유치하여 경쟁구도에 들어갔는데, 이들의 작품은 일반 도서 4-6개 페이지씩 추려서 신문지면에 펼쳐놓는 방식으로 개제되었다. 덕분에 90년대 초반의 스포츠신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만화들이 겸비되었다. 이두호의 <임꺽정>, 허영만의 <아스팔트 사나이>,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 등 성인 남성 취향의 선 굵은 영웅 드라마들이 가장 큰 인기를 모았고, 배금택, 강철수, 고우영 등 성인 해학의 대가들이 펼치는 소소한 인간사에 대한 관찰이 굳건하게 기반을 다져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으로 인하여 성과 폭력의 표현수위가 상승,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부작용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공격적 민족주의의 정서를 담은 이현세/야설록의 <남벌>의 대성공으로 상징되듯이, 신문연재 성인만화는 확실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15)

대본소 의존에서 벗어난 성인만화의 90년대 체질변환은 성인만화잡지 <<미스터블루>>의 창간으로 완연한 성공을 자축했다. 이 잡지는 <<만화광장>>의 폐간 이후 뜸했던 성인잡지의 인기를 부활시키고자 이현세, 이상세, 허영만, 황미나 등 성인 만화의 주요 명망가들이 투자하여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중견들의 잡지 연재공간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인 취향 만화를 그리고자 하는 신인들의 등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90년대 최고의 섹스코미디물로 인정받는 양영순의 <누들누드> 등을 발굴했다. 또한 이들의 자부심 역시 대단해서, 소년만화를 통해서 메이저로 올라섰던 서울문화사와 대원이 비슷한 시기에 각각 창간했던 <<빅점프>>와 <<트웬티세븐>>과 달리, 당시 만화잡지운영의 기본모델로 굳어져있던 일본만화 라이센스 연재라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이 당시의 성인만화는 성과 폭력에 대한 말초적 자극에 의존하는 단계를 벗어나 다양한 성인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세부 장르취향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었다. 윤태호의 <연씨별곡>의 해학과 양영순의 <누들누드>의 기발한 은유능력은 성애와 해학의 결합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으며, 허영만의 <닭 목을 비틀면 새벽은 안온다>의 사례처럼 일인 영웅체제에서 벗어나 복잡한 권력관계를 다루는 정치극화와 조직폭력물이 점차 세련된 위용을 드러냈다. 또한 성인 직장인들의 일상적 생활과 스트레스를 다루거나, 가족 관계에서 오는 마찰을 코믹하게 다루는 트렌디 드라마 만화들도 유행했으며, 한편에서는 대본소의 종주분야인 무협물 장르가 이재학의 일본 잡지 연재작 <용음봉명>에서 볼 수 있듯 세부 연출테크닉을 한층 가다듬고 있었다. 주제의 깊이 면에서도 발전이 확연했는데, 예를 들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사극의 형식을 빌려서 구도라는 주제를 탐구했으며, 김동화 역시 <기생이야기>를 통해서 속 깊은 서정성을 발견했다. 이들은 그간 소년만화와 순정만화계를 휩쓸어버린 미형 캐릭터와 화려한 시각연출의 물결과는 명백한 격차가 있었지만, 90년대 성인 독자들의 안목에 맞는 양질의 문화적 효용감을 준 것이다. 나아가 순정만화계에서도 97년 성인 독자층을 노린 잡지 <<나인>>이 창간, 성인만화계에 신선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90년대 후반은 대중오락으로서도, 표현예술로서도 성인만화가 완연한 경지에 도달하고자 움직였던 시기인 셈이다.

그러나 검찰이 주도한 97년도의 만화탄압사태는 성인만화의 발전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잡지는 폐간되고 작품들은 도덕적 비난을 뒤집어쓰고 작가들은 기소되었다. 또한 청소년보호법의 발효는 시장의 활력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러한 환경에서 오히려 어느 정도의 호흡을 유지한 것은 한참 위축되어가고 있던 대본소였다. 그간 주요 장르의 노쇠화에 시달리던 대본소 만화는 판형면에서 기존 대본소용 만화보다 제작 품질 및 작품 내용의 밀도를 높인 속칭 ‘성인만화 판형’을 개발했다. 이 판형의 도입으로 이전 시대의 성인만화 명작들을 다시 소개하는 것은 물론, 박봉성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시리즈의 경우처럼 신문연재를 거친 성인극화 역시 무리없이 대본소에 공급되도록 하였다. 장르면에서도 조성빈의 토속성애만화 시리즈를 위시한 에로만화 분야가 새롭게 개척되었다. 하지만 성애장르의 제한된 상상력 및 오늘날 에로 대중문화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미미함을 고려할 때, 이것은 임시 자구책의 성격이 강하여 성인만화 침체라는 현상을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90년대말 성인만화의 침체는 2000년대에 새로운 트렌드의 신문 연재 만화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희망이 던져질 때 까지 계속되었다.

4. 인디/언더 만화: 장르화에 대한 반발

‘인디 예술’은 시스템화된 생산체계로부터 독립하여 작가 자신의 표현욕구를 우선시하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즉 이것이 성립되려면 우선 그 예술양식의 주류 생산방식 자체가 먼저 산업적 효용성을 기치로 하는 시스템화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만화의 경우 전술하였듯이 90년대 들어서 그러한 현상이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인디만화라는 개념이 주창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85년도의 <<아홉번째 신화>>가 이미 충분히 인디만화의 초기 시도이며 상당수의 기타 동호회들도 이 범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인디만화로서의 자의식을 스스로 주창하고 나선 작가군과 운동체가 나타난 것은 9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는 한국만화잡지의 여러 대안들이 사라지고 상업적 성공 효율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일본식 물량 및 경쟁체계라는 방식으로 수렴되었고, 각각 세대별, 성별 소비층의 주류 취향이라는 것을 상정하여 그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만을 다루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주류와 다른 감수성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며, 그것을 통해서 대안적인 만화 방식을 설파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들 인디만화다. 그렇다고 해서 인디적인 시도들과 주류 만화계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인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97년 창간된 <<MIX>>의 경우,  80년대 <<아홉번째 신화>>의 경우처럼 순정무크지를 표방하며 창간되었다. 이들은 기존 잡지지면에서 표현하기 힘들었던 기성작가와 신인들의 대담한 표현을 통해서 좀 더 강렬한 취향의 순정독자들을 만족시켰는데, 결국 이 잡지의 작가진과 편집방향은 같은 해 서울문화사에서 창간된 성인 순정만화잡지 <<나인>>으로 고스란히 이전했고 주류 만화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더 특화된 취향의 비주류적 만화방식에 대한 욕구가 90년대 중반 무렵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들이 보통 언더그라운드 만화라고 칭해지는 부류다. 이 작품군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거칠고 투박한 표현, 난독성 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들을 인디만화라는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기성 주류만화시스템에서 스스로의 표현방식과 정체성을 통제받기 보다는 독자적인 출판, 유통 경로를 모색하고 있고 그러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6) . 이들은 비록 주류적인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거나 대상 독자층과 확고한 소통을 통해서 매니아 세력화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90년대 및 그 이후 만화계에 대안적 모델과 작가주의적 전통을 구성한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었던 그룹들은 ‘네모라미’, ‘화끈’, ‘히스테리’ 등이었다. 우선 네모라미는 홍대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만화동아리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주목하게 만든 2기 회지에는 90년대 후반 포스트모던 계열 광고영상으로 유명세를 떨친 CF감독 박명천, 다양한 화풍의 일러스트로 출판계의 스타로 떠오른 이우일 등이 포함되었는데, 주류만화의 전통적 요소인 인물과 극 전개에 대한 몰입보다는 화면 전체의 디자인적 효과를 중시하고 해체적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의 인디/언더 만화계를 대표한 양대 기둥은 화끈과 히스테리다. 모해규를 편집장으로 하여 96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만화잡지 <<화끈>>을 통해서 결속한 일련의 작가군은 저항적 성향이 강하고 이야기 만화에 대한 인식을 일정부분 지녔다. 우만연과 연계된 민예총 만화 아카데미 출신 작가들이 다수 포함되었던 이들은, 무엇보다 잡지 자체를 독자적 시장과 유통경로로 만들어 나갔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재정난과 이에 따른 작가 수급 난맥으로 인하여 이후에 웹진으로, 종이잡지 재창간으로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이보다 앞선 95년에 <<만화실험 봄>>이라는 무크지를 통해서 먼저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 바로 ‘히스테리’ 그룹이었다. 이후 <<히스테리>>라는 정기간행 잡지를 내다가, 몇 번 다시 이름을 바꾸어 98년 이후로는 <<COMIX>>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신일섭을 편집장으로 하는 이 잡지의 작가군은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을 가진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의 언더성향 정체성을 공개적인 선언을 통해서 천명하고 나섰다. 이들은 의도적인 저속함, 키취 취향을 표방하여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또한 당시 부각되고 있던 언더성향 문화 일반인 펑크락 음악, 길거리 미술 등 여러 인근 장르와의 연대를 실천하고자 하여 각종 전시 이벤트, ‘이발쑈 포르노씨’라는 락밴드 등 다방면의 활동이 이어졌다. 이들 역시 대중적 성공을 배재하여 얻게 된 재정난으로 웹진 전환, 기습적인 잡지 재발간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외에도 한겨레 아카데미 출신 작가들 역시 90년대 인디만화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98년 창간되어 고급 비평담론과 인디성향 만화들을 묶어낸 잡지인 <<월간 오즈>>, 동인회지 <<바카스>> 등에서 이들은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운동체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한 편이며 성향의 편차가 극심하여 하나의 집단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다만 작가적 자세라는 측면에서 주류화된 잡지시스템에 대한 편입을 거부한다는 견지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명백한 인디만화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인디적인 취향을 선보이는 개인 작가들 역시 90년대에는 다수 부각되었다. 변병준, 박흥용, 이진경 등 주류 잡지만화계에서 활동하면서도 작품 내용이나 발표방식에서 비주류적인 방식을 고수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5. 신문/시사만화의 진화

한국에서 신문과 만화는, 이미 근대 신문 개념의 탄생과 함께 첫 근접조우를 가졌다. 이 당시 이후로 계속 고정된 신문 속 만화의 역할은 전통적은 만평과 시사 4칸만화였다. 물론 70년대부터 스포츠 신문의 영역에서는 극화풍 연재만화가 히트를 쳤지만, 소위 종합일간지로 불리우는 신문들에서 만평과 시사 4칸만화로서의 만화의 역할은 90년대 중반까지 그대로였다. 미국의 신문연재 생활 코미디를 특약 연재한 <블론디>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90년대의 시사만화는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양상 몇가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초는 가운데 하나는 88년 데뷔한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으로, 정치인들의 권력다툼이라는 이슈에 함몰되어 있던 기존 1칸 시사만화의 의제 설정틀을 넘어 여성차별, 환경문제, 문화현상 등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정해진 1칸 공간을 다시 서사적 필요에 따라서 쪼개는 다양한 칸 분할 방식, 캐리커쳐에 머물지 않는 다양한 시각적 은유를 통한 폭넓은 인물표현 등으로 시사만화의 표현력을 혁신했다. 17)

또 다른 분기점인 <경향만평>의 김상택은 정치인들의 권력다툼을 다루되 거의 전통 민담 내지 궁중 사극 스타일의 해학과 직설화법으로 풀어나가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중앙일보로 이적하면서 급격하게 논조가 우경화되기 전까지는 박재동과 함께 90년대 시사만화의 대표작가로 평가받았다. 또한 잔선이 많고 형상이 이그러지는 그림체를 도입, 시사만화 화풍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데 일조했다. 또한 시사만화 일반에 대한 관심 역시 진행되어 시사만화계 전반을 다루는 잡지 <<시사만평>>이 91년 창간, 1년여간 발간된 일도 있었다. 18)

이러한 환경에 힘입어 90년대에는 보다 다양하고 효과적인 표현과 의제설정을 갖춘 젊은 시사만화가들이 속속들이 부상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작가들의 성향별 조직화 역시 진척되어, 보수 성향 시사만화가들을 위주로 하는 단체인 한국시사만화가회가 95년 창립되었고, 이와 반대 성향을 가진 젊은 작가들 역시 90년대에 점차 결집하여 2000년 1월에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를 출범시켰다.

이 시기 시사만화의 또 다른 혁신은 주간지용 시사만화의 등장이다. 주간조선에 연재된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한겨레21에 연재된 조남준의 <시사SF> 등이 대표적이다. 두 페이지에 걸친 칸 전개라는 서사적 구성을 통해서 시사적 이슈에 대한 한층 세밀한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 <현대문명진단>의 경우 작가의 나레이션을 따라가며 칸 단위의 설명을 읽어내는 강연식 구조를 지니고 있다면, <시사SF>는 시사적 이슈를 비유적이며 종종 상상적인 상황으로 치환하여 한편의 해학적인 꽁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신문이라는 매체에서 시사만화 이외의 분야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시도 역시 가속화되었다. 그중 한가지는 스포츠신문이 아닌 속칭 ‘종합일간지’에서도 회당 여러 페이지로 구성된 연재 극화를 개제하는 것이었다. 95년 말 경향신문에서 이현세의 <러브컬렉션>을 연재한 것이 시초인데,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1년 이내로 다시 만화지면이 사라지게 되었다. 오히려 돌파구는 다른 곳에서 나왔는데, 조선일보는 97년에 정사각형의 공간에 컬러로 짤막한 에피소드를 담은 <광수생각>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메이져 일간지인 조선일보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는데, 감상주의적 색채와 둥글둥글한 그래픽으로 무장한 소위 에세이툰이라는 취향장르의 화려한 신호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여타 신문에서도 비슷한 컨셉의 작품들을 유치하기 시작했고, 제한적인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 19)  

6. 90년대 애니메이션의 장르 성향

90년대 애니메이션의 내용적 경향에 있어서 후기로 갈수록 뚜렷해지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드라마의 퇴조와 세계 설정의 강조다. 극장판과 TV시리즈 모두 시기가 지날수록 현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인간 드라마 위주의 전개가 점차 쇠퇴해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제작단계에서 독특한 세계관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화려한 비주얼로 우선 눈길을 끌어냄으로서 각종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90년대 특유의 문화산업 붐과 연관이 있었다. 또한 디즈니로 대표되는 대자본 블록버스터 작품들이나, 드라마의 빈약함을 화려한 캐릭터들의 스펙터클로 대체하기 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향성과 경쟁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이행된 현상이라는 측면도 있다. 특히 이것은 볼거리가 중요한 극장용 작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서, SF, 환타지 등 특이한 세계관과 그에 따른 비주얼을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이 강조되었다. 90년대 중반기 최고의 관심을 일으켰던 <아마게돈>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80년대 제작된 TV판 <아기공룡 둘리>가 가족적인 아기자기함을 강조한 작품이었다면, 90년대의 극장 개봉작 <얼음별 대모험>은 스펙타클한 모험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도 특기할 만 하다. 단지 TV와 극장판의 차이라기보다는, 같은 작품 에서도 장르적 성향이 바뀐 것이다. 나아가 비주얼을 강조하는 이러한 경향은 작품을 캐릭터 프랜차이즈를 위한 전방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게돈>, <철인사천왕>이나 TV 시리즈 <영혼기병 라젠카>, <녹색전차 해모수> 등의 실패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주얼에 집중하다가 스토리 전개의 원활함을 놓치고, 특이한 세계관에 매달리다가 정작 설득력 있는 행동을 통해서 축적되는 캐릭터들의 매력을 잃어버리는 시행착오를 많은 경우 겪어야만 했다.

이 시기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장 긍정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는 장편 시리즈물의 제작으로, 13화 완결이라는 짧은 호흡을 강요받았던 이전의 TV시리즈 제작관행에서 벗어나 인기 있는 작품은 13화 단위로 속편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옛날옛적에>가 3개 시즌, <날아라 슈퍼보드>가 4시즌까지 제작되는 등 작품 컨셉에 걸맞는 서사구조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90년대 말을 향하면서 처음부터 20화 이상으로 기획되는 경우도 생겨나, 99년에 전 26화 짜리 <레스톨 특수구조대>라는 예상치 않았던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장편 시리즈로 갈수록 방영시간대, 투자자의 성향 등과 맞물려서 TV시리즈의 인기를 좌우하는 청중은 주로 아동층으로 한정되었고, 따라서 주류 작품들의 장르 취향 역시 아동 모험물 위주로 발달하게 되었다.

90년대에는 작가주의적 시도 또한 확고하게 자리잡아갔다. 교육기관의 증가와 함께 독립성향 단편을 제작하는 작가들이 증가했고, 특히 컴퓨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소규모 인원 내지 1인 제작이 한층 수월해졌다. 특이한 경우는 98년도 MBC 뉴스에 삽입되었던 <시사애니메이션>인데, <한겨레 그림판> 박재동의 오돌또기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단편 시리즈물이었다. 내용은 마치 박재동의 신문 시사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듯한 감수성으로, 근엄함의 정서가 지배적인 TV뉴스방송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나아가 의외로 주류 장르물에서 작가주의적 시도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즉 감독의 개성이 실제로 작품에 명확하게 반영되어 관객들도 느낄 수 있도록 하거나, 아예 감독을 스타로 만드는 것을 이야기한다. 단편 <덤불속의 재>로 시적인 부드러움을 독특한 필치로 담아냈고 극장용 장편 <마리이야기> 제작에 착수한 이성강, <원더풀데이즈>라는 데모영상에서 2D와 3D가 조화를 이룬 강력한 스펙터클을 창조해낸 김문생 등이 기대주로 부상했다. 20)  이것은 물론 작품 자체의 완성도나 상업적 성공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다양한 세부 취향의 분화에 도움이 되어주었다.

 

IV. 새로운 방향성의 예고

1. 만화/애니메이션계의 환경변화

2000년대를 목전에 두고 있던 무렵의 한국 만화계는 위기론이 지배했다. 편집부 시스템의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일본식 잡지모델을 지속하는 것의 한계가 드러났고, 단행본 물량공세 위주의 산업 시스템은 시장포화점을 넘어섰으며, 출판계 전반의 불황은 주류 만화계에서 일거에 위기의식을 지폈다. 나아가 인터넷 보급의 폭발적 증가와 맞물린 컴퓨터 게임의 강세, 영화산업의 부흥 등 오락문화 영역에서 만화의 지분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끝물을 노리고 앞다투어 주류시장에 진입 및 잡지창간을 했다가 곧바로 쓰러지는 출판사들도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지만 이미 관성화되어 버린 시스템을 개혁하기에는 추동 에너지가 충분하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역시 90년대에 축적된 거듭된 상업적 실패로 인하여 투자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덕분에 제작 체계가 튼튼하지 못했던 <오돌또기>등의 프로젝트들은 물론이고, <하얀 마음 백구> 등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프로젝트들까지도 완성 스케쥴 지연 또는 개점휴업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2000년대에도 계속되어 고질적 문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주류 만화계가 자폐적인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도 만화라는 양식 자체는 아직 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미술계에서는 <아토마우스> 연작의 이동기의 경우처럼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만화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었으며, 방송이나 영화에서도 만화의 화법 및 원작을 차용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또한 만화출판이라는 측면에서도 오히려 호황을 구가하는 분야가 새롭게 시선을 집중시켰는데, 바로 정보/학습 만화의 영역이었다. 정보 및 학습만화는 픽션에 의한 서사보다는 정보 전달 자체에 집중하는 만화 일반을 칭하는 것인데, 작품성의 성취도보다 정보 효용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는 기획물이다 보니 만화의 창작예술 속성을 강조하는 작가 및 주류 만화출판계에서는 일종의 번외구역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주류 잡지에서 명랑만화가 거의 멸종해버린 90년대 후반 이후에 아동독자들의 대부분을 흡수한 것은 물론, 복잡해진 세상 속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손쉬운 상식정보 습득에도 지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 결과 상업적인 성장 및 이에 따른 완성도 측면의 질적인 발전까지도 거듭한 것이다. 90년대 초 이원복/송병락의 신자유주의 찬가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손쉽게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21), 주기적인 유행에 따라서 도시괴담류 공포만화 등 아동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취향장르가 각광받았다.

90년대가 끝나가는 시기는 이렇듯 양가적인 상황이었다. 이 시기, 만화/애니메이션계가 새로운 돌파구로 여기고 일제히 시선을 집중한 곳이 바로 폭발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인터넷이었다. 

2. 만화의 적극적인 인터넷 문화 수용

만화가 온라인이라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시도는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다. 90년대 중반에 실험적 연구를 하고 후반에 본격화되었던 PC통신 서비스의 온라인 만화방 서비스를 필두로, 인터넷 보편화가 막 이루어지고 있던 99년99-00년에 이미 ‘이코믹스’, ‘N4′, ’코믹스투데이‘ 등 대형 만화 포털 사이트가 독자몰이에 나섰다. 즉 온라인은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침체된 시장과 유통방식에 활로를 제공할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사이트와 실물 출판의 결합, 취향별 소량 유통, 종합 서비스를 하는 포털 사이트화 등 다양한 시장모델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화방이라는 표어대로 해당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유료결제를 하면 기존 종이만화의 스캔본을 볼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방식에 그쳤고, 그 결과 일부 성인 에로 만화를 제외하고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인쇄를 전제로 하는 장편 만화 작품들을 모니터 화면으로 온전히 즐기기에는 해상도 문제, 독서 자세의 불편함 등 기술적 난맥상이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만화를 본다는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소리를 넣거나, 작은 움직임을 부여하는 식의 시도도 일부 있었지만, 만화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었다.

온라인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키워준 것은 바로 독자 자신들이었다. 인터넷 메일과 게시판을 통한 소통이 생활화되면서 서로 온라인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만화 작품을 1-2개짜리 첨부 파일로 올려주는 새로운 유행이 생겨난 것이었다. ‘N4’에서 연재되었던 플래시 애니메이션 작품인 <마시마로 숲 이야기>가 언젠가부터 ’엽기토끼‘라는 별명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신문사의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오는 카툰 연재물 역시 각광받았다. 이러한 트렌드 속에서, <스노우캣>을 필두로 하는 인터넷 상의 일기체 만화들이 특히 주목을 모았다.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짦막한 이야기를 며칠 간격으로 올리는 방식을 통해서,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독자층에게 거의 중독적인 흡입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수많은 아마추어 만화 작가들이 유사한 작업을 시도했고, 하나의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이렇듯 ‘펌’과 취향 공유에 기반을 둔 자발적인 확산에 의해서 온라인 만화는 삽시간에 거대한 독자층을 확보해 나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온라인에 접속해 있는 시간이나 돌아다니는 폭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서, 온라인 만화 역시 한층 깊숙하게 독자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이렇듯 90년대 말에 시작한 온라인 만화라는 경향은, 이후 2000년대에는 더욱 더 만화계 전체를 변모시킬 정도의 강력한 움직임이 되었다.

 

V. 맺음말. 90년대: 체질변환 실험 

산업적 체계화라는 움직임은 창작 및 향유 경향성의 흐름 형성과 변화에 이전과는 다른 급박한 속도감을 부여했고, 정치적 민주화의 정착에 따른 문화담론의 증가는 취향문화 개념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 두가지가 결합하여 대중문화로서의 만화/애니메이션에 장르성 공고화와 취향 분화라는 커다란 움직임을 규정지어주었다. 이 와중에서 한국 만화는 소년만화와 순정만화를 양대 주류로 정립시키면서 발전했는데, 이전 시대와 단절하는 완전히 새로운 제작체계 및 창작 경향과 세대가 주목을 받았다가 이내 한계에 부딪히고 변화에 직면하는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류 장르화를 강요하는 시스템에 대한 반발로 제기된 인디만화, 독자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진화를 꿈꾸다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하여 침체로 돌아선 성인만화, 표현형식의 혁신을 보여준 시사만화 등 여러 기타 영역에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만화/애니메이션 분야에서 90년대는 문화산업이라는 담론과 취향이라는 변별자의 힘에 의하여 대단히 역동적이며 유동적으로 움직인 시기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안정화하거나 해소되지 않고 2000년대로 이음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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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90년대 이후, 문화 창작품의 산업적 활용인 속칭 문화콘텐츠 산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동원된 대표적인 논리. 헐리웃 영화 <쥬라기 공원> 및 관련 프랜차이즈 사업의 대형 히트를 일부 언론에서 단순 수치비교를 하며 “쥬라기 공원 한편의 경제효과가 현대 자동차 1년치 수익과 맞먹는다”고 보도한 것에서 유래한다.

2)‘성인만화’는 편의상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기는 하지만 정당한 비평적 용어와는 거리가 있다. 비록 성인 취향의 만화를 나타낸다는 의미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지만, 역으로 만화 일반의 이미지를 아동용/청소년용으로 한정시켜 놓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만화라는 용어에서 오는 성적, 폭력적 과잉의 편견 역시 비평적 작업으로 극복해 나아가야할 대상이다.

3) 사실 국제 라이센스 계약을 통한 최초의 일본만화 수입작품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삼국지>였지만(조선일보 1989.11.28), 주류 만화시장 전반을 견인하는 파급력과 이후 일본만화 수입 관행의 모델이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드래곤볼>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도 계약관계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연재가 시작되는 등, 저작권 관행은 한동안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4) 단행본 출간 붐이 가장 극적으로 전개된 95-98년 기간 동안, 해적판을 제외한 연간 만화 출판 종수는 95년 4699종 (전체 출판물 대비 점유율 14.6%), 96년 5592 종 (17.3%), 97년 6297종 (18.7%), 98년 8122종 (22%) 으로 증가해왔다. (2000출판연감, 대한 출판문화협회 발행)

5) 대여점용 단행본을 양산하다가 조락한 서울미디어랜드와 달리, 학산문화사는 <<찬스>>, <<부킹>>, 웹진 <<해킹>> 등 잡지 운영으로 내실을 기하며 90년대 말에는 서울문화사, 대원CI와 함께 업계 상위권의 경쟁자로 자리매김했다.

6)만화탄압에만 앞장섰다는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이들은 지속적으로 만화에 대한 산업통계 자료와 교육을 실시했다. 실제로 3차 만화자료집으로 명명된 <만화-너무너무 어려운 작업>(1991.5, 서울 YWCA 발간)을 보면 작가 및 평론가들의 만화 담론을 취합하여 정론지 역할까지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만화, 성인만화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은 이들의 분석틀과 제언방향을 조악한 수준의 도덕률에 그치도록 했고, 결국 만화에 대한 편견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동원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97년 청소년 보호법 제정 이후로 사실상 중단되었다.

7) 칼럼니스트 선정우는 ‘성인 애니메이션을 다시 생각하자’ (CT News, 2003.4.21일자)에서 성인용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1) 저예산이기 때문에 불황에 유리하다 2) 해외 수출이 용이하다 3) 만약 성공할 경우 성인문화에 대한 불공정한 비난을 개선할 수 있다

8) 해적판 만화의 변천과 역할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음지의 만화 – 해적판의 발자취’ (<세계만화정복>, 만화집단 두고보자 저, 2004)에서 보다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9) 청소년보호법이 만화에 행사하는 각 독소조항에 대해서는 1996.12.20에 실시된 한국만화 애니메이션 학회 창립 심포지움 발제문 <정부의 만화 심의정책 비판과 그 대안>(이재현)이 가장 정연하게 정리된 자료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서 발제자는 “…심의에 관한 정부의 정책적 역할은 정보검열자에서 정보제공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간 정부정책에 대해서 만화계에 축적된 불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10) <가고 싶은 만화학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월간 만화창작, 99.10월호.  

11) “4년제로 치면 상명대 만화전공, 목원대 만화예술전공,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순천대 만화예술과, 전주대 영상만화전공(쫌 모호하군요), 공주대학교 만화예술학부, 예원대 만화게임영상학부(모호하군요 역시.) 조선대 만화애니메이션학부로 8곳 정도이며 2년제로 치면 청강문화산업대학의 만화창작과, 경민대학의 만화예술과, 부산예술문화대학의 만화예술과, 인덕대학의 만화애니메이션전공으로 4곳 정도입니다. 물론 세부 전공으로 만화를 가르치는 과는 있으나 적어도 과 이름에 만화가 적시되어있는 곳을 고르면 겨우 12곳 정도라는 말이죠.” (박인하, http://blog.naver.com/enterani)

12) 한국 만화역사를 총괄정리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한국만화통사>를 집필하기 위해 만화평론가 손상익 등에 의하여 결성된 ‘한국만화통사 편찬위원회’의 후신.

13) 이러한 장르적 방향성은 때로는 일본 만화 컨벤션의 지나치게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어져서, <어쩐지…저녁>에서 주인공들이 일본식 찬합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등 문화적 혼란을 야기한 부분도 발생했다. 당연히 이런 지점들은 일본만화에 대한 부정적 편견으로 무장한 학부모 단체들의 즉각적인 공격대상이 되었고, 서울 YWCA 어린이부에서 연 단위로 작성한 <주간 만화잡지 분석보고서>의 단골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14)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접근 역시 한층 농밀하게 부각되었는데, 남성향 성인만화가 지니는 육체적 욕망묘사와는 달리 성적 애정과 정체성에 대한 묘사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더 자세한 논의는 원윤미, <순정만화 장르에 나타난 섹슈얼리티와 수용양상에 관한 연구> (2001,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논문)를 참조.

15) 90년대 스포츠신문 만화의 역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영미,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연구> (2003,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사논문) 를 참조.

16) ‘한국 인디만화의 어제, 오늘, 그리고’ (웹진 두고보자 제5호, 2001). 특집코너의 일환으로 한국 인디만화의 계보를 도표화한 자료도 같이 첨부되어 있다. 

17)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합당 블루스 – 한겨레 그림판 모음4>(이론과 실천, 1992)에 실린 황지우 시인의 박재동론 <권력에 대한 웃음 – 박재동 만화 아이콘, 분석>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의제설정, 비유법, 철학 등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한국 시사만화에 대한 종합적 평론의 가장 모범적인 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18) 손상익 외, <한국만화통사 2> (시공사, 1998) p.172

19)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우일의 <도날드닭>이 대표적인 사례로, 지면구성에서부터 <광수생각>의 히트요인을 기계적으로 모사하고자 했던 신문사의 입장이 엿보인다. 하지만 작가의 전위적인 성향은 <광수생각>의 감상주의나 보수적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지면에서 퇴출당했다.

20)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작품 모두 작품의 실제 완성과 개봉이 여러 차례 연기되어 여러 해 동안 소문만 무성한 기대작으로 남아있었던 경력이 있다. 96년의 <아마게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투자 지연 등 제작상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최대한 감안하며 개봉 스케쥴을 짜는 기획력이 부족했던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고질적 병폐의 결과였다.

21) 이원복은 고려원에서 출판한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상업적 성공에 이어 곧바로 이 책을 성공시킴으로서 정보 학습 만화의 확실한 브랜드로 떠올랐다. 이후 <현대문명진단> 시리즈,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각종 속편들 등이 작품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연달아서 히트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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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90년대 만화/애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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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이버덧글 백업]
    – 기린아 – 아, 너무 길어요. 흑흑흑. 출력해서 봐야 할듯.-_-; 2006/02/13 16:28

    – 캡콜드 – !@#… 기린아/ 훗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군요;;; 2006/02/14 02:15

    – akachan –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셨네요. 해적판에 대해서만 조금 보강하면 좋은 자료가 될 듯 합니다.^^ 2006/02/14 11:01

    – 캡콜드 – !@#… akachan님/ 지면이…지면이 부족했습니다… 커헉…(안그래도 원고지 수십매 분량 오버;;) 나중에 박 모 교수가 쓴 앞 파트들과 합쳐서 이걸 별도로 단행본화 시키면, 이전에 해적판에 대해서 썼던 글들과 필히 보충 취합하겠습니다. 다만 그 경우 애니메이션 역사는 분리해야 할텐데, 버리기는 아깝군요. 어디 따로 써먹을 곳 있으려나;;; 2006/02/14 12:04

    – nomodem – 아깝네요.
    capcold 씨만은, 해적판만화에 대해서도 한 챕터 정도는 다루실줄 알았는데.
    한국처럼 지적재산권문제와 역사적인이유로 왜놈문화가 배척당해야했던 이유가 얽힌 곳에서 만화문화속의 일본해적판문제가 복잡다단하게 들어가있는곳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요?

    그 점을 한번 제대로 짚어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걸러보지 않으면 ‘부족한 만화사’가 되리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2006/02/15 03:00

    – nomodem – 컥. 댓글 안보고 갈겨놓고 보니, 위에 이미 akachan 님이 해적판 문제를 지적하셨고, capcold 씨는 거론한적이 있었군요. 역시 걱정은 뒷북. 2006/02/15 03:01

    – 캡콜드 – !@#… nomodem님/ 그럼요. 아실 분들은 아시다시피 한국만화판에 대한 해적판의 구조적인 개입 이야기는 제가 99년에 OZ 통해서 처음 공식지면 데뷔를 했던 당시 가장 처음 썼던 분석글의 주제였는데요 (그걸 다시 두고보자에서 연재칼럼으로 확장했고, 그걸 다시 요약해서 <세계만화정복>에 한 꼭지 넣은 것이고). 단행본화시키면 아예 별개챕터로 자세히 다뤄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 해적판 문제가 만화문화 속에 복잡다단하게 들어가 있는 것으로 치면 현재의 중국도 장난이 아닙니다; 나중에 한번 필히 자세히 조사를 해보고 싶습니다만, 한국 만화사에 같이 넣지는 못하겠죠. 2006/02/15 03:14

    – nomodem – 그랬었구만요.

    아시다시피 지금 스크린쿼터논란에서 모두 불법다운로드 문제를 쏙 빼놓고 겉만 열심히 긁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만화문화의 흐름들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만화사업에 대해 열쇠들을 만들어가시는 입장에 있어서는 해적판문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시리라 여겼었는데.

    이 글에서 빠져있어서 잠시 놀랐던거죠. 2006/02/15 03:31

    – 캡콜드 – !@#… 지금와서 다시보니 ,각주 8)에서 <만화세계정복>의 해적판 꼭지를 반드시 읽으라고 확실하게 뽐뿌질을 해놓을 껄 그랬다는 아쉬움이…–; 2006/02/15 03:38

    – nomodem – 흐흐..보통 저 같은 사람은 다 읽은 뒤에 댓글을 읽고 나서 그 다음에 각주를 살피게 되니까요. 각주를 보통 넘기게 되는 저 같이 반똑똑이들이 문제겠군요.

    그러나, 역시 같은 텍스트 확장판에서 다뤄주는 것이 좋지. 다른 저서를 소개하면 읽다가 목말라요. 이유는 쓰시는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확장해버리는게 좋잖아요. 하긴 그런식으로 쓰자면 저 글 자체가 지금보다 32배 정도로 확장되어야겠군요. 2006/02/15 03:48

    – 캡콜드 – !@#… 종이책에서는 그나마 해당페이지 바로 아래에 붙어있으니 망정이죠;; 여튼 당초 요구사항 대로 정해진 지면 안에 애니메이션사까지 같이 넣다보니 여러모로 좀 분량조절이 거시기했습니다. 하기야 애니메이션사의 경우도 90년대 중반까지만 커버한 책들이 대부분이지만(나중에 모님의 무크지 프로젝트가 시동을 걸면 본격적으로 해소되리라 봅니다)… 2006/02/15 05:11

    – 워터메론 – 담아가겠습니다~ ‘ㅂ’ 2006/02/15 17:48

    – 령 – 한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요, 90년대 애니메이션에 관한 부분 중에서 <돌아온 영웅 홍길동>이 실패작으로 언급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송락현씨가 정리한 통계(http://kr.blog.yahoo.com/anicapsule/996.html)에 따르면 <돌아온 영웅 홍길동>은 역대 국산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흥행성적을 낸 작품입니다. 물론 내부적으론 거의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그 외의 기획과 홍보 측면 등에서는 타겟인 아동층을 잘 공략한 성공작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므로 <헝그리 베스트 5>등과 같이 타겟층의 철저한 외면이라는 설명은 이 작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뭐, 아마 지면상 빠진 부분인 것을 괜히 지적하는 것이겠지만 일단 써 둡니다. 2006/02/15 21:27

    – 캡콜드 – !@#…령님/ 좋은 지적이십니다. 과도한 축약에서 오는 제 표현상의 실수죠. 95년의 각 작품이, 각각 “소품으로 단명한” 방식 자체부터가 서로 동일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송락현님의 통계도 영진위의 ‘동향과 전망’ 2003년 7/8월호를 바탕으로 하는데, 홍길동의 경우 개봉관을 거의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통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비정규 개봉관(시민회관 등)의 입장객 수치를 영화사가 뻥튀기 자체집계 발표했다는 의혹이 당시 제기된 바 있어서 언급을 유보했습니다. 지면만 더 확보되면 영진위측 통계수치는 물론 이런 논란이 있다는 이야기까지도 아예 같이 포함시켜야죠;; 2006/02/16 0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