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기획회의060915]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

김낙호 (만화연구가)

하드보일드라는 대중문화 장르가 있다. 비록 장르 중 일부가 ‘느와르’라는 수식어로 미학적 가치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나름의 굳건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장르의 핵심은 바로 폭력, 섹스에 대한 탐닉으로 무장된 범죄물이다. 그런데 그 범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것 정도로 그려지고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밑바닥 인생들의 최대한 “폼 나게” 사는 인생살이에 대한 도취로 가득하다. 나쁜 놈들도 폭력적이고 막나가지만, 좋은 놈들도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막나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탐욕과 욕망이 뒤섞인 속에서도, 주인공 쪽은 한 가닥 지고지순함만은 간직하고 있기에 구분이 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악을 누르는 이야기. 험난한 세상 찌든 도시 속, 서로 범죄적 음모로 물고 물리는 밑바닥 활극의 카타르시스가 바로 이 장르의 재미이자 인기의 비결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극단적으로 슬럼화된 어두운 도시가 있고, 그 거리에는 온갖 조직 범죄와 일반 범죄가 들끓는다. 도시는 부패한 공무원과 종교인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 터전을 지켜야 한다. 악당들만큼 비정하고 거칠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이 서로 음모에 얽히고 먹고 먹힌다. 이것이 바로 『씬시티』(프랭크 밀러 / 세미콜론 / 전7권 중 3권 발행중), 문자 그대로 ‘죄악의 도시’의 세계다.

원작자의 광팬과 원작자 본인이 공동 감독한 동명의 영화로 한국에는 먼저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씬시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드보일드 농축액이다.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매 페이지, 매 장면마다 하드보일드의 극치를 표현해 보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어둡고 모노톤인 하드보일드물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는 아예 중간톤 없는 강렬한 흑백의 세계다.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뇌쇄적이면서 동시에 강하고 위험한 팜므 파탈들 이며, 남성들은 근육질이든 왜소하든 하나같이 “순수한 폭력의 덩어리” 그 자체다. 도시의 뒷골목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더러우며 범죄의 때가 찌들어있고, 멋진 자동차 추격과 술집의 주먹다짐이 넘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 놈의 망할 세상에 대한 폼나는 시적 독백을 읊조린다. 물론 이런 묘사 속에서 인간의 고독이니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혼란에 대한 실존적 은유니 하는 수사를 뽑아내고 싶은 뭇 문학청년 후보생들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하드보일드의 핵심은 바로 성과 폭력이 멋들어지게 포장되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원초적 쾌감이다. 그리고 바로 『씬시티』는 하드보일드 장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모두 하나씩 분해해서 극단까지 끌고 가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보는 장렬한 실험실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구조 역시 하드보일드 펄프픽션들이 원래 그래왔듯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펼쳐진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 속에 공존하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이야기에 찬조출연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스토리에서는 죽어버리고 나중에 나오는 다른 스토리에서는 다른 시간대를 다룬다는 명목 하에 살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만화라는 형식에 한층 더 잘 어울리는데,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가끔 섞여 들어가는 장편이야기와 단편 에피소드들을 어색함 없이 쉽게 이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작품 역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도 있고, 다소 미흡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체 세계관과 표현력의 매력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중간색을 생략한 흑백의 대비로 그려진 장면들이다. 그것도 바탕이 검은 색이고, 흰 부분은 가끔 빛이 들어와서 사물과 사람들의 윤곽선을 식별하게 해주는 정도에 가깝다. 나아가 거칠고 직선적인 필체, 역동적 화면구도와 시점처리는 강력한 마초 에너지를 발산한다.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극단적인 스타일 과잉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런 과장은 영화로 치자면 오우삼 영화에서 주윤발의 트렌치코트가 휘날릴 때 슬로우 모션이 되는 것과 맞먹는 강렬한 효과를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판에서 만화의 식자 처리를 김수박 작가를 통해서 전문적으로 작업한 것 역시 좋은 선택이다. 그림과 문자가 잘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그 스타일리쉬한 시각세계가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체 대사에 하지 않고 효과음에만 그런 전문적 처리를 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번 한국어판은 출판 품질이 잘 나온 느낌이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다. 바로 번역의 부분이다. 매끈하고 별다른 오역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원작 특유의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를 살린 ‘훌륭한 번역’에는 못 미친다. 예를 들어 1권의 첫 부분에 주인공 마브가 “천국의 향기가 코를 찌르는군”이라고 독백하는 부분이 있다. 원작의 대사를 직역하자면 “그녀는 천사가 풍겨야할만한 냄새가 났다”에 가깝다. 즉, 마브 같은 거친 마초의 상상력으로는 천사라도 어떤 냄새(향기가 아니라!)가 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셈이다. 그냥 멋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친 밑바닥 상상력으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멋진 대사인데, 그런 맛깔스러움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좋은 출판 품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히 멋진 일이다. 인생에 대한 교훈적 성찰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폼 나는 쾌감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의미의 좋은 작품이고, 그 분야에 있어서 『씬시티』는 추종불허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사족: 작품 외적인 문제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 역시 성의가 아쉽다. 예를 들어 마치 밀러가 ‘데어데블’ 캐릭터의 창작자인 듯 이야기한다든지, 87년작 『배트맨:원년』을 『씬시티』 이후에 창작했다고 하는 등 사실 관계의 오류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출판사 담당자들이 아직은 만화 문화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기에 일어난 현상인 듯 한데, 차차 나아지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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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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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시티 1
Frank Miller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