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블랙코미디, 즉 세상사 – 피노키오 [기획회의 369호]

!@#… 빈슐뤼스의 스타일이라면 음… 크리스웨어가 아이콘 도안과 우울-외로움을 줄이고, 악취미를 조금 더 막 달리는 것을 상상해보면 됨.

 

탐욕의 블랙코미디, 즉 세상사 – [피노키오]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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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기획회의 050516]

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한국에서 동화(童話)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사실 원래는 그다지 아이들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위해서 만든 이야기라고 보기 힘들다. 민담과 신화들이란 것은 애초부터 인간사의 여러 모습들에 대한 비유로 가득차 있고, 당연히 성적이든 폭력적이든 미성년자 관람불가일 법한 내용이 많을 수 밖에. 사실 한발 더 나아가서,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이미 정설로 굳어져있다. 일정한 나이를 정해놓고는 그 이하의 사람들을 일종의 사회적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종자로 취급하는 행태가 고래부터 항상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은 ‘동화’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세상살이의 회한을 깊이 담고 있는 잔혹한 이야기들인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는 한다. 그 때 흔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대적인 ‘어린이’ 개념을 애써 도입해서 모든 사회적 요소들, 잔혹한 표현, 성적 뉘앙스 등을 억지로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 동화는 무척 재미없어질 뿐만 아니라 핵심 메시지까지도 퇴화해버리지만, 그 빈 자리에는 꿈과 낭만, 보수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을 적당히 끼워넣는다. 다른 방법은, ‘알고 보면 잔혹한 동화’ 투로 선정적인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변태성 악취미에 가까운데, 원래의 동화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쇼킹한지를 가지고 오히려 상업화를 시켜서 성인독자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화의 본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먼 동화속 유럽 나라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벼락출세를 꿈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동화는 멍청하지 않다. 권선징악에는 댓가가 따르고, 어떤 억울함도 100% 해소되는 일 따위는 없다. 이해관계의 충돌과 약육강식이 선악의 모습으로 치환될 뿐이다. 교훈은 제3자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이입을 통해서 삶을 대처해나가는 힌트를 얻음으로서 얻어낸다. 이런 요소들이 빠진다면, 동화는 그 잘못 붙여진 이름 그대로, 온실속 아이들을 위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강경옥의 <버추얼 그림동화>(콘텐츠와이드/2권 발매중)는, 이러한 동화 본연의 목적의식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서 상상 속 세계와 가상의 설정을 통해서 현실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온 작가이기에, 이런 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작가가 계속 관심을 보여온 ‘무덤덤한 주인공이 감정을 획득해나가는, 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봉인하고 있던 감정을 재발견해내는 과정’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결합하면서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내용은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주인공들이 어떤 수상한 가게에 들러서 가상현실 기계로 특정한 동화 내용을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체험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세상에서 일어났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매번 주인공은 달라지고 그들의 사연과 경험하게 되는 동화 역시 바뀌지만, 변함없는 것은 가게주인 뿐이다. 이들이 겪게 되는 동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면서도 왠지 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정도의 이야기다. 아예 과격하게 인물들을 통째로 재해석을 해버리는 것 없이, 그냥 은근하게 친밀하다. ‘라푼첼’이야기라든지, ‘푸른수염’이라든지 말이다.

매번, 동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행동거지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것을 반영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진짜 감정을 끄집어내서 직면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그 등장인물이 아니고 단지 가상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처지를 그대로 경험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물론 동화속 해피엔딩이 항상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선을 그어주고 있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나름의 교훈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주인공들은 동화를 통해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현실 속에서 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충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버추얼 그림동화>의 동화체험은, 사실상 전형적인 심리치료 과정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와 불안, 우울 증세 등에 대한 치료적 접근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잔혹동화의 탈을 쓴 심리치료 만화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 주로 과거 작품의 복간에 머물 뿐 확실한 신작 장편이 나오고 있지 않아서 독자들을 아쉽게 했던 한국 순정만화계의 중견인 강경옥의 복귀작으로 이 작품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다. 엄청난 혁신을 가지고 왔다기 보다는, 강경옥 만화가 너무 낡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단점 역시 원래 성향 그대로다. SF의 외피를 쓰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주선이나 물리학적인 개념에서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말았던 <별빛속에>의 악명(?) 그대로, <버추얼 그림동화> 역시 디테일에 대해서는 무척 무신경한 편이다. 동시대적인 감수성보다는, 근본적인 감정과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림체나 시각연출 역시 현대적 감각의 스타일리쉬함보다는, 감정선의 변화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기에 한눈에 보기에 ‘80년대틱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경옥 만화의 올드팬들에게는 나름의 친숙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지만,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작품이 연재되던 엠파스 연재만화란이 사업을 접어서 현재 연재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어디서 끝맺어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에피소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오랜만에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두 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행본이 많이 팔리면 창작 지속에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런 상황과 관련된 동화는 없으려나,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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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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