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시작하는 풍경에 관하여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041231]

!@#… 이번회부터는 좀 더 형식을 자유롭게 가려고 시도. 특정 작품 하나 찍고 가는 게 아니라 폭넓게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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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는 풍경에 관하여

  일본 만화, 그 중에도 현대 일본을 배경을 하고 장기연재 중이며 에피소드 방식의 전개를 지니는 작품들을 보면, 이맘때면 소위 ‘연말/정월 이벤트’라는 것이 종종 있다. 주인공들이 모여서 기모노를 입고 신사에 새해소원을 빈다든지, 깃털치기 놀이를 하며 정월 도시락을 먹는다든지 하는 기초설정을 우선 놓고 그 위에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것은 일종의 장르적 규칙인데, 발렌타인 데이 즈음에 괜히 쵸콜렛 선물을 놓고 남녀주인공들이 고민스러운 연애모드로 돌입하는 것과 함께 명절 이벤트의 양대산맥이다. <유리가면> 같은 고전이든, <아즈망가 대왕> 같은 최근의 4칸 개그 드라마물이든 말이다.

  민족감정이라는 애매모호한 가치를 내걸면서 일본 만화를 애써 마치 한국만화인양 억지로 번안(?)해서 들여오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작품들의 경우, 이 신년 이벤트는 항상 애물단지 신세였다. 주요 캐릭터들이 난데없이 기모노를 입고 일본 전통 풍습을 따르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아예 에피소드를 통째로 빼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전개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엄청난 수정신공, 즉 장면 위에 덧칠을 해서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버리는 편집기술으로 기모노를 한복으로 개조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 경우 무려 한복을 입고 깃털치기 놀이를 하고, 일본의 끈적 쫄깃한 스타일의 떡을 먹는 엽기적인 문화 퓨전 현상이 발생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봄직한 질문은, 과연 현재의 한국만화에서는 한국의 설 풍경을 어떻게 소재로 활용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거의 써먹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서 패배주의적인 시각의 소유자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설 전통이 미미해졌기 때문이다”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이라 할지라도 만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다들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는 일은 그다지 없다. 다만 하나의 장르적 규칙으로 승화를 시킨 것 뿐이다. 한국만화에서 그 소재를 제대로 못다루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현실, 스스로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작품 속에 반영해내는 것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가족친지들이 모여서 차례 지내는 풍경, 설 귀향으로 쓸쓸해진 도심에서 호호 불어가며 떡국을 먹는 궁상 같은 훌륭한 이벤트 소재를, 개발도 안해보고 그냥 날려버리면 너무도 아깝다. <우주인>(이향우 작) [주: http://www.uzuin.com 의 ‘우주인’ 연재 또는 단행본으로 1권 14화를 찾아보시길] 의 신년 에피소드 같은 멋진 이벤트로 한국적인 장르 컨벤션들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희망을 품어본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경향신문 04.12.31]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독자의 사랑에 보답하다 – <슬램덩크> 후일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041217]

지난주, 일본 카나가와 현에 있는 한 폐교가 갑자기 다시 학생들로 붐볐다. 이 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스포츠 속에서 우정과 성장을 나누던 멋진 학생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만화 작품 한편을 기리기 위한 이벤트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한국에서도 엄청난 붐을 몰고 온 바 있는 농구만화 <슬램덩크>(이노우에 타케히코)고, 이번 이벤트는 1억권 판매 돌파를 자축하기 위한 팬서비스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성장하는 작품, 자기 작품과 그 속의 주인공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꾸어낸 작가. 여하튼 30여권의 시리즈로 단행본 1억권을 돌파한 것은 만화시장이 거대한 일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증명해주는 하나의 척도인 셈이다.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작가가 시작한 작전의 첫번째는 바로 일간지 전면광고였다. 어느날, 일본의 주요 종합일간지에 주요 캐릭터들이 각각 한 명씩 신문 한면을 통째로 채우며 멋진 모습의 스케치로 등장해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통 큰 팬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이었을 뿐. 두번째 이벤트는 온라인에서 벌어졌다. 주인공들의 농구경기 장면이 펼쳐지고, 관중석에는 관중이 가득하다. 그리고 팬들은 사이트에 등록해서, 자신만이 아바타를 관중석에 앉히고 응원 메시지를 띄울 수 있도록 했다. 즉 북산(쇼호쿠) 고교 농구부 경기의 하이라이트에 직접 가서 응원을 하는 기분을 만끽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벤트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지난주의 폐교 이벤트였다. 폐교에 들어가서, 23개 학급의 칠판에 만화를 그린 것이다! 작품에 등장한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23개의 짦은 에피소드로 칠판위에 분필로 그려냈다. 그것도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그 동네에서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이미지, 학교라는 공간, 그리고 나아가 칠판위의 분필 낙서가 가지고 있는 그 자유분방한 에너지까지. 뭐랄까, <슬램덩크>라는 작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를 펼친 것이다(공식 사이트에서 제작 동영상을 볼 수 있으며, 만화 내용은 칠판색 그대로 편집한 특별 한정판 엽서세트로 소량 상품화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며칠간의 ‘꿈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칠판을 지우는 마무리까지. 작품 자체의 분위기와 주제의식과도 자연스럽게 일맥상통한다.

만화라는 장르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필살기라면 바로 독자와의 긴밀한 호흡이다. 이번 슬램덩크 이벤트는 그 점을 명확하게 짚어준 최고의 사례다. “1억권 팔렸으니 이런 이벤트도 하지” 라고 푸념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이벤트를 할 정도의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에 1억권 팔린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독자들과 작품에 대한 사랑으로 따지자면 10억권이라도 부족할 한 만화 작가의 성의에 박수를 보낸다.
[경향신문 04.12.17]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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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 – <루쿠루쿠>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악의 본질 – <루쿠루쿠>

정의의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명백하게 잘 나누어져 있고 그 중 결국 선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그 ‘선’이 하필이면 자신들을 위해주는 자들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런 선악 구도를 가장 확실하게 상징화시킨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천사와 악마, 각각의 군단의 대격돌, 그리고 예언되어 있는 천사군의 승리. 이야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동안 사랑받아온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 궁극적인 구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풍속도는 이런 명쾌한 이야기와는 꽤 거리가 멀다. 선악의 경계선은 어디며, 선은 과연 어떤 경우라도 선인가? 뭐, 꼭 머리를 쥐어뜯으며 엄청나게 철학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는 없다. 위트와 풍자, 뼈있는 농담으로 이런 지점들을 꼬집어내는 것이 더 핵심을 짚어낼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일본 작가 아사리 요시토의 <루쿠루쿠>(3권 발행중 / 북박스)가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는 ‘지옥의 공주’로 불리우는 강력한 악마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남자주인공의 집안일을 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지옥이 너무나 과밀인구가 되어버려서, 악마들이 나서서 인간들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선도해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저의를 수상하게 여기는 천사들 역시 인간계로 내려와서 이들과 맞서려고 하는데, 스님의 몸에  빙의되어 인간계로 내려온다든지 하는 등 좌충우돌 투성이다. 악마들이 쓰레기를 줍고 할머니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데 천사들이 악마의 ‘계략’을 막으려면? “쓰레기를 버리고 할머니를 넘어트려야지! 에에…자, 잠깐만!”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히는 천사의 모습이 주는 촌철살인의 블랙유머가 일품이다. 학원 코미디물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할 법한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그림체와 연출 속에 담겨져 있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다.

어이없이 웃다보면, 뜨끔해진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지!”라는 천사의 대사가 이상하게도 낯익기 때문이다. 전쟁을 입에 물고 다니는 어떤 미국 침팬지를 떠올리든, 아직도 좌파공세 따위가 잘만 통하는 어떤 후진 사회를 떠올리든, 인터넷 게시판에서 뛰노는 악플러들을 떠올리든 말이다. 선과 악을 나누고, 하필이면 자신이 서있는 쪽이 선이라고  굳게 믿는 자들. 사실관계 확인과 토론이나 근거제시에는 인색하면서, 타인비방과 자기미화에는 놀라운 정열을 보여주는 자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단 하나 확실한 ‘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을 악으로 몰아붙이는 행위 그 자체다. 바로 그런 악이 뿌리 뽑히는 권선징악 정도는 꿈꿔 보아도 좋지 않을까.
[경향신문 04.12.03]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만화, 온라인, 커뮤니티 – <러브콘서툰>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그간 쌓인 원고 창고대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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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온라인, 커뮤니티 – <러브콘서툰>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뉴미디어’라는 단어만큼 진부한 것이 또 있을까. ‘뉴’미디어의 대표주자로 꼽히며 한껏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인터넷 (및 그 이전부터 있었던 컴퓨터 통신 일반)과 그것이 만들어낸 의사소통 시스템의 세계인 온라인은 이미 단순한 기술적 용어가 아닌,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쌍방향성에 기반한 참여니 원본과 카피의 경계 상실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매체 이론가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담당구역으로 넘어와 버렸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일반 사용자들과 가깝게 살을 맞대고 있는 대중문화라는 분야에서,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향유 양식들을 진화시키고 있다.

온라인 대중문화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커뮤니티성이다. 온라인 세상의 향유자들은, 온라인을 돌아다니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들이 소속감을 느끼는 공동체에 열심히 퍼나른다. 메일로 보내고, 동호회 게시판에 올리고, 블로그에 올린다. 그리고 올라온 것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감상을 올리거나, 아니면 올린 사람에 대한 창찬/비난을 하면서 더욱 커뮤니티의 내적 소통이 강화된다. 창작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작가들의 온라인 동호회 결성을 통한 정보 및 노하우 교환, 공동 프로젝트 진행 등이 프로와 아마투어의 경계선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온라인이라는 공간과 여러모로 상성이 상당히 좋은 매체인 만화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2003년에 시작된 ‘러브콘서툰’(http://www.lovetoon.co.kr)라는 자선 콘서트 프로젝트가 좋은 사례인데, 온라인에서 만화연재를 하거나, 그리고 비록 스포츠 신문 등 종이지면에서 연재를 하고 있지만 (언론사 홈페이지를 거치면서) 사실상 온라인에서 더욱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가들이 주축을 이루며 시작했다. 러브콘서툰은 사실 원래는  젊은 작가 몇 명이 한바탕 유쾌한 음악 공연을 펼치면서 불우이웃 돕기 같은 좋은 일을 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런데, 온라인 입소문 등에 힘입어 독자와 작가 양쪽으로 모두 높은 호응을 얻어, 행사 직전에는 참여 멤버가 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행사가 성황리에 끝난 후에도 커뮤니티의 결속력은 계속 유지되어, 어느 틈에 젊은 만화가들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가운데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올해 11월 21일, 이 커뮤니티가 준비한 두 번째 행사인 <2004 러브콘서툰>이 펼쳐질 예정인데, 이 행사를 홍보하기 위한 릴레이 만화와 홍보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열심히 온라인에서 ‘펌’ 당하고 있다. 이미 사전홍보 단계부터, “만화라는 것의 매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작년 행사보다 한층 발전한 모습이다.

대중문화는 창작이든 향유든, 결국 취향으로 의기투합하여 같이 즐기는 자의 몫이다. 온라인이라는 환경을 만나면서, 그것이 좀 더 명확해진 셈이다.

 

[경향신문 04.11.19]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어떤 질서에 관하여 – <니나잘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마찰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갈등을 해결해야만 하는데, 모든 것이 원만한 합의로 이루어지면 참 좋겠지만 많은 경우 강제적으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 선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강제적인 권위와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누구를 감시하고 심판할 것인가에 대한 질서가 필요하고, 그러한 권력의 양을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요구된다. 서열, 계급, 직급, 사회원로, 뭐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국산 학원폭력물 가운데 가장 오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역시 <니나잘해>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명문 학생 주먹조직 스콜피온, 그 리더인 이후, 그리고 차기 리더 후보 3인방의 수련과정이 전체 스토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 이런 내용은 장르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학교의 주먹 조직이 있고, 그 조직 내부에서 또는 다른 학교 조직들과의 마찰 속에서 완력이 탁월한 주인공들이 싸움을 통해서 자기 위치를 굳혀나아가는 이야기. 그 와중에는 우정도 있고, 배신도 있고, 연애담도 있고, 개그도 있다. 하지만 핵심적으로는 조직적 서열 관계 속에서 실력을 증명하고 점차 위로 올라가는 이야기로서, 성인만화의 가장 인기있는 장르인 조직폭력물(넓게 보자면, 무협만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범주에 속한다)을 청소년용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이들의 조직이 아예 학교의 평화와 안녕을 다스리는, 일종의 공인된 조직이라는 것이다. 완력이라는 단순명쾌한 비교척도와 선후배라는 서열개념이 결합되어, 완연한 힘에 의한 질서를 구축한 이상적인 조직형태. 심지어 문제아 집단이 아닌 치안유지자로 받들어지기까지 한다.

오한이 든다.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폭력은 나쁜 것이니까? 아니다. 이유는 좀 더 단순한 곳에 있다. 바로, 누구나 그러한 방식의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도 아닌, 단지 질서를 위한 질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당연한 미덕으로 떠받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즐겁게 만화를 읽다가도 난데없이 머리 속에는, 관습헌법 같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논리를 가져다 붙이면서 자신들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질서’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괴인들과, 여기에 아무 생각 없이 환호하는 수많은 박테리아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다. 이왕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싶어서 뽑아든 장르오락물인데… 현실도피에 또다시 실패했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1. 5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수구의 현장 – <나라가 불탄다> 필화 사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역사를 다루는 만화, 아니 모든 창작물의 앞에는 지뢰밭이 놓여있다. 그 지뢰의 이름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고 하는데, 덕분에 이러한 장르에서는 허구의 창작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렸다. 확실히, 사람들은 픽션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은근히 민감하게 반응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패턴은 얼핏 볼 때는 결국 창작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좋고 훌륭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 내막은 약간 더 노골적이다. 사람들은 실제와 다를 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든 아니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될 때” 싫어함을 표명하기 때문이다. ‘임나본부설’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감을 표명하면서도, 한민족이 아예 대륙 중국의 절반 쯤은 먹고 들어갔다는 식의 <천국의 신화>에 대해서는 ‘픽션이니까’라고 대범하게 넘어갈 줄 아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인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한 역사(?)만화가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나라가 불탄다>라는 작품인데, <멋진 남자 김태랑> 등 ‘근성과 노력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남자’ 시리즈로 수십년간 정상급 인기 만화가로 군림해온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중반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당연히 만주국, 관동군 등 당시의 역사적 배경들이 중요하게 펼쳐지고 있다(물론 이번 작품 역시 성공의 길을 걷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의 연재분에서 남경대학살이 소재로 다루어진 것이다. 일본군이 남경에서 양민을 대량 학살한 이 역사적 사건은,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분적 기억상실의 대상이다. 그런 일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소위 우파라고 불리우며 일본이라는 시스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들. 단순한 신인작가가 아니라 충분한 고정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중견 인기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마도 더욱 위기의식을 느끼며 발끈했으리라. 그리고 출판사에는 항의전화가 쇄도하고, 급기야 출판사는 ‘단행본에서는 수정하겠습니다’라고 선언을 했다가, 얼마 후 아예 연재중단 선언을 했다. 나라가 불타지는 않았지만, 지면은 필화 속에서 불타 없어져버린 셈이다.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교훈을 얻을 때까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격언이 있다. 그런데, 그 역사를 지금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의도적으로 다시 불러들여 오려는 세력이라면 어떨까. 애써 얻어낸 교훈마저도 부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의 픽션을 역사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괴이한 차선위반 역주행을 우리는 ‘수구’라고 부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다 건너 나라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0. 22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세계정복의 목적-<몬스터즈>[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자본주의는 정글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지표로 교육되고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거의 매트릭스급인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 급물살의 흐름에 같이 뛰어들지 않고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해본다는 것은 도태라는 험악한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근래 나온 국산 SF(?) 개그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몬스터즈>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한 꽤 날카로운 통찰을 해학적으로 던져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정복 일상물’이라고 불리우는 범주의 작품인데, 세계정복을 꿈꾸는 거대한 악의 조직과 말도 안되게 강한 정의의 히어로들이 사실은 우리들의 아주 평범한 생활세계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며 몰래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엄청난 싸움들을 벌이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이런 설정에서는 엄청나게 하드한 스릴러물이나 대놓고 웃기는 개그물 중 하나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데, 운 좋게도 <몬스터즈>는 후자에 속한다(진지한 SF를 표방하기에는 어딘지 헐렁한 그림체, 패러디와 반전이 몸에 베인 연출력은 개그물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를 증명해준다).

이 작품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오메가 박사는, 광화문을 점거하고는 시민들에게 생중계로 동화 한편을 들려준다. 한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팔찌를 주고 팔찌의 개수에 따라서 먹을 것을 퍼주었더니 원숭이들이 인간들처럼 아귀다툼을 하며 앞다투어 주인에게 복종하였다는 우화. 인간의 우매함, 사회의 무질서함에 대한 통찰력을 동원한 것이다. 자, 이제 악의 박사는 깨끗하고 통제된 신세계를 주장하며 세계정복을 선언하겠지? 아니다. 이 만화는 뼛속까지 개그만화니까. 오메가 박사의 목적은 원시사회로의 회귀다. 단순하고 행복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갱생의 길이다!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렇게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전무쌍한 악의 화신을 본 적이 있던가.

권력의 차별화, 그것에 따른 물질의 불균등한 분배, 다시금 소유물에 따른 권력획득으로 이어지는 나선 구조는 섬뜩하다. 어떻게 그 말도 안되는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주류 정치경제나 교육에서 여기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멈춰버린 지금 이 시대, 아직도 꿋꿋하게 딴지를 날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즐김의 영역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뼈있는 농담이야말로 최고의 힘을 지닌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기이한 세상사 속에서, 만화라는 절대고수가 그 역할을 맡아서 강호를 평정해줘야 할 타이밍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0. 8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특별한 일상의 조건-<구미의 유학만화>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최근 몇 년 동안 온라인 세계에서 새로운 붐을 일으킨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의 특징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뭘까? 바로 일상성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문분야의 엄청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웹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나 생각들을 보고 즐거워한다. 물론 생각해보면 시시콜콜한 일상사로 수다를 떨거나 안주거리 삼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현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온라인의 발달, 그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여러 기술과 서비스의 도입으로 인하여 한층 더 개인화된 미디어가 가능해진 덕분에, 잡담의 네트워크는 더욱 광대해졌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상이 멋진 이야깃거리가 되기 위한 조건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평범한 일상은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좋은 이야깃거리일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즉, 이야기로서 매력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과는 다른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르지만 같은’ 일상성이 필요한 것이다.

‘구미의 유학만화’(http://chkoomi.cafe24.com)라고 제목이 붙여진 한 사이트에는, 한 평범한 일본 유학생의 일상적인 생활 관찰(?) 일기 만화가 연재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특히 ‘교포가족’이라는 시리즈다. 교포 3세인 작가 자신과 가족들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첫 화부터 ‘강제 징용당했다가 허리디스크 덕분에 무사히 돌아온 할아버지’라든지, ‘한국말 못하는 아버지와 일본말 못하는 어머니의 결혼’ 같은 범상치 않은 사연들이 둥그런 구미 과자 캐릭터로 표현되어 독자들을 단번에 미소 짓게 만들어버린다.

최근 이 시리즈는 93년 일본의 쌀 부족 사태를 가족 경험담으로 풀어냈는데, 식량 자주성을 부르짖는 뭇 세미나 수십회보다 더 명쾌한 설득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일상성에서 오는 공감의 힘이 있다. 가족 밥상의 밥맛만큼 일상적이고 공감 가는 방식이 어디 있겠는가! 동시에 그것은 다른 환경의 일상성인 덕분에, 소재의 매력 역시 돋보일 수 있다. 즉 공항에서 일본 방문 손님들이 쌀을 한 포대씩 들고 오는 대목에서 박장대소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일본이라는 ‘다름’과 교포, 또는 가족이라는 ‘같음’이 주는 균형관계 속에서 일상성은 특별한 재미를 확보한다.

타인의 생활 속에서, 나의 생활과 같으면서도 다른 일상성을 찾아나서는 여정. 때로는 그 여정 자체에 중독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풍속도- 아니 우리 일상의 일부분인 셈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9. 17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군대라는 기억의 함정 – <돌격 앞으로>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인간의 기억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그것도 지금 순간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살짝 바꾸어서 기억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대체적으로 ‘미화’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과거는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이상적인(즉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안식처로 활용되기 때문에 아름다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덕분에 쓰리디 쓰렸을 젊은날의 고뇌는 청춘의 열정으로, 가슴찢어지는 실연은 성숙을 위한 디딤돌로 재해석되곤 한다.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기억해두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뇌세포들을 엉뚱한 조합으로 새로 이어붙이는 것이다.

군대 생활, 일명 ‘한국 남자들의 궁극적인 집단적 공유기억’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있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병영생활은 뭐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당시의 가학/피학적인 고통은 최고의 안주거리로 즐거움의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 심지어 전우애를 다질 수 있었던 뜻깊은 시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듯이, 군대를 다루는 만화들 역시 대부분 과거의 턱없는 미화라는 함정에 깊숙이 빠져있다. <빤빠라 선착순>이나 <굳세월아 군바리> 같은 작품들이 묘사하는 인간적인 군대 생활의 이면에 담겨있는 원칙인 셈이다. 보다 흥미로운 경우는 마재권의 4칸 만화 <돌격! 앞으로>(잡지 <부킹>에서 99-02년까지 연재, 단행본 전 4권 발간)의 경우다. 이 작품은 처음 시작 부분에서는 군대에서 어처구니 없는 결정 때문에 이어지는 황당한 결과를 핵심으로 하는 짤막한 개그로 신선한 웃음을 선사했다. 즉 군대라는 기형적인 폐쇄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웃음꺼리로 삼아주는 통렬한 블랙코미디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다.

하지만 연재가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이야기는 주인공들 – 즉 내무반 성원들끼리의 캐릭터 드라마로 변해갔다. 그리고 캐릭터 드라마로 변하면서 다시금 군대만화가 흔히 빠지는 그 함정 – 아름다운 전우애와 추억 –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들어갔다. 그것이 당시 통신 게시판에서 다수 올라왔던 “군대를 희화화하다니! 너 방위 출신이지?” 따위 독자 반응들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한계 때문인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여전히 군대라는 기억을 ‘더럽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미묘한 습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 풍속도 속으로 결국 돌아와버렸다는 점 뿐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9. 4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대서사가 붕괴할지라도: <저수지의 걔들>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이번 것은 여차저차하다보니 내용이 좀 어려울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담당 기자님은 오히려 이번 것이 평소보다 더 쉬웠다고 하시더군요. -_-;;; 여튼 요새 ‘요즘 젊은 것들은 긴 안목이 없어’ 투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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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가 붕괴할지라도 – <저수지의 걔들> 이동욱 作

90년대, 이 땅의 젊고 똑똑한 사람들의 관심분야가 급격하게 달라졌던 때가 있다. 그것이 소련붕괴 때문이니 자본주의적 개인주의가 만연해서 그랬다느니 나름대로 분석들을 했는데, 여튼 확실한 것은 결과로서 나타난 한가지 현상이었다. 바로 “대서사의 붕괴”인데, 포스트모던이니 시뮬라크르니 하며 폼잡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커다란 흐름이라든지, 중후장대한 구조라든지 하는 것들이 어느틈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세상사는 큰 법칙과 통찰로 이루어지기보다는 파편화된 요소들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만화로 치환해보자면, 중후장대한 스케일의 드라마가 점차 쇠퇴하고 짧은 호흡과 작은 성찰의 찰나적인 이야기들이 득세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 최근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도 꽤 나오고 있다 – “장편만화의 위기”라는 꽤 자극적인 말로 신문지면에까지 올라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은 약간 다르다고 생각한다. <저수지의 걔들>이라는 작품이 좋은 예가 된다. 우주선을 타고 각 행성들을 여행하는 탐험단의 모험을 코믹하게 그려나가고 있는 최근 주목할 만한 작품인데, 짦막한 4칸만화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4칸만화는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행성에서 일어나는 모험은 보통 4칸만화 8~12편 정도가 내용적으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 편에서 소개된 캐릭터는 한참 나중의 모험에 다시 재등장하기도 하면서 시리즈로서의 전체적 맥락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원래 미국에서 현대 신문만화의 시작과 함께했을 정도로 오래된 방식이지만, 몇년전 <아즈망가대왕>의 히트로 인하여 재발굴된 형식이기도 하다.
대서사가 파괴되고 장편이 부진하다고 해도, 그것은 갑자기 작가들이 이전보다 게을러져서도, 독자들이 얄팍해져서도 아니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읽어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전의 장편 개념이 하나의 스트레이트한 스토리로 그런 목표를 향해서 직선질주를 했다면, 지금의 짧은 호흡 작품들은 하나씩 벽돌을 쌓아가듯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하는 작품들보다는 실패하는 작품들이 많을 뿐이다.
결국 현실세계도 마찬가지다. 직선적인 줄거리 – 즉 중후장대한 사회규범의 틀을 통해서든 다양한 일상적인 부분들의 결합을 통해서든, 결국 합리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전체적인 사회상으로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대서사의 붕괴가 아니라, 그것을 시대의 흐름이니 도통 이해가 안되는 콩가루 사회이니 말하며 변명꺼리로 삼고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시키는 우리들의 세태일 뿐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8. 21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현실적인 감상주의: <채널 어니언>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최근 수년간, 소위 에세이툰이라고 불리우는 장르가 따뜻하고 서정적인 메시지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주의적 만화들 대부분이 흔히 빠지곤 했던 함정은, 바로 따뜻한 감정의 일방적 강요라는 점이었다. 적당히 둥그런 그림체, 적당히 따뜻한 세상 사랑의 이야기들, 그리고 하나의 에피소드를 마무리짖는 훈계조의 멘트. 꽤 냉엄한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다.

  <채널 어니언>이라는 만화는 에세이툰의 대히트가 일어난 시기보다 너무 일찍 나왔던 작품인데, 감상적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한 귀중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채널 어니언>이 감상적이 되는 방식은 부드러움과 따뜻함의 편식이 아니라, 현실적인 일상의 틈새에서 문뜩 피어나오는 작은 상상과 망상이다. 그리고 각 에피소드의 마무리는 적당한 순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것은 가상 공간이 아닌, 지금 우리가 서있는 구체적인 세계 – 예를 들자면 ‘서울시 지하철 4호선 동작역을 바라보는 전차 차량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언제’ 감상에 빠지는지에 대한 통찰 역시 돋보인다. 현대 사회는 결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순간에 이성의 끈을 놓치는 것을 관대하게 허용해주는 곳이 아니라서, 결국 감상적이 될 순간은 한 박자 늦게 찾아온다. 그것은 일상의 피곤이 정점을 이루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홀가분하게 맥주 한 캔을 따놓고 홀짝거릴 때, 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이 안오는 새벽녘의 편의점에 들를 때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감각 덕분에, 주인공 어니언군이 감상에 빠지는 것은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 논리와는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만으로는 못 전달했던 부분들을 마저 소통한다는 말이다. 무작정 따뜻한 격언 속으로 빠져드는 잠시동안의 도피가 아닌, 누군가와 – 때로는 미래의 자기 자신, 때로는 심지어 ‘공포의 대왕’과 – 나누는 마음 편한 대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다시 일상의 현실로 복귀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다.

  감상적인 현실도피가 유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풍속도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적인 감상주의를 즐겨보는 것이 더욱 큰 재미를 준다. 여하튼 그것이 지금 우리들 자신의 모습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8. 7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소통의 중개자 무당…말리作 <도깨비 신부>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이번주에도 어김없이,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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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풍속사]소통의 중개자 ‘무당’…말리作‘도깨비 신부’

아이러니컬하게도,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오히려 오컬트가 더욱 각광받는다. 다양한 현상들이 발달된 과학으로도 여전히 설명이 안 되고 있기에 더욱 더 초자연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대중문화가 그런 매력 덩어리를 절대 놓칠 리가 없다. 무엇보다 표현적 자유도가 높은 만화야말로 오컬트와 환상의 궁합을 이룰 수 있다.

최근 발간을 재개한 말리의 ‘도깨비 신부’는 발표 당시부터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으로 몸주·도깨비·굿 등 전통적인 무속 개념들을 현대적 드라마 구조로 섬세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주인공은 무당의 피를 타고난 여고생인데, 각종 신들과 도깨비들이 보이고 그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면서도 서서히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며 세상에 도움 되는 일도 해내는 성장 드라마인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 신부’의 진정한 미덕은 ‘한국적 전통’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당에 대한 민속적 고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현실에서 오컬트가 가져야 하는 의미를 보여준다.

사실 오컬트의 핵심은 미지의 힘이나 존재들과의 조우에 있다. 때로는 그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격퇴해야할 공포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속칭 퇴마물).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아마도 그들은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완전히 ‘다른’ 자들일 뿐일 것이다. 우리의 규칙·상식과는 전혀 다른 자들이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피해를 입히기도 스스로 피해를 입기도 한다. ‘무당’이 퇴마사와 다른 것은 바로 이들 간의 대화를 이끄는 중재자라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해주기까지 한다.

무당은 서로 다른 세계, 다른 문화 사이에서 조율을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나와 다른 자들을 적으로 돌려서 화려하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오해를 풀어나가며 돕고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당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영적 존재들은 고사하고 육신을 지닌 사람들하고도 도통 말이 안 통하는 곳이니 말이다.

부당한 침략전쟁도, 교통대란도, 개혁 후퇴도 어쩌면 사람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자신의 위세만 발휘하는 마치 ‘저 세상’에 속한 듯한 존재들과의 오컬트적인 마찰인지도 모른다는 몽상을 해본다. 실력 좋은 무당들이 나와서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판 씻김굿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훌륭한 무당 즉 세계와 세계를 이어주는 중재자가 절실한 한 시대의 풍속도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7. 24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약자 위의 약자 / 엔도히로키 作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 이번 주부터는 경향신문 인터넷 khan.co.kr에서 만화 섹션이 생겨나 만화섹션으로 분류되어 들어가있어서 해피…했는데, 왠걸, 네이버나 엠파스 뉴스 검색을 가보니까 ‘경향신문>속보’로 분류되어 있었다. -_-; 언제쯤 자동으로 해피하게 ‘만화/애니’ 분류로 포워딩될까? 언제쯤 이런 칼럼이 있다는 걸 경향신문 사이트 들어오지 않고도 사람들이 눈치라도 챌 수 있을까…;;;;

!@#… 가끔, 신문에 나온 글에서 문장이 살짝 꼬여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보통 그건 분량 조절을 위해서 편집 단계에서 담당자께서 축약을 하다가 있을 수 있는 마이너한 사고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시기를…-_-; 여기 올리는 건 원래 버젼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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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위의 약자: , 엔도 히로키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세상의 진리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확실히, 죽을 때 까지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이 괴이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정말로 ‘나는 강하니까 너희 약자들을 뜯어먹을꺼야’라고 달려드는 것일까?

일본작가 엔도 히로키의 <에덴>이라는 작품은 이 질문에 대한 잔인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다른 약자들이라는 것. 약자라는 것을 방패삼아서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들을 괴롭힌다는 것. 이 작품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물인데, 탄탄한 연출력과 스타일리쉬하지는 않지만 섬세한 그림체로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고 차가운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수작이다. 작품의 시작은 인류를 멸망시킬 위력의 전 지구적인 바이러스라는 다소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내 작가는 본색을 드러내는데, 사실 이 바이러스는 인류의 10% 가량 밖에 감소시키지 못하고 잡힌 것이다! 그리고 병을 잡는 과정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계정부가 만들어지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 등 국제적 마찰이 심화된다. 여전히 사회의 여러 모순과 차별은 그대로이거나 더욱 커져있다.

이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도는, “나를 억누르던 강자가 나중에 알고보니 또 다른 약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남녀관계, 사회계층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 일화에서, 최광문이라는 한국계 등장인물이 이렇게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어린시절 나한테 김치냄새나는 녀석이라고 돌을 던진 건 모두 나처럼 가난한 집 애들이었어. 부잣집 아이들은 그 광경을 단지 웃으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지.”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강자에게, 또는 약육강식의 시스템에 돌린다. 자신의 의지로 직접 하고 있는 비열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도매급으로 회피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평범한 약자들이 ‘어쩔 수 없었다’라고 변명하며 친일 부역을 했으며, 나치당원이 되어 유태인들에게 돌을 던졌으며, 그 당시 광주를 빨갱이 폭도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오늘날, 약소국을 자처하는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가, 미국이라는 절대강자에게 기대어 ‘할 수 없이’ 침략자 동지로서 중동으로 출동한다. 좋은 만화는 만화 자체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때로 그것은 아프다. 우리 자신들의 비열한 현실을 비춰주는 풍속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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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눈, 우리 모습 – <새댁 요코짱...>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흔히 ‘타자’라고 불리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들이 쉽게 지나치는 일상적인 습관들이 사실은 얼마나 전혀 일상적이지도, 당연하지도 않은지를 탐지해내는 능력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완전한 타인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거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생활을 깊숙하게 같이 겪고 느낄 수 있어야 섬세한 발견이 가능하니까. 따라서 타인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외부인은 아닌 미묘한 균형점 위에 있는 자들이야 말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타자의 눈이다.
<새댁 요코짱의 한국살이>의 주인공인 ‘요코짱’은 앞서 말한 그 중간지점에 서있는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중국유학 도중 만난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살게된 작가가 이곳에서 겪은 여러 가지 신기한 일상을 짧은 호흡의 에피소드로 구성한 만화다. 대충 그린 주인공이라든지 잡담식 전개 등 부담없는 연출에, 일본어에 한글 자막 입히기 등의 기법 덕분에 평범한 일본사람이 일상적 수다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다. 버스를 타며 다른 아줌마들과 경쟁하기, 한국식 가족관계에서 자리 자리잡기… 사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아줌마들의 에너지에 주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더욱이 그것을 은근히 부러움 섞인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것도 그리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런 아줌마 사회에서 아줌마가 되어가는 모습을 웃으면서 자랑하는 모습은 남모를 재미를 준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네 아줌마들이 억척스럽지만 따뜻하고 인정많다는 것은 어차피 우리들도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요코짱의 이야기로 들으면 더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일까? 간단하다. 타자의 눈이 주는 진정한 재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남’이 확인해주었을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입을 통해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바가 맞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심정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요코짱이 묘사하는 한국 아줌마들의 오늘날 모습들에 즐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묘사해주고 있는 요코짱이 ‘타자’라는 사실에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요코짱은 한국인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면 안되고, 매번 오해에 부딪혀주어야만 한다. 요코짱이 ‘우리’가 되면 매력을 잃어버릴테니까.

세계화되었다고 자평하면서도, 실제로는 타자들이 타자로 남아있어주기를 바라는 은근한 폐쇄성이 아직 공존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요코짱의 만화일기가 히트를 치는 2000년대 한국, 우리들의 풍속도다.

(글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6. 18]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2000년대식 소통의 풍경: 유시진의 <온> [경향 ‘만화풍속사’]

2000년대식 소통의 풍경: 유시진의 <온>

  역설적이지만, 우리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란, 일상적인 삶의 방식 자체까지 후다닥 바뀌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가장 뼈져리게 느낄 수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는 사람과 사람이 기술을 매개로 하여 소통을 하는 방식, 즉 통신이다. 십수년전에 만들어진 <영웅본색>같은 영화를 비디오로 볼 때, 조직의 간부가 은퇴한 적룡을 조직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당시에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던 휴대폰 – 아니 이건 숫제 대청마루 디딤돌이다 – 을 건네주는 장면을 보면서 실소를 터트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인 것이다.

  <마니>, <쿨핫>등의 작품들로 강력한 팬층을 형성한 만화가 유시진은 소통이라는 문제를 중심소재로 사용해 왔다. 사람들간의 근본적 차이점,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벽, 그 것에 다시금 안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종종 매우 덤덤하고 소극적인) 노력. 이러한 모티브들이 작가 특유의 차갑고 경직된 화풍 속에서 반복된다. 순정잡지 ‘오후’에 연재중인 그의 작품 <온>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주인공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전생이었을지도 모르는 환타지 세계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만화다. 현대의 주인공 중 한명인 제경은 직업이 환타지 소설가인데, 이것은 소통이라는 하는 측면에서 볼 때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우선 한국에서 환타지소설 작가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배경은 90년대 중반의 PC통신 소설 붐이다. 통신공간 속에서 젊은 세대는 출중한 장르적 상상력과 공개 게시판에서 펼쳐지는 연재에 갈채를 보냈다. 나아가 작가와 독자, 현실과 환상 사이의 간극은 여러 의미에서 점점 더 좁아졌는데, 통신이 아닌 전통적인 종이 출판물의 형태로 나오는 경우까지도 그 경향은 계속 확산되었다. 다소 비약해서 말하자면 주인공의 직종 자체가 90년대 이후의 소통방식, 통신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오늘날, 환타지 소설가인 주인공이 컴퓨터로 원고작업을 하다가 인터넷에 연결해서 메신저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9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여러 만화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삐삐가 핸드폰으로, 나아가 이 작품속에는 CDMA2000 방식의 폴더형 휴대폰으로 바뀐 것도 시대의 풍속도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 제경은 여전히 자신이 진짜로 관심이 가는 대상에 대해서는 술을 사들고 집으로 쫒아가서 직접 대면하는 고전적인 소통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래, 그것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이렇듯 사실 통신기술의 발전은 사람 사이의 소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단지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핵심은 오늘날도, 아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 하다. 그 앞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글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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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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