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크롬 설명만화 한국어판 떴습니다

!@#… 생각만큼 금방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이전에 약속한 바 대로 구글 크롬 브라우저의 소개만화 한국어판을 만들었습니다. 원작만화는 Creative Commons 2.5 BY-NC-ND 규정에 따라서 이동은 자유지만 ND(non-derivative 변형불가)로 되어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원어판을 변형 없이 밑에 깔고 그 위에 한국어판 ‘자막’을 레이어로 겹쳐서 보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번역문 자체가 이미 변형이지만, 뭐 자막판으로 해보라는 아이디어는 애초에 작가분이 제안한 바이며, 구글 본사가 이런 것을 문제삼을 소인배들은 아니니까요. 여튼, 여기 있습니다:

구글 크롬 소개 만화 보러 가기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광고] ‘만화의 창작'(스콧 맥클라우드) 출간

!@#… 옙, 나왔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오지 않습니다.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창작 Making Comics’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만화판은 물론 대중매체 분야 전반에서 표준 레퍼런스 가운데 하나가 된 ‘만화의 이해 Understanding Comics’, 산업에 대한 문제제기와 온라인의 활용에 대한 제시 덕에 HCI 분야에서도 주목하게 만든 후속작 ‘만화의 미래 Reinventing Comics’의 뒤를 잇는, 이 시리즈의 내용적 완성편. 이제 서점에 깔렸습니다. 원래는 제가 참여한 책 같은 것이 나와도 캡콜닷넷에서 별다른 개별 언급을 하지 않는 편인데(…), 이것만큼은 좀 특별 취급. 그냥 특별 취급이 아니라, 특설 해설 페이지까지 마련했습니다: http://capcold.net/mccloud.

그저 기법서가 아니라 창작의 틀 자체를 해부하는 책으로, 전작이 조금이라도 흥미로우셨던 분들이라면 단 1mg의 망설임 없이 지르심이 마땅하다고 단언합니다. 특히 대중문화의 창작 관련 뭇 커리큘럼들은, 이로써 다시금 업그레이드를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 여튼 이로써 뭔가 ‘한 세트’를 완성시켰다는 느낌입니다. 다음에는 저도 거인의 어깨 위에 서야 할 차례겠지요(만약, 부지런할 자신이 있다면).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모집] 구글 크롬 소개만화 한국어판 도와주실 분

!@#… 마음이 동해서, 구글의 브라우저 크롬 소개만화 한국어판을 만들고자 합니다. 만화론 전도사라는 속성에, 이번에 여튼 구글 전도사까지 살짝 겸업을 하게 되는 셈이랄까… 번역이야 물론 제가 이미 작업하고 있는데, 허가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스이기는 하지만 nd(non-derivative)로 되어 있어서, 번역 같은 파생저작물을 만들려면 저작권자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현재 미국 쪽에는 작가(스콧 맥클라우드…)께서 구글 측에 허락맡아보마 해서 답변 기다리는 중이고, 구글코리아에도 따로 허가 문의를 보내놓은 상태입니다. 물론 지금도 번역문을 ‘자막’의 형태로 보이게 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가능하지만(혹은 이미지맵으로 작업해서 말풍선에 포인터를 가져가면 한국어 말풍선이 뜬다든지), 역시 가급적이면 온전한 한글본을 해보고 싶습니다. 여튼 그래서 문의:

1) 번역문 드리면, 예쁘게 식자 해주실 분 찾습니다.

2) 혹은 결국 구글이 허가를 안해주거나 아니면 결정이 너무 시간이 걸리면, 위에서 이야기했듯 HTML로 이미지맵 작업을 해주실 분 찾습니다.

생각 있으신 분 리플 달아주세요.

[9.10.추가: 번역고 완료, 식자도와주실 kay님께 넘겼습니다.]
[9.12.추가: 유감스럽게도 담당자분에게 구글코리아측은 허가 권한이 없다고 연락 왔습니다. 본사에서 승인받을 수 있도록 계속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역시 당장은 원본을 유지하는 우회적 인터페이스로 할 수 밖에요.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인도랑 영어로 맞짱뜨자

!@#… 솔직히, 영어로 일반 과목 교육 이야기하는 것은 웃고 넘어갈 만한 정도의 이슈라고 봤다. 비상한 추진력의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민폐적 공포 때문에 2010년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가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런 비효율적이고 비실용적인 거대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상 실현 불가능이니까. 하다못해, 대운하와 병행하려면 확실한 예산 부족 사태라도 발생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아, 그러면 건강보험과 국민연금도 다 쏟아부을지도! 핫핫). 여튼 그래서 대충 사실 웃고 넘기고 싶었는데… 자꾸 반복되는 멍청한 논거 한 가지가 자꾸 눈에 밟혀서. 바로 “인도인들은 영어가 되기 때문에 세계적 인력시장에서 승승장구한다“는 것. 그래서 역시 영어 잘하는 것이 킹왕짱.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번역의 재앙, 팝툰 창간기사 편

!@#… 씨네21의 만화잡지 팝툰 창간에 관한 해외 전문가 반응을 보며 잠시 어안이 벙벙, 잠시 박장대소, 잠시 좌절. 요약하자면, 이 사람은 그 기사를 읽고 한국은 성인만화가 90년대에 소멸해서 아동만화만 남은 상태였다가 이번에야 부활한다고 믿은 것. -_-;

!@#… 내막인 즉슨, ‘성인만화잡지‘와 ‘성인만화’도 구분 못하는 한심한 영어 번역이 낳은 대형 참사. 즉 한국 성인만화잡지가 90년대에 명맥이 끊겼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내용의 (물론, 그것마저도 사실과 다르다) 기사가, 한국에서 성인만화가 싸그리 사라졌다가 십여년만에야 비로소 새 작품(‘title’) 하나가 다시 나온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아… 한겨레 영문판 팀의 퀄리티에 심히 난감해졌다. OTL 설마 다른 기사들도 다 이정도씩 야매성이 있다면 정말 곤란. 뭐 한국 원문 기사 자체만 놓고 보자면 다소의 오버만 빼면 크게 이상한 부분은 없다. 아, 만화광장이 사라진 것을 미스터블루 건과 묶어서 ‘비문화적 시각’으로 이야기한 것도… 곤란하지만.

!@#… 여튼 오늘의 교훈: “약은 약사에게, 번역은 전문가에게“.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번역과 이름…

!@#…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그림책 ‘벽속의 늑대들’ (Wolves in the Walls)의 한국어판이 ‘벽속에 늑대가 있어’라는 제목으로 출간. 특히 무엇보다 바로 그 명콤비 작가들의 작품이니. 그런데, 한국어판의 저자 이름으로 떡하니 올라와 있는 이름에서 잠시 멈춤. 그림작가인 데이브 맥킨 Dave McKean이 작가 이름란에 안들어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도 당혹스럽지만, 글작가인 닐 게이먼 Neil Gaiman의 이름이 또 가이먼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_-; 이미 작가가 이전에 인터뷰에서 ‘게이’ 할 때의 그 발음이지 ‘가이’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이야기까지 했건만, 한국에서는 참 줄기차게 가이먼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다. 1998년 뉴스플러스에 연재된 세계만화탐사에서 성완경 교수가 가이먼이라고 오독한 이래로 끊이지 않고 누군가는 가이먼으로 읽어준다 (이것보다 더 오래된 참조 사례가 있으면 알려주시길). 심지어 소금창고에서 금붕어, 김영사에서 코랄라인(코랄’린’이라고 출간되었지만), 백양에서 트리스트란, 황금가지에서 환상문학 단편선, 그리폰북스에서 멋진 징조들을 명백하게 ‘게이먼’으로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이먼으로 회귀했다. 번역자가 작가 이름 하나 제대로 조사할 필요를 못느끼고 대충대충 해버렸거나, 아니면 뭔가 이름을 반드시 ‘가이’로 해야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거나. 게이를 죽도록 싫어하는 호모포비아라든지.

!@#… 하기야 이런 비슷한 원죄를 capcold 역시 한 가지 가지고 있다. ‘만화의 이해’의 작가로 유명한 스콧 맥클라우드 Scott McCloud를, 시공사에서 2001년에 ‘만화의 미래’ 책 번역할 때 스콧 ‘맥클루드’라고 표기해서 나가도록 한 것. 그 때 갈등했던 것은 이전에 이미 수년동안 돌고 있던 아름드리판 ‘만화의 이해’ 책에 맥클루드라고 오독되어 표기된 덕분에 국내에서는 정설이 되어버린 명칭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버리느냐의 문제였다. 버리면 표기는 정확해지지만, 대신 같은 작가의 차기작이라는 연계성이 죽어버린다. 동시검색이 안되는 것도 물론이고. 그래서, 버렸다. 맥클라우드가 맞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맥클루드로 갔다. 그런데… 그게, 한번 그래놓으니 이듬해 ‘만화의 이해’를 시공사에서 재번역 재출간 작업할 때 또 어쩔 수 없이 맥클루드라고 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책 두권이 그런 식으로 나가버리니 여기저기서 인용되는 것도 다 루 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마르크스에서 맑스라고 정정해서 부르기 시작한 90년대 좌파들의 고뇌가 이랬을까 (농담). 덕분에, 만약 번역개정판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1단계로 바로잡고 싶은 숙원이 되어있다.

!@#… 여튼 꺼내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번역은 말만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은 물론,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전부를 다른 언어권의 수용자층에게 소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언어능력은 기본이고, 최고급의 해당분야 전문성, 그리고 끝없는 쪼잔함까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게, 과연 사람 이름이라도 제대로 읽을 줄 아는지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 안쓰고 넘어갈만한 일이겠지만, 누군가 한명쯤은 (예를 들어 capcold라든지)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지를 자꾸 꼬집어줘야 마냥 둔감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백만부짜리 대필 번역의 개그 한마당

!@#… 최근, 모 아나운서의 모 베스트셀러 번역 대필 사건이 잠시 훈훈한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이 책을 둘러싼 개그는 “하루에 틈틈이 100페이지씩 했어요” 오바질 오보로 시작되어, 그따위 “참으면 부자되고 안 참으면 가난해진단다”라는 초딩스러운 내용의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한층 개그력이 상승했던 터. 그러다가 결국 번역 대필이 뽀록나서 개그의 강렬함이 더해지다가, 출판사가 ‘이중번역’이라는 굉장히 처절한 변명을 하면서 결국 개그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세상에, 무려 출판사 사람들이라는 자들이 진지하게 그런 주장을 펼치다니. 다만 정작 그 모 아나운서만 개그에 동참할 정도의 유머감각이 부족한지, 심려를 끼쳐드렸다는 멘트 하나만 날리고, 나머지 실제 잘잘못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일이다.

!@#… 번역작업을 하면서, 여러명의 번역자들로 나누어서 작업하는 것 만큼 뒷수습이 힘든 것이 없다. 어순이나 어미활용 및 용어의 호환성이 높아서 비교적 기계적 번역이 가능한 일한 번역이라면 정도가 확실히 덜하지만, 영한 번역 정도만 되도 정말 골때린다. 특히 팀에 번역 초보자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원고는 번역 숙련자인 대표 번역자가 실질적으로 깡그리 다시 해야 한다. 전체 책의 문체를 통일하고, 용어의 선택도 맞추고, 전체 문맥을 조율해야 하니까 (capcold의 경우 역시 몸으로 배운 교훈이다). 만약 출판사의 주장처럼 무경험자인데다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는 초보자 – 예를 들면 모 아나운서 – 와 전문번역가가 ‘이중으로’ 작업을 하고 ‘그 중 잘된것을 짜깁기 했다’면, 99.9% 후자의 번역을 그대로 썼다는 거나 다름없다.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그런 작업인거다. 그런데 그 아나운서, 책 나온 걸 보고도 자기가 쓴 문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문체와 용어로 되어있는데도 눈치를 못챘나 궁금하다. 보고도 눈치 못챘다면 그만큼 자기도 자기 작업을 기억 못할 정도로 대충 때려넣었다는 것이다. 교열과정에서도, 완성된 책을 받아들고서도 한번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면 더욱 더 안습이고. 보고 눈치챘지만 생까고 그냥 자기가 한 양 이야기하고 다닌 것이라면 뭐… 진짜 할 말 없어지겠다. 닥치고 이불덮고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 여튼 책은 다 팔만큼 팔았으니 뭐 잠깐 버로우하면 출판사도 아나운서도 해피. 다만 짜증나 쓰러질 입장에 처한 것은 대필을 제공한 그 전문 번역가. 대필 번역을 했다면 당연히 인세지분이나 인센티브 없이 매절을 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경우 (아니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계약서도 따로 정식으로 안하고 작업하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책은 잘팔리고, 번역에 대한 공은 엉뚱한 사람이 들고 가니 뭐 클레임 걸고 싶지 않겠는가. 책 좀 잘 팔릴때 출판사가 알아서 잘 기름칠을 했어야 했을 부분인데, 뭐 돈에 눈돌아가면 자기 두개골 내부말고 뭐가 또 보이겠나. 그리고 언론에서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이제서야 출판계의 어려운 현실이니 아나운서에게 죄송하다느니 설레발이다. 그리고 아나운서한텐 송구스러운데 정작 번역자에게는 하나도 안 미안해하니 그것도 참 안습이다.

!@#… 번역분야가 출판계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거야 뭐 뻔한 이야기니 반복할 필요도 없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학계든 출판계든 지극히 우습게 취급되고 폄하된다는 점이다. 특히 학계에서는 번역서에 대한 변변한 경력 인정이 안되기 일쑤인데, 그래서 유명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한 챕터씩 나눠주고는 적당히 수거해서 역자 후기만 쓰고 출판사에 넘겨준다는 괴담이 도는 것. 하기야 진정한 괴담은, 그 결과 번역서랍시고 나와있는 이론서들이 거의 한국말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울 정도로 전혀 내용에 대한 이해도 전달력도 없는 전문용어들의 기계적 짜집기 덩어리로 나와서 원서에 대한 독서욕구를 불태우는 실제 현상들이다. 기실 번역이야말로 원 자료는 물론 원 저자의 학문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또하나의 창조, 재해석을 해서 한국의 맥락에 맞게 설명해내는 복잡한 작업이며 훌륭한 학문적 성과가 되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마틴 루터의 진짜 중요한 일생의 과업이자 종교개혁의 뿌리는 열받아서 대자보 붙이고 다닌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 아니던가. 나름대로 룰이 있다는 학계가 그럴 정도면, 일반 출판계야 뭐 할말 다했다. 번역 품질보다는 가격에 맞추는 패턴만 벗어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 그러니까 이제부터 번역을 좀 잘 취급해달라고? 내가 여기서 그런 말 한마디 한다고 개선될 성격의 것이라면 이미 이 곳을 다 도배해놨을 것이다. 번역이 우습게 취급되는 것은 실제로 독자들이 ‘독서행위의 품질’에 신경을 안쓰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까다롭지 않고, 대충 밀가루 위에 캐첩만 뿌리고 본토 이태리 피자에요 내놓으면 아싸조쿠나하면서 받아먹으니까. 좋은 번역에 대한 독자들의 수요가 적은데 뭐하러 출판사가 애써 신경과 돈을 써가면서 공급을 하겠는가. 번역자가 그 책을 한국어로 들여오기 위해 직접 출판사에 소개시켜주고 자신의 성심성의를 다해서 전문적으로 작업을 하는 예외적인 경우라면 모를까, 출판사가 책을 찍고 번역자를 구하는 보통의 경우라면 어디까지나 품질보다는 기대 충족의 효율성을 따질 수 밖에. 학계도 마찬가지여서, 저널의 도서리뷰에 “이 책은 번역이 개판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없다. 학생들은 그냥 원래 어려우니까 어려운건가보다 하고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고. 번역의 품질을 따지며 더 나은 번역문화를 요구하는 자리 자체가 없는 것이다. 워낙 광팬을 거느리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정도가 몇 안되는 예외지만, 광팬이 많아도 여전히 해리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오니는 한국에서 헤르미온느일 뿐.

!@#… 좀 갑갑한 이야기지만, 결국 상황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란… 따지는 것. 번역이 개판이면 번역자가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따지고 몰아붙여서 좋은 번역에 대한 압박을 주는 것. 수요가 요구하면 공급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고품질 공급이 필요한 판이 되면 야매스러운 관행들이 하나씩 사라질 수 있다. 사실 이야기가 번역계의 사기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국 번역의 품질 이야기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라 읽다가 헷갈려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하나의 ‘판’을 제대로 정돈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그 분야의 총체적 품질을 올리는 것이다. 향유 사슬의 가장 끝에서부터,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바로 시장체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품질 향상의 지름길이니까. 뭐 여하튼, 그러니까 우선 독서를 좀 더 까다롭게 하는 습관부터.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기획회의060915]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

김낙호 (만화연구가)

하드보일드라는 대중문화 장르가 있다. 비록 장르 중 일부가 ‘느와르’라는 수식어로 미학적 가치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나름의 굳건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장르의 핵심은 바로 폭력, 섹스에 대한 탐닉으로 무장된 범죄물이다. 그런데 그 범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것 정도로 그려지고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밑바닥 인생들의 최대한 “폼 나게” 사는 인생살이에 대한 도취로 가득하다. 나쁜 놈들도 폭력적이고 막나가지만, 좋은 놈들도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막나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탐욕과 욕망이 뒤섞인 속에서도, 주인공 쪽은 한 가닥 지고지순함만은 간직하고 있기에 구분이 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악을 누르는 이야기. 험난한 세상 찌든 도시 속, 서로 범죄적 음모로 물고 물리는 밑바닥 활극의 카타르시스가 바로 이 장르의 재미이자 인기의 비결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극단적으로 슬럼화된 어두운 도시가 있고, 그 거리에는 온갖 조직 범죄와 일반 범죄가 들끓는다. 도시는 부패한 공무원과 종교인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 터전을 지켜야 한다. 악당들만큼 비정하고 거칠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이 서로 음모에 얽히고 먹고 먹힌다. 이것이 바로 『씬시티』(프랭크 밀러 / 세미콜론 / 전7권 중 3권 발행중), 문자 그대로 ‘죄악의 도시’의 세계다.

원작자의 광팬과 원작자 본인이 공동 감독한 동명의 영화로 한국에는 먼저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씬시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드보일드 농축액이다.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매 페이지, 매 장면마다 하드보일드의 극치를 표현해 보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어둡고 모노톤인 하드보일드물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는 아예 중간톤 없는 강렬한 흑백의 세계다.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뇌쇄적이면서 동시에 강하고 위험한 팜므 파탈들 이며, 남성들은 근육질이든 왜소하든 하나같이 “순수한 폭력의 덩어리” 그 자체다. 도시의 뒷골목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더러우며 범죄의 때가 찌들어있고, 멋진 자동차 추격과 술집의 주먹다짐이 넘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 놈의 망할 세상에 대한 폼나는 시적 독백을 읊조린다. 물론 이런 묘사 속에서 인간의 고독이니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혼란에 대한 실존적 은유니 하는 수사를 뽑아내고 싶은 뭇 문학청년 후보생들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하드보일드의 핵심은 바로 성과 폭력이 멋들어지게 포장되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원초적 쾌감이다. 그리고 바로 『씬시티』는 하드보일드 장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모두 하나씩 분해해서 극단까지 끌고 가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보는 장렬한 실험실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구조 역시 하드보일드 펄프픽션들이 원래 그래왔듯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펼쳐진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 속에 공존하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이야기에 찬조출연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스토리에서는 죽어버리고 나중에 나오는 다른 스토리에서는 다른 시간대를 다룬다는 명목 하에 살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만화라는 형식에 한층 더 잘 어울리는데,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가끔 섞여 들어가는 장편이야기와 단편 에피소드들을 어색함 없이 쉽게 이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작품 역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도 있고, 다소 미흡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체 세계관과 표현력의 매력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중간색을 생략한 흑백의 대비로 그려진 장면들이다. 그것도 바탕이 검은 색이고, 흰 부분은 가끔 빛이 들어와서 사물과 사람들의 윤곽선을 식별하게 해주는 정도에 가깝다. 나아가 거칠고 직선적인 필체, 역동적 화면구도와 시점처리는 강력한 마초 에너지를 발산한다.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극단적인 스타일 과잉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런 과장은 영화로 치자면 오우삼 영화에서 주윤발의 트렌치코트가 휘날릴 때 슬로우 모션이 되는 것과 맞먹는 강렬한 효과를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판에서 만화의 식자 처리를 김수박 작가를 통해서 전문적으로 작업한 것 역시 좋은 선택이다. 그림과 문자가 잘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그 스타일리쉬한 시각세계가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체 대사에 하지 않고 효과음에만 그런 전문적 처리를 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번 한국어판은 출판 품질이 잘 나온 느낌이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다. 바로 번역의 부분이다. 매끈하고 별다른 오역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원작 특유의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를 살린 ‘훌륭한 번역’에는 못 미친다. 예를 들어 1권의 첫 부분에 주인공 마브가 “천국의 향기가 코를 찌르는군”이라고 독백하는 부분이 있다. 원작의 대사를 직역하자면 “그녀는 천사가 풍겨야할만한 냄새가 났다”에 가깝다. 즉, 마브 같은 거친 마초의 상상력으로는 천사라도 어떤 냄새(향기가 아니라!)가 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셈이다. 그냥 멋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친 밑바닥 상상력으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멋진 대사인데, 그런 맛깔스러움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좋은 출판 품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히 멋진 일이다. 인생에 대한 교훈적 성찰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폼 나는 쾌감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의미의 좋은 작품이고, 그 분야에 있어서 『씬시티』는 추종불허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사족: 작품 외적인 문제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 역시 성의가 아쉽다. 예를 들어 마치 밀러가 ‘데어데블’ 캐릭터의 창작자인 듯 이야기한다든지, 87년작 『배트맨:원년』을 『씬시티』 이후에 창작했다고 하는 등 사실 관계의 오류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출판사 담당자들이 아직은 만화 문화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기에 일어난 현상인 듯 한데, 차차 나아지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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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씬시티 1
Frank Miller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기획회의 060501]

!@#… 정작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만화의 표현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들고 오더라도 상당부분 망가질 수 밖에. 그리고 한국에서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그래픽노블이라는 명칭 쓰는 것, 무척 짜증난다. 뭐 그것을 무려 그래픽 소설이니, 그림소설이니 직역해서 쓰면서 정작 그게 만화를 지칭한다는 것 자체도 제대로 모르는 글쟁이들을 보면 더 짜증나지만 (만화의 지위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글을 뱉어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하지만 여전히, 작품 자체는 강추하니까 리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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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소설 원작 『유리의 도시』는 폴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3부작』의 첫 작품이고, 잘 알려져 있듯 이 작가는 현대문학의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하나다.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시작한다. 가명으로 탐정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한 여성 고객에게 탐정일을 의뢰받아서 수상한 노인 박사를 미행하다가 점점 더 큰 음모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느와르풍 펄프 탐정소설의 외관 속에서 중첩된 정체성, 언어적 기표와 기의의 혼란, 그리고 결국 분열증적 도피에 대한 중층적인 이야기들이 장르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으로 펼쳐진다.

최근 한국에서 만화판 『유리의 도시』(오스터 글/ 마주첼리, 카라식 그림/ 황보석 역/ 열린책들)가 출시되었다. 한국에 폴 오스터의 책들을 소개해온 출판사가, 원래 오스터의 책들을 번역해온 번역가를 거쳐서 일종의 소품으로 들여온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이 94년에 만화로 만들어진 것은 작가의 친구이자,『쥐』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골수 뉴요커 아트 슈피겔만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슈피겔만은 부드러움과 비정한 도시가 공존하는 탁월한 느와르 그림체를 선보인바 있는 마주첼리를 끌어들였으며, 원작이 지니는 관념적 세계관과 기이한 연출방식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인재로 자신이 창간한 대안만화잡지 <로>의 편집인 출신인 카라식을 한 팀으로 엮었다. 결과는? 마치 『유리의 도시』는 애초부터 당연히 만화로 그려졌어야 했을 작품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만화적 표현력의 극단에서 폴 오스터가 펼쳐낸 복합적 세계관을 완전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시적 경직성을 나타내는 연출의 형식미다. 세로 페이지를 세로의 9개 칸으로 균등하게 분할하는 칸 연출은 뉴욕의 바둑판식 도로의 이미지이자 고층빌딩의 창문, 그리고 나아가 감옥문을 연상시키는 경직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인간군상은 도시 자체와는 달리 둥그런 필체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을 영위한다. 하지만 그 정상성 가운데 때로는 선이 거칠게 갈라지면서 속에 담아둔 광기와 혼란의 내면이 슬쩍 엿보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언어적 기호와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혼합 역시 만화적 연출의 힘을 과시한다. 이 작품에서 궁극의 인위적 구조이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다른 하나는 바로 문화적/사회적 코드로서의 ‘언어’다. 언어는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인위적 기호로 치환하며, 그 속에서 때로는 갑갑한 현기증을 일으키도록 하는 주범인 셈이다. 그런데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흐름, 언어(문자)와 그림의 혼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매체가 만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연언어를 발견하려는 실험을 당한 후유증으로 보통의 언어구조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극중 인물 피터 스틸맨 (아들)이 주인공 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로 자유롭게 치환되며, 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스틸맨의 입에 완전히 붙어서 나오고 있는 말풍선 속의 메마르고 모호한 말들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관계를 이야기하듯, 말과 그림은 서로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명 시퀀스다. 혹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나가는 장면 역시 탁월한 사례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는 그대로 만화의 칸 속에서 문자가 되어 바닥에 그림자로 달라붙고, 세상 사물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문자라는 언어기호의 인위성이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이룬다. 작품의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러한 탁월한 연출효과를 그 어떤 다른 매체에서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반대로 생각하면 만화 특유의 자연스러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줄거리 요약만 하는 명작문학 학습만화가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폴 오스터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독자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식적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서 줄거리 진행의 재미를 놓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원래 원작 자체는 팜므파탈, 수상한 과거를 가진 용의자, 미궁으로 빠져드는 사건, 그 속에서 모호해지는 정체성 등 장르 탐정소설의 얼개는 줄거리적 재미를 충분히 보장한다. 혹은 줄거리가 해체적으로 변모하는 말미까지 전부 포괄하더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시 버전, 혹은 정신분열증 증상 전개의 비유적 표현이라는 틀에서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방식을 가로막지 않는 포괄적 그림체의 열린 연출은 이 작품에 작가팀이 들였을 세심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미학과 재미 두 요소들을 종합해서 판단을 내리자면,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명작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걸작의 경지를 기웃거리는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별 무리 없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이번에 출시된 한국어판은 편집 제작상의 몇가지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하여 작가들의 세심한 연출이 상당부분 뭉개지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표지의 일러스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에서 원래 출시된 판본은 주인공 퀸의 정상적 외관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갈라진 선으로 그려진 내면의 혼란의 묘사까지의 중간과정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판은 마지막 혼란의 그림을 생략하고 중간과정까지만 잘라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글꼴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 판본은 경직된 분위기의 곧은 글꼴, 제3자적 시선의 타자기 글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담아내는 부드러운 글꼴 등을 포함, 다양한 글꼴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세심한 연출의도는 한국어판에서 일괄적으로 가벼운 글꼴 하나로 통일해버리는 통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보도 자료에서 만화라는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리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어휘로 한껏 멋을 부려보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세심한 미학적 관심을 먼저 발휘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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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기획회의 051129]

!@#… 이전에도 다른 글로 지적한 바 있고 이번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은 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러스함이 상당히 많이 뭉개지니까. “Russians are not like us” 라는 대사를 “러시아인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단다”(불어판이 아닌, 영어판에서 중역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라고 쓴 것은 그나마 아예 명백한 오역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튼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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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라는 생물은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사회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사회를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사회 속에 들어있다면 더욱 더 시야와 세계관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들이든 작가든 혹은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일반인이든 누구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시각이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당당하게 내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극에서 그것은 ‘1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것으로 구현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를 읽어냄에 있어서 전모는 커녕 일반인 수준의 파악도 되지 않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이라면 어떨까. 우매한 자의 눈, 즉 일반적인 남성 성인 주도의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나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주부, 아이, 바보 등의 시점 말이다. 비록 이야기 속 상황을 읽어냄에 있어서 대단히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매한 자의 눈’은 매력적이다. 우매한 자의 눈으로 보면 사회 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면서 살아나가는 과정이란 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인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 괴리를 보면서 유머와 아이러니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약간만 생각해보면, 우매한 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는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찰로 이르는 이 과정 속에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녹아들어간다. <포레스트 검프>, <케빈은 열두살>, <양철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많은 이야기 작품들이 우매한 자의 눈을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일상과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서, 이 기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 새만화책 / 1권 발매중)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놓여있는 수작이다. 현대 이란이라는 사회가 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무려 테헤란로라고 이름 붙인 것과는 달리,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듯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짧은 해방감과 근본주의 진영의 반동에 의한 독재 재개, 이웃나라와의 전쟁, 미국의 개입… 순서와 패턴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현대사의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페르세폴리스> 1권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꼬마 마르지, 즉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담이다. 여자 아이의 우매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현대사의 격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여러 모순과 함의, 그리고 희망들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냥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마르지는 비록 진보적 성향의 집안의 딸이지만 여하튼 꼬마인 덕분에 사회주의, 종교근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담론 덩어리들도 고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피상적 표어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그러했듯, 정작 감동적인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사회운동가 아누쉬 삼촌의 이야기, 폭격으로 사라진 친구 이야기 같은 무거운 순간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인기 여성 락커 킴 와일드의 포스터를 밀수해 들여오고 이웃끼리 술파티를 벌이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있다. 조숙하고 활달한 꼬마 마르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 자신의 눈보다는 어린 시절의 우매한 눈으로 회상하는 작가 사트라피의 유머감각이 함께 녹아들어가면서 작품은 유머와 진지함, 품격과 발랄함을 얻어낸다.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생활과 이념, 격변기 이슬람 세계 속 여성의 위치, 중동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관계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화로서의 연출 효과 역시 큰 매력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그리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간결한 흑백 그림체는 아이의 눈과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추상적 느낌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가끔 칸 내에서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칸 간 연출의 기본은 쉬운 독서가 가능한 명료한 스타일을 따른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의 언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서구만화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나레이션의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효과적인 만화 표현으로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인 셈이다.

확실히 이런 우수한 만화가 소개되어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 문제에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1권의 부제인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역되어서 한 사회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이 작품의 의미를 한 개인의 특이한 경험담으로 축소하는 등의 미묘한 차원의 실수는 그냥 아쉬움으로 남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스크바’ 에피소드의 첫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마르지가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아빠를 둔 자격지심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허풍을 떨고 아이들은 그 허풍이 너무 심해서 기가 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진짜로 운동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삼촌 야누쉬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자랑해도 친구들이 여전히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과 댓구를 이루며 훌륭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하지만 번역판에서는 오역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매한 자의 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과 유머를 통해서 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사례다. 만화라는 장르가 꼭 유머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작품성 있는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머라는 큰 매력이 억지로 거부당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2판부터는 이러한 지점들이 잘 수정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또한 이란 사회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무지를 고려할 때, 역사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해설이 첨부되었더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다.

<페르세폴리스> 1권의 결말에서 사춘기의 나이로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지는, 2권에서 서구 생활의 풍파를 겪은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아이의 우매한 눈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번 출간된 1권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는 ‘사회성과 작품성이 있는 서구만화’의 왕좌를 오랫동안 지켜온 <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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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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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만화번역 잡설(2)

!@#… <페르세폴리스>가 출간될 때 날렸던 만화번역에 대한 단상글에 대해서, 꽤 진지한 반론을 제시하시는 분이 있어서 답변을 좀 해오다가, 여차저차 길어져서 그냥 아예 새로 들고 오기로 한다. 초점이 뚜렷한, 잘 정리된 논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뭐 충분히 나올법한 이야기. 뭐 여하튼 capcold의 문제설정이나 글쓰기 맥락에 대한 약간의 참조도 될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번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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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광  번역은 주인장 말씀대로 누가 번역하느냐의 차이가 있겠지요. 그 차이는 어느정도 ‘창작의 영역’에 걸쳐있는 ‘번역의 영역’아닐지요. “내가 했더라면….”은 듣기 민망하군요. 작품의 감상은 ‘독자의 영역’에 걸쳐있는 ‘역자의 입장’이기도 함을 이해하실줄 압니다. 오역이라면 이해하지만, 어투의 문제라…어린 아이의 말투로는 주인장의 말씀대로 쿨~한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게 저 뿐만일까요.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을 찾다가 들러서 쳐진 댓글 남기고 가서 죄송합니다. 2005/10/30 00:39  
 
 캡콜드  !@#… 김태광님/ 댓글의견이야 항상 대환영이죠. 하지만 정확히 어떤 지점을 지적하시고 싶으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1) 번역이 또다른 창작이라는 말은 물론 동의합니다만, 그 ‘창작’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가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번역자의 자의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작이 원작의 독자들에게 주었던 원래의 의미와 뉘앙스를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에게도 가장 온전하게 느끼게 해주기 위한 재해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이크와 번역의 차이죠. 번역가는 자의식 과잉으로 리메이크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2) 어떤 부분을 그렇게 “민망하게”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제 번역스타일을 예로 든 것은 번역자의 어투가 번역물의 문체에 반영되는 것에 대해서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가상 사례에 불과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어투는 이야기의 풍부한 감성과 의미를 담아내는 중요한 일부분이기 때문이니까요.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어, 라는 식의 무슨 유치원생 허풍떠는 이야기가 아니죠. 이왕이면 한번 찬찬히 다시 읽고 민망해 하시길 바랍니다.

3) “쿨~한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말쓴드리자면,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위화감’이라는 것은 독자의 독서에서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원작과 번역본의 사이에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체 내용을 모두 텔레토비 대사로 바꿔도 나름대로 위화감없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만들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 원작과의 위화감은 엄청나겠죠. 다시금, 본문을 찬찬히 다시 읽고 설명 부탁드립니다. 2005/10/30 02:43  
 
 김태광  1) 번역이 일정부분 역자의 상상과 분위기를 닮게 되는 점에서 창작에 걸쳐있다고 말씀드린 것이였습니다. 즉, 번역이 가지는 특별한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리메이크는 목적이 재구성, 재해석이므로 번역의 그것과는 다르지요. 페르세폴리스의 번역에서, 주인장의 말씀처럼 “김대중(역자)의 목소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2) 그 표현은 죄송합니다. 기분이 상하셨을 것 같네요. “민망”했던 이유는 그 표현 자체에 있었습니다. 번역자 김대중씨와의 친분이 있으신 것 같은데(김대중식 어투라고 단정하시니….제 추측인데 맞는지요), 그 어투를 이해하기보다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민망”했는가봅니다. 그러다보니 주인장을 예로 든 것마저 “의심”을 산 것 같네요. 비평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애정’이고, 경계할 것이 ‘비난’이라 배웠습니다. 주인장을 예로 든 것이 “민망”했던 이유는 바로 “애정”이 보이지 않아 오해를 산 것이 아닐지요.

3) 제가 이 책(한국어판)을 읽고 굳이 문체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한다면, 호흡이 짧고 쉽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쿨~”은 이런 점입니다. 주인장 말씀이 원작과 번역본의 사이에 느낄수 있는 “위화감”이라면, 제가 말한 쿨~한 것과는 차이가 있군요. 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김대중(역자)의 목소리”가 “위화감”을 일으키는 목소리라고 이해했었거든요. 이렇게 이해한 것에는 위2)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2005/11/01 14:39  
 
 캡콜드  !@#… 우선 본문에서 밝혔듯이, 저는 지리적 사정상 한국어판을 보도자료로 공개되어 있는 한 챕터 이외의 나머지 본문은 (아직도!) 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위의 글은 결과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기대와 우려의 글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비평글이 아닌, 말 그대로 단상입니다. 제가 ‘말투’에 대해서 걱정하는 부분은, 번역자분이신 김대중씨의 말투가 과연 제가 영어판(즉, 불어를 못하기 때문에 원본인 불어판로는 즐기지 못했습니다; 이미 상당한 모순이죠. 그래서 저는 엄청난 노력으로 자료와 뉘앙스를 벌충하지 않는 한, 중역은 정말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에서 본 그 소녀의 어투를 잘 살려낼 수 있을까 – 아니 잘 살려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같은 대본을 놓고 연기를 하는 것이라도 배한성의 맥가이버냐, 아니면 신구의 맥가이버냐 하는 차이죠. 혹은 서혜정의 스컬리냐, 아니면 전원주의 스컬리냐 하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1화를 본 결과 한국어판의 문체가 어떤지 감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이제 주어진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문자 그대로 그것이 전체 부분에 잘 어울려 주고 있을지 어떨지 걱정/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난 것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제가 제목 번역에서부터 이미 의미의 손실이 생겼다는 것을 먼저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상당히 아까운 손실입니다. 그만큼 섬세하고 의미깊은 작품이니까요. 그것이 제가 이 작품 자체에 대해서 가지는 ‘애정’입니다.

!@#… 비평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애정’이라는 것은, 비평글에서 소재로 삼고 있는 특정 작품이나 특정인에 대한 애정이 아닙니다. 그런 주례사에 얽매이면 그건 비평이 아닌 그냥 바보들의 낙서죠. 비평글이 가져야 할 애정이라는 것은, 바로 글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속해있는 “그 분야 전체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애정입니다. 특정 작가나 작품을 열심히 일방적으로 햝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 정당한 평가를 부여함으로서 만화라는 분야 자체가 얼마나 멋진 담론으로 활성화된 좋은 문화 예술분야, 혹은/또는 문화산업 영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려되는 부분은 우려하고, 재발견해야할 부분은 재발견하고, 심지어 진짜로 비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피하지 않고 확실하게 비난해서 큰 흐름에 기여하는 것이 진짜 비평입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그 길에 충실한지는 항상 모자름을 느끼지만, 최소한 그것이 길이라고는 믿습니다.

!@#… 만약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덧글이 아닌 새 관련글로 옮기겠습니다. ^^ 2005/11/01 15:47  
 
 김태광  1) 중역에 대한 생각입니다 – 이 작품이 중역을 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더라도, 주인장의 말씀은 중역의 한계를 지적할 뿐, 현 번역에 곤란한 점이나 모순이 있다는 근거로는 적절치 않습니다.
2) 비평글과 단상 – 작품에 대한 애정은 비평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더 나아가 주인장께서 일하시는 분야가 혹 관련된 것이라면 관련분야 전체의 발전까지도 염두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사실, ‘페르세폴리스 한글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게 되는대요. 주인장께서 남기신 “단상”을 제가 “비평”이라 여겼기 때문에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평”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작품에 대한 소개와 평가가 전문적인데 비해, 출판물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기시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장의 의도를 비껴나간 것은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기왕에 주인장께서 정성껏 댓글을 남겨주셨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저 역시 몇 마디 “비평”에 대한 생각을 적어놓겠습니다.
애정을 전제로 한 비평글에는 모든 사물(언어….)에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듯 대상의 양면을 모두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에 대한 찬사가 “양”이요, 출판물에 대한 비난이 “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번역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번 번역의 외적 의의와 내적 성취도를 평가하고, 되도록 분명한 지점을 들어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이 “진짜 비평”이 아닐지요. 주인장의 글이 적절한 “비평”이 되기 위해서 부족한 부분이 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상”도 그런 의미에서 이같은 점이 전제가 되길 바랍니다만, 혹 주인장께서 윗 글에 대해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 같다면 죄송합니다.
2005/11/01 18:02  
 
 캡콜드  !@#… 저는 심지어 한국어판이 영어본에서 중역을 했다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판형 자체부터가 영어판 기준이기 깨문에, 중역을 했으리라 쉽게 추측을 해볼수는 있지만). 애초에, 중역을 했기 때.문.에. 이.책.의.이.번.역.이 곤란하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면 그때 비로소 곤란한거죠. 그런데 중역은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그런 일이 무척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 이전에, 중역의 문제는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 자신도 과연 진짜 원작(불어)의 뉘앙스를 영어판만 읽어본 주제에 제대로 이해했을까 하는 근본적인 자기 회의의 의미로 쓴 것 아닙니까.

!@#… 하지만 전체 번역에 대한 뉘앙스는 어차피 책 전체를 꼼꼼히 읽어본 후 해야할 작업이지, 한 챕터 달랑 읽고는 기껏해야 기대/우려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번역의 외적 의의와 내적 성취도까지 떠들어대면 거짓말장이죠. 이미 공개된 부분, 즉 제목과 한개 챕터 정도에 대해서라면 이미 본문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시는 듯 하군요. 비평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전체 분량에 대한 평가를 해야 하지만, 단상이라는 전제하에 한 개 챕터만을 따로 떼어놓고 굳이 평가를 하자면… (1) 주인공 소녀 마르지가 가져야할 ‘조숙하면서, 다소 되바라진 인상을 주기 쉽지만 결국은 꼬마’, (2) 1인칭 나레이터가 가져야할 ‘현재시점의 어른이자, 당시의 어린이로서의 세계관을 같이 겸비하는 느낌에서 오는 유머(‘케빈은 12살’의 배한성과 비슷한 역할)’ 만 우선 놓고 보도록 하죠. 1화의 번역을 놓고 볼 때 나레이터의 유머감각은 ‘쿨한’ 지식인 스타일의 말투 속에서 사실상 거의 사라지다 시피 했습니다. 꼬마 마르지 역시 어른의 어휘를 한두개 주워서 사용하는 꼬마의 언어여야 하는데, 아예 어른의 언어를 구사하는 인상에 가깝습니다.

!@#…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이후 분량에서 이어질 여러 좀 더 복잡한 대화 속에서, 다시금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가능성을 닫아놓을 필요는 물론 없겠죠. 그보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계속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참 뻘쭘한 것이, 이미 서가에 나와있는 책을 가지고 ‘제한적 근거의 평가’를 내리고 앉아있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출판에 대한 단상과, 본격적인 비평의 역할을 혼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 여하튼,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부분들은 댓글이 아닌 엮인글로 새로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분량이 많은 덧글들은, 보기가 불편하니까요… 특히 네이버는. 2005/11/02 01:41

페르세폴리스 한국어판 출시… 그리고 만화번역에 관한 약간의 잡설

!@#…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 출시. 4권짜리 불어판이 아닌 2권짜리 영어판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며 커버아트 등도 영어판을 소스로 하고 있다. 뭐 capcold한테도 꽤 사연이 있는 작품인데, 여튼 한국어판이 나왔으니 많은 한국독자들에게 어필해줬으면 한다. 내용은 한 이란 여성의 성장담. 1권은 성장기, 아직 출시안된 2권은… 2권도 성장기. 1권은 이란에서 겪는 일들, 2권은 청소년이 되자 유럽으로 유학와서 겪는 일들. 여성성, 정치현실, 자유의 의미, 가치관의 충돌… 등등 여러 굵직한 테마들이 대단히 담담하고 상당히 유머러스하게 흡입력을 발휘한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특히 1권(불어판 기준이면 1,2권)은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비견할만한 포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2권은 현대 유럽이라는 별로 치열할 것 없는 공간에서의 경험에 더 초점이 강하게 맞추어져서, 아무래도 추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뭐 나중에 나오면 알아서들 보시기를 바란다.

!@#… 에에, 아직 한국어판을 못읽어봤지만(출판사 사이트에 올라와있는 미리보기 챕터 하나만 빼고는), 그런데 뭔가 제목부터 약간 불안하다: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라… 원래 영어판 1권의 부제는 “The Story of a Childhood”, 즉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 라는 뉘앙스. 작가라는 개인의 어린시절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찌보면 평범하고 흔한 당대의 현실이라는 이중적인 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나의 어린시절’이 되어버리면 그냥 단순히 작가의 개인적인 개인사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게다가 영어판 2권의 부제가 1권과 세트를 이루는 “The Story of a Return”, 즉 “어떤 귀환 이야기” 인데, 그것마저 혹시 “나의 귀환 이야기”로 해버리면 김이 정말로 팍 새지 않는가.

주인공의 말투도 꽤 민감한 문제다. 알다시피, 내가 번역을 맡으면 메인 주인공의 기본 말투는 capcold화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만화의 이해>의 스콧 아저씨야 원래 스타일이 비슷하니까 잘 맞아떨어진거고, <다르면서 같은>의 경우 역시 주인공 사이먼의 정신세계나 만담정신이 일맥상통하니까 그럭저럭 어울렸다. 하지만 이란계 여성 작가가 자신의 성장담을 회고하면서 capcold식 말투를 구사한다면? 위화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영화에서 더빙 성우를 고르는 것 이상의 험난한 과제다. 그래서 좋은 문학 번역 – 특히 만화 번역을 위해서는 항상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문체를 다듬고 다듬어야 하는 법(대량으로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1주일에 한권씩 통통 번역해내는 주류 코믹스계 일본어 단행본은 이야기하기도 싫다). 그런데 <페르세폴리스> 1화 샘플을 본 결과… 아아… 이 이란 처자의 말투는 새만화책 편집인이자 만화작가인 김대중씨의 목소리 그대로다. 그것이 강력한 위화감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작품 속에 녹아들어갈지는 책의 나머지 본문을 읽어봐야 알겠다.

번역시의 뉘앙스 문제에 신경쓰이는 건 capcold의 직업병(혹은 성격?)이니까 아무래도 일반 독자들보다 훨씬 민감해서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하튼 본문의 번역은 원래 작품이 가지고 있던 풍부한 센스를 잘 옮겨주었기를 바란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나도 영어판으로 봤으니, 원래 원작인 불어판에서 옮겨오면서 또 얼마나 많은 의미들이 소실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_-; 중역이 가지는 원죄라고나 할까.

!@#… 여튼, 알라딘US를 쓰든지 어쩌든지, 한번 구해보긴 해야겠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다시.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 수정 영리 자유 —

뮤지컬 헤드윅, 한국판. 보고오다.

!@#… 주말에, 여자친구님과 헤드윅 뮤지컬 보고 오다. 헤드윅 주연 4인조 가운데 조승우 주연, 속칭 조드윅 공연으로 보고 오다. 조드윅 출연분은 초유의 예매 시작 당일 매진 사태였는데, 반드시 조승우표로 구해내라는 여자친구님의 강력한 압박에 허겁지겁 무대 맨 뒤쪽 끝자락에 겨우겨우 구한 표. 다행히도 라이브 소극장은 말 그래도 소극장이라서 공연 관람에는 큰 지장은 없었다. 에에, 앞에 계셨던 여자분들이 머리가 크고, 긴 생머리에다가 심지어 허리까지 길었던 것만 제외하자면. (여담이지만 관객중 여성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던데… 조승우라서 그런건가, 아니면 헤드윅이라는 작품 자체가 여성에게 더 어필이 큰 건가?) 원래 영화판을 보고 또 보고 또 봐서 왠만한 노래는 줄줄 외우고 따라부를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인지라, 원작인 뮤지컬판이 국내공연한다니 당연히 보려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게다.

!@#… 그리고 충분히 그런 기대가 충족되는 좋은 공연. 가창력, 정확한 발성, 의외로 상당히 높았던 가사전달력, 자연스러운 농짓거리 등등 외모만 빼면(…아아… 조승우씨는 확실히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기에는 선이 너무 굵다) 도저히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 락 공연으로서의 완급조절도 일품이어서, 배우들, 밴드, 연출진의 노고가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자꾸 초대 헤드윅이자 감독, 영화판 주연이자 감독인 존 카메론 미첼과 비교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얼마나 바보같고 무의미한 짓인지는 따로 언급하기도 귀찮다.

!@#… 아니, 사실 약간 흠잡을 데가 있다. 가사 번역 부분. 원작의 화려한 각운을 그대로 전달하는 건 어차피 힘들다는 것 알고 있기에 사실 상당히 수준높은 번역작업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뮤지컬로서 좋은 번역일지는 몰라도, 헤드윅으로서는 2% 부족하다. 예를 들어 Origin of Love 하나만 놓고 보면…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부분 “한 눈 한다리 남겨주세요” 대목. 원작 가사는 만약 신들에게 또 대들면 (4개 다리 두개의 머리를 가졌던 원시 종족을 지금 인간의 모습으로 갈라놓아버렸던 바로 그) 제우스가 또 나와서 우리를 다시 한번 반쪽으로 갈라버리고, 그러면 우리 모두 외팔외눈외다리가 될 거라는 전형적인 헤드윅식의 비극적인 익살이다. 그런데 그걸 무슨 신들에 대한 인간들의 애원처럼 오역한거다. 노래로서는 매끈한 가사가 되었으되 헤드윅의 감성은 전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노래 속에 언급하는 신화에 대한 이해도도 좀 부족했던 것이, ‘Some Indian God’를 인디언 신으로 오역했다. 인도 신이 맞다. 사실 ‘인디언’이라고 잘못 불리우는 미국 원주민들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 위대한 전사의 영혼들과 자연의 혼에게 경외를 바칠 뿐. 그리고 배꼽이라는 것이 둘로 갈라졌을 때 생긴 등짝의 그 상처를 앞으로 가지고와서 꼬맨 것이라는 맥락도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시리스를 영어식 발음인 ‘오사이러스’로 간 것도 좀 어색했다; 제우스를 쥬스라고 하지는 않지 않으니까. 영화판에서는 무식한 토미 노시스가 그걸 ‘사이러스’라는 남자이름으로 잘못알고 불러버리는 대목이 나오지만, 뮤지컬판에서는 그것도 없으니 더더욱 오시리스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 팜플렛이나 기타 정보에 에밀리 허블리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좀 의외였다. 무대 배경으로 사용된 – 특히 Origin of Love의 그 감동적인 배경 그림들이나,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상징물들 – 은 영화판을 위해서 에밀리 허블리가 만든 애니메이션 창작물들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무대용 애니를 제작한 회사의 이름만 있고 정작 허블리는 크레딧에서 쏙 빠져있다. 극 진행의 일부로서 그 이미지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놓고 보았을 때, 좀 거시기한 처사.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에 삽입된 제랄드 스카프의 애니메이션 이후로 가장 인상적인 창작물이었는데, 이렇게 새까맣게 무시당할만한 작품이 아닌데.

!@#…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98%는 만족하고 – 아니 만족 이상으로 멋지게 즐기고 나왔다. 2%의 부족함을 지적해내는 건 어차피 직업병이니까. 단, 그 2%가 앞으로 충분히 개선 가능한 것일 때만 지적한다는 나만의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고자 할 뿐. 여튼 간만에 멋진 문화행사 경험이었고, 이제는 조승우와 정 반대 지점에서 헤드윅의 인물해석에 접근했다는 오만석 버젼 표를 구해보려 한번 뒤져봐야겠다. 성공확률은 물론 지극히 낮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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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edwig.co.kr 한국판 뮤지컬 홈피

http://www.hedwigandtheangryinch.co.uk/ 영국판 뮤지컬 홈피

http://www.finelinefeatures.com/sites/hedwig/ 영화판 공식홈피

http://eee.eplus.co.jp/s/hedwig/ 일본판 뮤지컬 재공연 홈피. 오카마 전통이 강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 캐스트보다도 더 남성적인 선을 가진 아저씨가 주연이다. -_-;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데릭 커크 킴의 <다르면서 같은> 출간.

!@#… 데릭 커크 킴의 <다르면서 같은>(원제: Same Difference) 출간(길찾기, 6800원). http://http://www.lowbright.com 에서 활동하는 코리안-아메리칸 작가의 작품집. 성장에 대한 사색,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물건. 우디앨런 영화들 같은 대화형 코미디 + 깔끔한 시각연출의 조화.  미국만화 특유의 진입장벽도 덜 한, 쉽게 입문해서 재미를 느끼기에도 적합. 만화로서, 이야기로서 높은 완성도.

구매(예스24)

!@#… 2004년초 작품 선정부터 작가 및 양국 출판사 컨택, 계약진행, 번역 등 중개 역할 일체를 진행한 책. 이전에 <만화의 미래> 등 번역해서 들여올 당시에는 작가와 이야기한 후 시공사로 들고가서 프로젝트 성사된 다음에는 출판사에서 세부 진행을 해줬으나 이번에는 여차저차 풀코스. 하지만 정식으로 에이전시 차려서 대량 라이센스 거래하며 돈벌고 다닐 요량이 아닌 capcold 같은 사람들에게는, 역시 풀코스는 생기는 것도 없이 지나치게 소모적이라는 교훈도 같이 얻음. 그냥 이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서 한 것 뿐.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여튼 무사 출간.

* 한국어판 출간 소식

* 미국NPR에 심층기사 실린 후, 연합뉴스 거쳐서 들어온 국내 언론 보도들

이거, 저거, 그거

(…그런데, 도대체 언제쯤이면 문화부 기자들에게 ‘Graphic Novel’이 ‘소설’이 아니라 ‘만화’라는 정도의 교양을 기대할 수 있는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