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기획회의051030]

!@#… (이미 다 넘어간 후 반성문)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처럼, 캣츠비는 사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하거나 특별히 구체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뷰 본문에서 언급했듯, 일정 부분 기본설정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굳이 개츠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그 ‘낭만’의 공식이 지극히 원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데, 다시 읽어보니 그 이야기를 참 애매하게 풀어냈다는 점을 깨닫고는 후회중.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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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김낙호(만화연구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영미권 문학의 나름대로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필자에게는 ‘맨 온더 문’이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분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이, 자신의 코미디 쇼를 보러온 관객들 앞에서 뜬금없이 하루 종일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을 함으로써 황당한 물의를 일으킨 그 소설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의 개츠비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데이지라는 상류층 처자와 서로 좋아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람이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데이지는 부자집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래서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자기도 부자가 된다. 돈으로 데이지에게 당당해진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는 부자남편의 정부를 자동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죄를 뒤집어 쓴다. 결말까지 폭로하자면(설마 이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에도 누설방지 유통기한이 적용되지는 않으리라 보고), 개츠비는 결국 죽은 여자의 남편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공식은 한국 환경으로 그대로 옮겨도 사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신분의 차이, 오기에 찬 물리적 조건 극복, 그 속에서의 인간성 상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결국 비극적 희생. <공포의 외인구단>을 위시한 수많은 비장미 넘치는 80년대 극화체 만화들이 흔히 써먹었던 기본구도다. 그래서 고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한국으로 번안된 개츠비 이야기가 인기 연재 만화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에서 <위대한 캣츠비>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내용은 “안봐도 비디오”겠구나. 결과는? 부자와 결혼해버리는 여자, 별 볼일 없는 주인공, 시대 속에서 꼬이는 사랑이 이야기 전체의 원동력이라는 정도의 기본설정이 공통점. 하지만 화려한 활극의 느낌마저 있었던 개츠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쪽의 주인공 캣츠비는 훨씬 더 구차하고, 소심하고, 끝까지 별 볼일 없는, 그냥 어떤 참 운명이 꼬인 현대 한국의 궁상 백수 청년의 사랑담이다.

최근 연재종료를 맞이했고, 종이 단행본 2권이 출간된 온라인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애니북스)의 연재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지기 쉬운 온라인 만화에서는 아직 비교적 희귀한 쪽에 속하는, 장편 연재물이라서? 확실히 그런 측면도 있다. <슬픈나라 비통도시>같은 모음집에서 볼 수 있는 강도하, 또는 강성수라는 작가의 거칠고 실험적인 – 즉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 기존 작품성향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작품은 정제되어 있는 드라마적 투르기와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연출과 끊어내는 타이밍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시각적 표현 역시, 모든 주인공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화적 표현의 재미’를 부여하면서도(하지만 뚜렷한 상징체계를 느끼기는 힘들다), 대단히 세밀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배경 구도와 풍부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묘사로 눈길을 집중시킨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를 배경 또는 소품의 묘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너무 남발해서 부담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몰입하는 독서를 완전히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스크롤의 기본문법을 따르는 칸 연출을 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출간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종이만화의 칸 배열로 완전히 재편집하는 노력을 투자하는 등 한마디로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분명히 시각 연출이든 이야기 연출이든, 표현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우수한, 최소한 독자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만화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만화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활 묘사가 리얼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내 생활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일상 생활 모습 자체에 통찰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리얼한 환경묘사와 달리, 생활은 솔직히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백수생활의 리얼함이라면 고리타의 <룸펜스타>같은 개그만화가 한 수 위다. 아니 사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꼬일대로 꼬인 치정극 이야기가 훨씬 더 작품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와 인기를 끌어낸다면 무언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엇갈리는 우정? 글쎄. 발랄한 여자와 불행한 여자, 발랄한 남자와 궁상맞은 남자의 캐릭터성? 글쎄.

오히려 열쇠는 작가가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이 ‘청춘의 아픔’이라는 엄청나게 구식 느낌을 주는 창작의 변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사랑이 존재방식이 되는, 그리고 사랑의 꼬임이 존재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가히 근대 독일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런 고전적인 접근이 다시 복고풍으로 트렌드를 맞추어 냈다는 것인가. 고전적이고 다소 남성 편향적인 청춘의 고뇌에 대한 과잉된 환상이 2000년대 독자들의 취향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기는 좀 섣부를 것 같다.  글쎄. 그보다, 애초에 사람들은 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을 강타했다가 최근 좀 거품이 가라앉은 감성파 에피소드 만화, 속칭 ‘에세이툰’의 히트를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쿨한 것을 소비(!)하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진짜 ‘취향’이라는 것은 소비 트렌드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원형적인 것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소재와 표현은 세련되게, 알맹이는 오히려 더 고전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국 비극적 인간관계 사건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하튼 사랑이 존재의 원동력이다, 뭐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80년대적 비장미 성인극화와 2000년대적 에세이툰 부류의 이종교배에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냥 연출 표현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작품의 장점도 단점도, 개별 독자들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것도, 이 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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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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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의 미덕 – <바보> [기획회의050904]

신파의 미덕  – <바보>

통상적인 의미와 실제 대상의 괴리를 느끼도록 하는 호칭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어서 ‘미친년’은 어떨까. 통상적으로는 어떤 여자가 뭔가 황당한 짓을 했을 경우 그냥 피식 웃으며 내뱉는 호칭이다. 하지만 원래 이 단어가 진짜로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은, 무언가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실성, 진짜로 정신병리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서 동네를 배회하던 그 사람들이다. ‘지랄한다’, ‘병신 삽질한다’ 등 일련의 비속어들이, 다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태인 무언가를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바보>(강풀(강도영) / 문학세계사)의 첫 머리는 바로 이 지점을 한번 긁어주면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던 바보.” 어라, 생각해보니 필자가 어렸을 때도 동네에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할 때의 바보가 아니라, 진짜 바보 말이다. 아니 더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사 다니던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었던 것 같다. 놀림 받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어른.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서, 어떤 애들보다도 더 애들 같았던 사람들.

<바보>는 ‘<순정만화 씨즌2>’라는 다소 안전한 선택의 부제를 달고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바보 승룡이, 미국에 유학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좌절해서 돌아온 지호, 승룡이의 친구이자 동네 양아치인 진수 등 여러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과 현재의 응어리가 점차 풀려나가는 식이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엇나간 애정, 끈끈한 우정, 조건없는 희생 같은 구식의 감성은, 선천적 유전병, 어린 시절의 사고, 어린 시절의 약속 등 구식의 소재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지겹다’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재미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바보>는 만화가 강풀(강도영)을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순정만화>,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연재했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출간시에는 ‘아파트’로 제목 변경)과 마찬가지로 2권짜리로 묶여 나왔다. 항상 사전에 스토리를 완성하여 4개월 동안 집중 연재를 하고 수개월 휴식을 취하는 이 작가의 방식은, 무한 연재 속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많은 연재만화들의 함정에서 의연하게 벗어나 잘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작품 발표 방식이기도 하다. 전작의 인기에 버금가는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느니, 곧바로 영화화 판권이 팔려나갔다느니 하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충 넘어가더라도, 여하튼 이 작품의 특징과 미덕은 무척 분명하다. 형식적 특성인 칸 경계선을 흐리게 처리하고 그 대신 독백 대사로 연결하는 주관적 서술, 간혹 등장하는 스크롤 넘김 효과의 표현력을 활용하는 한 화면 이상 길이의 세로로 긴 칸(이것은 마치 책 만화의 경우 한 칸으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워서 시선을 제압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은 이제는 굳이 다시 이야기하기도 뭣할 정도로 완전한 스타일로 완성되고 있다. 여러 주인공의 심리적 엇갈림에 의한 다중 시점 전개 역시 인간사의 감성적 면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인 실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독자를 휘어잡는가 하는 측면인데, 능란한 이야기 페이스 조절과 무엇보다 여전한 – 아니 한층 더 강력해진 신파 정서가 <바보>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하나 내심 순수함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 없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엇갈림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항상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연성 없이 몰려오는 여러 비극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순수와 서정의 전도사가 필요하다. 바로, 바보 말이다. 바보 승룡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존재다. 정확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성장을 그만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여러 가치들, 어릴 적의 어떤 빛나는 순간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한다. 작은별 행진곡이든,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든 뭐든 말이다. 승룡이라는 바보라는 존재는 현실에서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그를 낙오자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끌어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우화처럼 포장된다. 누구나 순수한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 이 따뜻한 작품에서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유일한 악역이자 삶의 회복에 실패하는 ‘사’장이라는 자가 이 작품의 매개체인 바보 승룡이와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고스란히 작품의 약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순수를 매개로 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 따라서 비현실적인 – 감상주의를 통해서 인간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환상이다. 심지어 비극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비극적 환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 <순정만화>가 다양한 남녀 간 사랑을 통해서 나름대로 사람 사이 현재에 충실한 솔직한 소통의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에 비해서, <바보>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진행되는 감동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사회파 만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감동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약간이라도 덜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능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따뜻한 감성의 완성된 이야기의 매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바보>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을 위한 멋진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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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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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 강풀의 <순정만화> [으뜸과 버금 0403]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 강풀의 <순정만화>

김낙호 (만화연구가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르겠다. 아마도 피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뜬구름 잡기만이 가능할만한, 엄청나고도 무의미한 질문이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꾸어보면, 모두의 관심사로 탈바꿈한다: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강풀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강도영의 <순정만화>는 바로 이것에 관한 따뜻한 이야기다. 

  <순정만화>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미디어 다음>에 연재중인 만화로, 이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하는 20여 화가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다음이라는 막강한 인터넷 포탈의 힘이 아니더라도, <순정만화>는 어차피 히트를 기록했을 법하도록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극장에서 커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솔로들의 저주를 한몸에 받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 ‘어떻게’라는 과정은 다양하게 펼쳐놓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재미를 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우여곡절, 여러 인연과 사연들이 서로 연결되고 흩어지는 흐름이 결국 큰 맥락에서는 사랑이라는 큰 차원으로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을 독자들이 깨닳을 때, 더 이상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고는 못배긴다. 

  하지만 누구나 알만한 이런 큰 원칙을 좋은 작품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역시 작가 자신의 능력이다. 자신의 사이트 강풀닷컴을 비롯해서 여러 온라인 만화지면을 통해서 수련된 연출호흡은 모니터 친화적이며, 동시에 인터넷 독자들의 독서 및 반응 패턴을 정확하게 맞추어주고 있다. 한 회의 연재분량은 하나의 이야기를 에피소드식으로 끊어나가며, 그 속에서 자기 완결적인 기승전결으로 사람이 만나고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는 결코 지나치게 장황하게 나아가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방식 보다는 한 페이지 안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해도 짜증나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취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단지 수평적인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패턴에 함몰되지 않고 연속극 방식의 내용연결로 이야기의 전개를 축적하여 점점 몰입도를 높여나가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짧은 호흡을 보완해나가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인 것이다. 말하다 보니 대단히 어려운 개념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을 잘 다루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능숙하고 잘 만든 만화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 연재시에 <순정만화>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주었던 여러 장점들이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올 때 과연 살아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선, 다음 연재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힘이 다음 페이지면 다음 이야기가 있는 단행본에서도 통할 것인가. 또한 마치 가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펼쳐보는 듯한 재미를 주던 한 페이지 내에서의 스크롤 방식이, 여러 페이지로 분절된 책 속에서 과연 매력을 발할 것인가. 나아가, 모니터 화면의 저해상도 불빛에 맞추어 놓은 여유로운 컬러 그림과 경계없는 칸의 매력이 종이 위에 빽빽하게 박혀서도 그 투박한 멋을 발휘할까.
  책을 펼쳐본 결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재미있었다. 이때, 필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의 기술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좋은 만화의 진정한 힘,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덕분에 필자도 이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의 다음이, 궁금해 미치겠다.
[으뜸과 버금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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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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