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열광: 이야기의 역습 [문화저널 백도씨 0710]

!@#… 지난 호 문화저널 ‘백도씨’ 커버스토리인 장난감 특집의 도입글. 장난감 수집가 현태준씨의 장난감관이라든지 발랄하고 재미있는 꼭지들이 많은데, 어쩌다가 하필이면 도입글만 이 모양인가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고나. 덕분에 유일하게 사진 위주로 운영되는 ‘모형모형’ 카테고리에도 문자 압박의 습격이… -_-; 여튼, 이전의 키덜트 글에 이어, 토이 좋아하는 어른들이 주변의 열렬한 박해를 이겨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나름대로 지적인 변명 되겠다. 여기 방문객 중 그런 종족의 분들이 많은 것 다 아니까, 알아서들 열심히 퍼트리고 써먹으세요.

장난감 열광: 이야기의 역습

김낙호(만화연구가)

사람들이 장난감에 (대놓고) 열광하는 모습이 최근 여러 지면에서 수년간 신기한 트렌드로 다루어지곤 한다. 그러면서 대부분 제기하는 질문이 바로 ‘왜’ 장난감에 열광할까, 라는 것. 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다. 왜 열광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왜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원래는 열광하다가, 어느 특정 연령대에 들어서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만둘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놓고 봐야 비로소 장난감의 진짜 매력, 기능이 생각난다. 바로 각자의 가슴 속, 기억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어떻게 놀았을까. 우선 장난감의 범주를 살짝 설정하면서 가보자. 모형과 액션토이의 차이는 무얼까. 모형은 놓고 구경하는 것, 토이는 가지고 노는 것. 운동기구와 운동용 장난감의 차이는 무얼까. 운동기구는 진지하게 스포츠를 하는 도구, 운동용 장난감은 그 스포츠를 놀이 수준으로 흉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소꿉놀이 기구나 악기 장난감도 이쪽 범주다). 중간 과정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거두절미 결론을 말하자면, 장난감은 상상력을 개입시키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놀이 활동을 매개하는 도구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 속에, 물건을 쓰는 사람 혹은 아예 물건 그 자체가 새로운 생명과 사연을 부여받는다. 즉 장난감은 상상력과 이야기가 응축된 집약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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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기획회의060901]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

김낙호 (만화연구가)

99년부터 한 3-4년간, 한국에는 유럽만화 출간 붐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이나 미술평론가들의 소개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니코폴』이나 『잉칼』, 『쌍브르』같은 예술적 성취도가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이 썩 괜찮은 번역과 출판 품질로 한국 독자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비록 그쪽 작품들의 이야기 표현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향 등이 아시아 만화권의 화법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붐은 저조한 판매 속에서 이내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이 주었던 시각적 임팩트만큼은 강렬하게 자리매김했다. 흑백이 아닌 컬러, 그것도 익숙한 셀 애니메이션풍이 아닌 다양한 기법들의 향연은 만화 속 그림 자체의 쾌감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었다. 주류 흑백 장르만화라는 출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형태가 곳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한국 작품 중에도 그런 식의 강력한 그림실력과 표현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허용 받는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컴퓨터 모니터와 컬러링에 익숙한 젊은 작가 세대가 데뷔를 해주었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분야는 한층 더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중에는, 만화 특유의 과장을 절제하고 사진에 가까운 수채화풍 그림체로 높은 인지도를 쌓아올린 작가 석정현이 있다. 그가 작업해온 일러스트들은 대중적 인기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가끔 선보이는 단편들은 감동 에세이 스타일이든 짧은 개그물이든 감각적인 위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작가의 본격적인 극만화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폐간된 ‘영점프’ 등 여러 지면에서 작가 자신이 오래 동안 구상하고 있던 근미래 군대경찰 이야기의 설정은 그런 기대를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 『귀신』(석정현 / 길찾기)이 출간되었다.

『귀신』은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진 한반도 서울시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문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군인들의 활약과 그 이면에 있는 군대와 미디어 등이 뒤얽힌 커다란 음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자세한 내용 누설을 방지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 줄거리다. 사회와 미디어, 생체병기로 비유되는 비인간성, 평화의 의미 등에 대한 여러 화두들이 그 속에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예상 가능했듯 시각적 쾌감의 즐거움이다. 섬세한 필치의 고밀도 그림들은 지나친 부담감 없이 페이지 속에서 멋진 사건 시퀀스들을 연출해낸다. 화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액션 연출, 역동적인 포즈, 많은 구상을 투여한 흔적이 엿보이는 각종 기계와 소품 디자인 등은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바를 어김없이 충족시켜준다.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역시 치밀하여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제도와 사회가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있을 법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근미래 SF로서 중요한 미덕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한 이 장르 특유의 현실적인 문제제기와 매력은 이 작품을 만화로서 읽고 소장할 정도의 명분은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좋은 문제의식과 섬세한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주제와 이야기 전개의 미숙한 부분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차원에서는, 좋은 문제의식 방향 설정을 피상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대중 여론 조작이라든지 평화의 진정한 의미란,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미묘한 모순들로 가득하다. 평화를 바라는데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옭아맨다든지, 더한 미디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극에 둔감하게 만든다든지, 사회속의 누구나 결국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며, 보호자이자 동시에 감시대상이라는 점 등 복잡하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아쉽게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주연들과 조연들, 하나의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에 선악의 선을 그어버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헐리우드식 주류 액션 활극의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실제 현실의 중층적 모순을 다루기 좋은 주제와 세계관을 가지고, 어째서 이 정도까지로 타협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주제라는 큰 차원을 떠나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아직 미완성이다. 여러 매력적인 설정을 지닌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와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해야 작품을 행위자들의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극의 완급을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귀신』에 등장하는 여러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런 부분이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처음 시퀀스의 이름 없는 희생자로 잠깐 출연한 젊은 연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인물구축이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소위 ‘귀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으며, 부대원들이 재등장할 때 통쾌한 반전의 기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금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발현에도 방해가 된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서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비극은 공감 가능한 절망이 아닌 ‘설정’으로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2005년도 최고의 활극 모험 영화 가운데 하나인 『킹콩』에서 피터잭슨이 3시간 영화 중 무려 초반의 1시간여를 감정이입 가능한 캐릭터의 구축에 할애했던 전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귀신』은 탄탄한 시각표현과 상상력으로 제작되었으나 결정적인 주제 표현과 캐릭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몇몇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들과 비슷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단위 시퀀스 내에서 감수성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 까지는 당초 작가에게 기대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제와 설정의 무게가 부담을 주었는지, 정작 필연성 있는 캐릭터들의 일관된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다듬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과 일러스트에서 뛰어난 감수성을 인정받은 신인이, 중/장편 극만화 작품 첫 데뷔작에서 나름의 희망을 던져주며 동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지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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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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