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돈을 벌어보자: 마케팅(3) – 정체성이라는 가치부여 [만화규장각 칼럼]

!@#… 근 1년 넘게 쉬었다가 지난 달에 재가동한 시리즈, 한국만화영상진흥원(구 부천만화정보센터) 만화규장각 웹진에 쓰는 ‘만화로 돈을 벌어보자’ 지난 회 원고. 편집완성본은 여기로.

 

마케팅(3) – 정체성이라는 가치부여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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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투표 한 장 2

!@#… 한국시간으로 내일이면 총선. 캡콜닷넷에서는 평소 그렇듯 그냥 아예 자신의 지지성향을 드러내고 홍보한다. 그것이 이번 총선에서는 보시다시피 몇 가지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에 입각해서, 진보신당이고. 내 주머니 상태, 내 사회적 지향점에 맞으니까.

물론 한나라당이 200석을 가져간다고 해도 당장 그 다음날 대지진이 발생하고 하늘에서 개구리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은 아니니 오버할 필요는 없다. 원래 해방후 한국 현대사의 2/3 이상이 그 이상으로 조낸 후진 시스템이었는데도,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르신들도 많을 정도 아닌가. 민주당보고 아직도 탄돌이라고 놀려먹곤 하는데, 10년 동안 통치하면서 나쁘지 않게 방어해낸 부분도 많은 나름대로 기본기는 있는 정당이다. 기타등등 다른 정당들도 나름대로 장단점들이야 있다. 지지자들은 장점에 혹하고 단점은 ‘보완 가능한’ 것으로 보기에 찍어주겠지 뭐. 그게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자신들의 현 상태와 상응하는지에 따라서 멍청한 지지인지 생각이 좀 있는 지지인지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 그냥 하루가 남았다면 그 중 점심 먹고 딱 한 시간동안만이라도, 내가 왜 그 정당을 지지하는가, 그 정당이 과연 내 요구를 충족시켜줄 의지가 있는가, 당장의 식권 한장이 아니라 4년동안, 아니 잘못하면 그걸 수습하느라 들어갈 향후 10년동안의 텀을 놓고 볼 때 과연 나에게 이득이 되어줄 것인가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경제를 살린다는 표어가 아니라 ‘내’ 경제를 살려줄 것인가, 세금을 줄인다는 선심이 아니라 그래서 내게 돌아올 복지혜택이 온전히 남아있을 것인가, 기업규제를 풀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 결과 내 직장이 온전할 것인가, 운하로 관광을 보내겠다는 비전보다 그 삽질 와중에 혹시 내가 관광당하는게 아닌가를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 말이다. 그 결과 어디를 지지하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여하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판단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투표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 하나만 기억하자:

“내 한 표가 내가 원하는 명랑사회를 만드는 것에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아무 생각 없으면 그 길을 확실하게 막는 것 만큼은 할 수 있다.”

!@#… 하기야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이런 마이너 편향 블로그에 놀러오지도 않겠지만.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PS. 그리고 또 한번, 진보신당 한 표 굽신굽신.

이웃의 우토로 [팝툰 13호]

!@#… 8월 마지막주 발간 팝툰에 실린 원고. 다행히 우토로 토지구매 협상시한이 9월말까지 한달 연장되어, 약간은 더 유효한 이야기로서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기본 내용이야 전에 이야기했던 ‘우토로 써먹기‘ 논지 그대로(애초에 같은 타이밍에 썼으니… 하지만 이 연재칼럼 성격에 맞게 서술했을 뿐).

이웃의 우토로

김낙호(만화연구가)

비단 새로운 현상은 물론 아니겠지만, 유독 최근 한국에서 화제가 된 커다란 이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국민’이라는 화두를 달고 나타났다. 버지니아공대 총기 참사든, 아프간 피랍 사건이든, 영화 디워든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때 마다 항상 궁금해지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가 국민으로 이해되고, 무엇이 정말 국민정서, 애국주의니 하는 말로 정말 이슈화가 되는지가 궁금하다. 무엇보다, 실제로 화제가 어떤 실질적인 움직임으로 가는 것은 어떤 경우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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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알약』[기획회의 070501]

!@#… 지난 호에 실렸던 ‘푸른 알약’ 리뷰. 에이즈라는 꽤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참 솔직한 생활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인상적인데, 한편으로는 의료복지체계가 잘 발달한 서유럽권의 나라이기에 그나마 이 정도로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먼저…;;;

 

사랑의 조건 – 『푸른 알약』

김낙호(만화연구가)

질병이란 참 성가신 것이다. 특히 만성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아파서 아무런 대인활동도 하지 못하고 단지 회복에만 전념하기에는 아직 인생을 살만한 정도의 힘이 있고, 그렇다고 해서 병이 가벼운 것은 아니니 자꾸 신경 쓰이고 조심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주변인들의 시선까지 겹치면 한층 복잡해진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 것만으로도 불안해 죽겠는데, 정작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을 하고 호들갑을 떨어서 오히려 부담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에 인간 아무개가 아닌, ***환자 아무개로 사회적 위치가 지워진다. 게다가 이 과정에는 병의 증세가 얼마나 심각한가보다는, 병 자체가 어떤 병인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곤 한다. 즉 병이 바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현존하는 만성적 질병 가운데 가장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힘’이 강한 것은 바로 후천성 면역결핍증, 에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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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돈과 나: 소비와 정체성

!@#… 돈이 개입되면 ‘나’만 보인다. 최근 ‘사이언스’ 저널 (황사기 사건, 특히 KBS 홍사훈 기자의 일급 황빠질 덕분에 한국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해진 바로 그 지면)의 뉴스란에 소개된 심리학 실험 논문의 결과다.

사이언스지의 기사 클릭.

!@#… 내용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네소타 대학의 Kathleen Vohs 교수와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데려다놓고는 한 그룹에는 다른 과제를 주어주기 전에 돈과 관련된 사전 자극을 주었다 (돈에 관한 에세이를 읽게 하든지, 여러가지 돈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하든지, 기타등등). 그 뒤 퍼즐 풀기 과제라든지, 설문지 등을 풀게 했다. 그 결과 사전에 돈을 떠올리게 했던 그룹의 사람들은 과제 풀이에 있어서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타인과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라고 하자 의자를 더 멀리 떨어트려 놓고, 설문지에도 혼자하는 활동들을 선호한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더 비사회적이 되었다는 것. 돈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가버린다는 결론 되겠다.

!@#… 그러고보니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유리에 은칠을 하면 거울이 된다고. 즉 돈이 개입되면 자신만 보이게 된다는 것. 동감이다. 돈이 단순히 물질적 축적의 의미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옛날과는 다르다. 현대 사회라는 것에서 돈은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역할까지 하니까 말이다. ‘I am what I eat’ 가 아니라, ‘I am what I spend‘다. 위의 연구는 아마도 돈과 사회성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듯 하지만, 제멋대로 지엽적인 것에 관심가지는 capcold는 바로 이 소비에 의한 정체성이라는 측면을 떠올린다.

!@#… 원래 소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이 있다. 베블렌이라는 학자가 19세기 말 미국의 졸부들의 생활행태를 묘사하면서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이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생활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과시를 위한 소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생각, 하나의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뭐랄까, 사람들은 흔히 과시의 대상을 남에게만 한정하곤 한다. 하지만 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과시의 대상이라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주변의 남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들과 자신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체성을 위해서 과시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행동이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부르디외의 문화취향 이론과 베블렌의 소비 개념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 활동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다. 단지 물건이나 서비스 자체보다,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것이다. 커피의 맛 자체가 아니라, 비싼 아이스 후라푸치노를 먹는다고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언론학의 프레이밍 이론을 아주 멋드러지게 대중화시키고 있는 레이코프의 이론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따라서 투표한다고 주장했듯, 사람들은 소비 역시 즉각적 효용보다는 정체성에 따라서 한다는 생각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과시인 셈이다.

!@#… 뭐 이런 이야기를 어디다 써먹을까. 예를 들어 마케팅. 제품의 우수성 어쩌고는 그냥 기본 전제로만 깔아야 할 따름이다. 이것을 소비하기에 바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접근, 바로 그런 컨셉이 명확해야 팔린다 (예: 애플의 아이팟). 단지 우수한 사람이다 잘난 사람이다라는 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개성이 확립된다는 것. 이것을 하면 우수한 사람이라는 식의 성장지향 천민자본주의 마케팅도 물론 여러 분야에서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레벨의 경쟁이 이루어질 경우, 또는 판이 전체적으로 망가진 경우, 또는 취향의 힘이 강력한 변수가 되는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이런 정체성 소비가 한층 중요해진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성찰의 시스템. 남에 대한 과시라면 통제 불능이다. 사회의 성장 속도,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말라 죽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학문(…-_-;)이나 성명서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과시의 경우, 성찰적 훈련을 통해서 일정 부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발달시킬 수 있다. 즉 성찰의 인지적 훈련에 대한 단초가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소비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곧 나는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내가 취하고 있는 방법은 과연 합리적/효율적/심리적으로 만족스러운가라는 한층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돈, 즉 소비가 지니는 역할을 부정적으로 폄하하지 않고 현대적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현대사회 속에서의 성찰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돈은 자꾸 ‘나’를 보게 한다는 연구가 나왔다면, 돈을 ‘나’를 돌아보는 도구로 사용해보자는 발상을 파고 들어가보자는 작은 생각이다. 나중에 뭔가 자료만 잘 뽑아낼 수 있다면 논문이나 써볼까… 아마 무시당하겠지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