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아랍인을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 – 미래의 아랍인 [기획회의 388호]

!@#… 모순과 위선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바라보는 디테일의 힘이 가득한 작품. 중동 현대사 학습용으로 치부할 것이 아닌,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기 좋다.

 

더 나은 아랍인을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 – [미래의 아랍인]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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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만든 현대사에 애증을 보내다 – 『야후』[기획회의 262호]

!@#… 하지만 이번 완전판의 새 표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수한 필력과 별개로, 억누르다가 찌든 광기 같은 이 작품 특유의 ‘분위기’를 표현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

 

아버지가 만든 현대사에 애증을 보내다 – 『야후』

김낙호(만화연구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버지’가 만들었다. 하나님 아버지 운운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들의 역할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다. 산업화 개발역군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사회의 면면을 구성하고 움직이며, 그 방식을 다음 세대에게 사회적으로 훈육시키고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엄한 아버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살펴주는 어머니라는 역할과 대비되는 그 아버지상은 필연적으로 애증의 대상이 된다. 특정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는 그것에 따를 것을 강요하기에 속박의 상징이며, 다른 세계를 만들고자 할 때 극복하거나 물리쳐야할 장벽이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같은 사회에서 비슷한 각자의 목표를 노리는 라이벌이다(굳이 프로이드 비유가 아니라도). 하지만 그 아버지상을 필요로 하며, 마지막에는 어느덧 그 모습과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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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만든 역사 – 『야후』[전자신문 091218]

!@#… 이상하게 전자신문 연재는 마가 끼곤 한다. 이번에는 랩탑님이 장렬하게 가사 상태에 빠진 때에 이번 주 마감임을 잊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마감전날의 독촉메일조차 배송사고로 소실. 그리고 실로 마감 코앞임을 강조하며 곧바로 원고가 안오면 지난달의 악몽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담당기자님의 엄포와 함께 급히 마무리… 미리 토픽들을 몇 회차 뽑아놨기에 천만다행. 여하튼 전자신문 게재본은 여기로.

 

아버지가 만든 역사 – 『야후』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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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20주년.

!@#… 날이 날인 만큼, 한번 쯤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6월 항쟁 20주년.

http://orumi.egloos.com/3219672
– 민중, 노동자, 혁명 같은 과장된 개념으로 떡칠하지 않고도 전체 과정을 잘 정리한 글을 찾기란 참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추천.

http://u610.cafe24.com/museum/bbs/
– 인터넷 6월항쟁 기념관. 부담스러운 해석도 많지만, 가장 많은 자료 보유. 특히 85-87년 사이의 관련보도들을 모아놓은 신문스크랩 자료실 추천(저작권상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 비굴보도의 달인, 조선일보가 미포함인게 아쉬울 따름.

http://unbeliever.egloos.com/3221694
– 먼 옛날 한 때, 팩트 근본주의의 사도로 올바른 기자상에 가까웠던 조갑제1.0의 부마항쟁 묘사.

“벅찬 승리였고 시린 상처였다” (한겨레21)
– 대선주자들, 그 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http://scemo.egloos.com/3483353
– 흐릿해지는 기억에 관하여.

김동원 감독 “6월항쟁 자화자찬 할 게 아니다” (연합뉴스)
– “6월 항쟁은 중산층 등 시민운동 진영 뿐만 아니라 철거민 등 기층민들이 참여했던 운동인데 97년도 그렇고 올해도 기념사업회 어느 모퉁이에도 그들이 함께 자리하지 않고 있다” – 김동원 감독

도박의 현대사 – 『타짜』[기획회의 070415]

!@#… 왠 뒷북 ‘타짜’냐고 한다면… 영화 덕분에 다시 한번 유명세도 타고, 신판본으로 완결까지 된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제 때에 이 작품에 대해서는 사후분석이 아닌 ‘리뷰’를 할만한 타이밍을 잡기 힘들 듯 하여 4월 초에는 그냥 이걸로 갔다. 앞으로는 한동안 다시 신간다운 신간(?)으로 리뷰 대상을 스위치하고자 (지난호에는 푸른 알약이 들어갔고, 이번호에는 크로니클스 예정) 한다.

 

『타짜』 – 도박의 현대사

김낙호(만화연구가)

도박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확률과 보상의 크기를 놓고 서로의 판단력을 겨루는 대결이다. 성공의 확률이 낮을 수록 보상의 크기는 커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얻어냈을 때 일시적으로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그 성취감이 지극히 중독적이라는 것, 그리고 역시 크게 실패할 확률이 애초부터 훨씬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독된 사례라면 대부분, 재도전 자체가 불가능해질 때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붇고 산화하기까지 한다. 정말로 돈을 따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확률적으로 계산해서 차라리 적금을 붓고 투자 펀드에 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 도박은 어디까지나, 돈 자체의 문제 이전에 돈을 매개로 한 스릴에 대한 집착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하는 원래의 목적이든 생각이든 뇌리에서 증발하는 경우까지도 종종 발생한다. 이기는 것, 복수하는 것, 혹은 그냥 ‘손맛’ 그 자체에 힘을 쏟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극대화된 경쟁에 스스로 도취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자면 비단 도박이라는 극단적인(?) 놀이문화가 아니라도, 정치가 되었든 현대 자본주의가 되었든 한국사회에서 종종 나타난 공통된 패턴이기도 하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왜 잘 살아보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냥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룰도 없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이 한국의 현대사다. 성찰과 룰을 생략하고 입시경쟁과 취직시험 경쟁에 몰아넣고, 낮은 확률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각종 족집게 과외와 꼼수들을 머리에 우겨넣는 것이 우리 생활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야 말로 목적을 잃은 스릴 중독이고, 우리가 걸어온 길 자체가 도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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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기획회의 051129]

!@#… 이전에도 다른 글로 지적한 바 있고 이번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은 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러스함이 상당히 많이 뭉개지니까. “Russians are not like us” 라는 대사를 “러시아인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단다”(불어판이 아닌, 영어판에서 중역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라고 쓴 것은 그나마 아예 명백한 오역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튼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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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라는 생물은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사회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사회를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사회 속에 들어있다면 더욱 더 시야와 세계관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들이든 작가든 혹은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일반인이든 누구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시각이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당당하게 내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극에서 그것은 ‘1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것으로 구현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를 읽어냄에 있어서 전모는 커녕 일반인 수준의 파악도 되지 않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이라면 어떨까. 우매한 자의 눈, 즉 일반적인 남성 성인 주도의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나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주부, 아이, 바보 등의 시점 말이다. 비록 이야기 속 상황을 읽어냄에 있어서 대단히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매한 자의 눈’은 매력적이다. 우매한 자의 눈으로 보면 사회 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면서 살아나가는 과정이란 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인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 괴리를 보면서 유머와 아이러니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약간만 생각해보면, 우매한 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는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찰로 이르는 이 과정 속에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녹아들어간다. <포레스트 검프>, <케빈은 열두살>, <양철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많은 이야기 작품들이 우매한 자의 눈을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일상과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서, 이 기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 새만화책 / 1권 발매중)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놓여있는 수작이다. 현대 이란이라는 사회가 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무려 테헤란로라고 이름 붙인 것과는 달리,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듯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짧은 해방감과 근본주의 진영의 반동에 의한 독재 재개, 이웃나라와의 전쟁, 미국의 개입… 순서와 패턴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현대사의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페르세폴리스> 1권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꼬마 마르지, 즉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담이다. 여자 아이의 우매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현대사의 격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여러 모순과 함의, 그리고 희망들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냥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마르지는 비록 진보적 성향의 집안의 딸이지만 여하튼 꼬마인 덕분에 사회주의, 종교근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담론 덩어리들도 고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피상적 표어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그러했듯, 정작 감동적인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사회운동가 아누쉬 삼촌의 이야기, 폭격으로 사라진 친구 이야기 같은 무거운 순간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인기 여성 락커 킴 와일드의 포스터를 밀수해 들여오고 이웃끼리 술파티를 벌이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있다. 조숙하고 활달한 꼬마 마르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 자신의 눈보다는 어린 시절의 우매한 눈으로 회상하는 작가 사트라피의 유머감각이 함께 녹아들어가면서 작품은 유머와 진지함, 품격과 발랄함을 얻어낸다.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생활과 이념, 격변기 이슬람 세계 속 여성의 위치, 중동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관계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화로서의 연출 효과 역시 큰 매력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그리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간결한 흑백 그림체는 아이의 눈과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추상적 느낌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가끔 칸 내에서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칸 간 연출의 기본은 쉬운 독서가 가능한 명료한 스타일을 따른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의 언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서구만화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나레이션의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효과적인 만화 표현으로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인 셈이다.

확실히 이런 우수한 만화가 소개되어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 문제에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1권의 부제인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역되어서 한 사회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이 작품의 의미를 한 개인의 특이한 경험담으로 축소하는 등의 미묘한 차원의 실수는 그냥 아쉬움으로 남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스크바’ 에피소드의 첫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마르지가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아빠를 둔 자격지심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허풍을 떨고 아이들은 그 허풍이 너무 심해서 기가 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진짜로 운동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삼촌 야누쉬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자랑해도 친구들이 여전히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과 댓구를 이루며 훌륭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하지만 번역판에서는 오역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매한 자의 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과 유머를 통해서 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사례다. 만화라는 장르가 꼭 유머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작품성 있는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머라는 큰 매력이 억지로 거부당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2판부터는 이러한 지점들이 잘 수정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또한 이란 사회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무지를 고려할 때, 역사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해설이 첨부되었더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다.

<페르세폴리스> 1권의 결말에서 사춘기의 나이로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지는, 2권에서 서구 생활의 풍파를 겪은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아이의 우매한 눈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번 출간된 1권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는 ‘사회성과 작품성이 있는 서구만화’의 왕좌를 오랫동안 지켜온 <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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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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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단상.

!@#…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며 시작된 50년대. 국가와 민족이 뭔지도 모르면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몸바친 6-70년대. 자유가 뭔지도 모르면서 자유를 위해 항거한 80년대. 선진사회가 뭔지도 모르면서 선진사회를 위해 매진한 90년대. 매번 무언가 이루었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와는 좀 달랐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과도 좀 달랐고, 자유와도 좀 달랐고, 선진사회와도 좀 달랐다. 그리고 이제는 벌써 2000년대 중반. 성찰의 부재가 낳은 축적된 업보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 한국 현대사에서 극좌에서 극우까지 동시에 관통하는 척추와도 같았던 두 개의 이데올로기, “발전주의”와 “민족주의”. 이제는 그 두 개가 화학적 합성작용을 해서 “국익만능주의”라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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