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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야오이 - 여성이 선택한 죄책감 없는 포르노그라피
만화는 흐른다 04/02/27 05:29 
* 본 글은 2004년 2월에 발간된 [만화세계정복](두고보자 저)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 하에 "야오이, 여성이 선택한 적극적인 장르"를 여성만화프로젝트에 게재합니다.


1. 야오이는 무엇인가.

동성간의 사랑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 왔고, 동성애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소녀 만화와 한국의 순정 만화(이하 소녀/순정 만화)에서도 동성애적 요소가 가미된 작품은 오래 전부터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야오이やおい는 동성애물의 하위장르가 아니다. 동성애물과 야오이는 흥미는 같은 곳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창작자도 수용자도 다르며, 그들이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입장도 다르다. 오히려 야오이는 소녀/순정 만화에서 시작되었고, 작화나 캐릭터 설정, 플롯 등 많은 부분을 소녀/순정 만화에 기대고 있다.

(1) 야오이의 정의 : 남자 캐릭터와 남자 캐릭터간의 사랑과 연애, 성행위가 중점이 되는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의 장르.

(2) 명칭의 유래 : 야마나시やまなし(극적 상황이 없고), 오치나시おちなし(반전이 없고), 이미나시いみなし(의미가 없다)라는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3) 특징 : 명칭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작품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캐릭터간의 탐미적인 연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남성간의 포르노.

(4) 예시 : 야오이 만화의 효시로 불리는 두 작가의 작품을 대강 살펴보면, 야오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① [절애][BRONZE]

1989년 일본. 인기 가수 난조 코지. 어느 날 빗속에서 술을 마시고 헤매다 쓰러진다.
그러나 이즈미 타쿠토라는 한 고교 축구 선수의 도움으로 정신을 되찾는다. 고열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코지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이즈미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한편, 이즈미가 고열로 쓰러지고, 코지는 그를 돌본다. 이즈미는 코지가 과거를 들춰내자 화를 내고, 상처를 받은 채 떠나고 코지는 이즈미를 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여자와 스캔들을 일으킨다. 코지는 이즈미를 범하려 하고 이즈미는 코지에 대한 반발로 후배 여자와 사귀고 코지는 이즈미와 동거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자르고 의수를 달고 그들을 시기하는 아키히토에 의해 이즈미는 하반신 불구가 되고

... 그들의 사랑은 계속된다.


(왼쪽) [절애] 코지는 난조 가의 차기 당주. 가문과의 인연을 끊고 이즈미와 살기 위해 스스로 팔을 자른다. - "제단에라도 장식해 두시지"








② [바람과 나무의 시]

1860년대, 남작가의 후손과 집시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르쥬.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모교에 입학한다. 그의 룸메이트는 남창으로 불리는 질베르.

질베르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친부 오귀스트의 육체적 정신적 노예이다. 질베르가 성의 노예가 된 것은 오귀스트의 친구인 게이 화가의 강간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성을 알아버린 질베르는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학원생들과 잠자리를 하고 있는 것.

세르쥬 역시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세르쥬에 의해 진정한 사랑을 안 질베르.
그들은 사랑의 도피를 하지만...


(위) [바람과 나무의 시]. 질베르는 세르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몸을 판다. -















2. 야오이의 도입과 수용

일본의 야오이의 효시는 다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와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등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간의 성애 묘사와 극단적인 탐미성은 지금의 시각에서도 충분히 파격적이다.

본격적인 야오이 시대의 개막은 오자키 미나미의 [절애]와 [BRONZE]로 이루어졌다. 두 남성간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사랑을 다룬 이 만화는 절대적인 인기를 얻으며 야오이 장르를 열었다. 일본에서 야오이는 레이디스 코믹과 함께 성의 표현 수위가 높은 여성 만화 장르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야오이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일본 문화의 수입 금지와 검열의 가위에 눌린 일본의 야오이 만화는 처음에는 나체에 옷을 입히거나, 남자를 여자로 둔갑시켜 줄거리도 알 수 없게 변모하여 수입되었다.

야오이를 본격적으로 수용한 집단은 아마추어 만화 동호회원, 즉 동인 집단이다. 동인은 프로 만화가를 지망하며 아마추어 작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브론즈]와 [절애]가 해적판으로 국내에 소개된 1993년 전후를 기점으로 동인 세계는 변화한다. 점차 동성애(혹은 동성애적 코드가 삽입된)물을 그리는 아마추어 작가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소수에 그치고, 창작물에 비해 평가가 떨어지고 판매율도 낮던 패러디물이 동인계에서 인기를 얻게 되는데, 일반적인 패러디물이 원작을 재해석하거나 비틀어 다시 읽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반면, 동인들이 원작에 취하는 태도는 팬이 가지는 일방향적인 모방이나 찬양에 가깝다. 이 새로운 장르를 팬픽션(fanfiction), 줄여서 팬픽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잠깐 한국 만화계에서의 동인의 정의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 동인 同人

① 같은 사람, 앞서 말한 그사람
② 뜻이나 취미를 같이하는 사람
③ 소설, 시, 수필, 칼럼 등을 쓰고 읽는 집단.
④ 패러디나 야한 만화를 그리는 변태들
⑤ 오타쿠. 수집가.

동인의 정의는 다양하고, 조금씩은 다 맞다. ①은 지시어로서의 동인이고, ②는 사전적인 정의이다. ③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인의 의미이고, ④와 ⑤는? 편견일 수도 있는 만화나 게임의 영역에서의 동인이다. 만화계에서 받아들여지는 동인은 ③의 활동을 ④와 ⑤를 통해 보이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인계에서 팬픽은 원작과는 무관한 새로운 인과나 인물관계를 창조해내는 것에 중점이 있다. 새로운 관계는 예외 없이 하나로 귀결되는데, 두 남성 캐릭터의 연애 감정, 혹은 관계이다. 패러디와 야오이가 동인계에서 팬픽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아마추어 동인 시장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팬픽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만화계에서 동인은 일반적으로 ‘야오이적인 감수성으로 원작을 해석하고 팬픽을 만드는 여성 집단’으로 인식된다. 주1)

한편, 야오이는 점차 동인이 아닌 프로 작가에게도 수용되고, 90년대 중반 이후 그 저변은 급격하게 확대된다. 성gender의 담론화의 물결까지 탄 야오이는 1997년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순정 만화의 표현 수위가 엄격하게 규제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지금은 자연스러운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왼쪽)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 수첩] | (오른쪽) [색슨식 거짓말]
90년대 들어서면서 동인 활동을 시작으로 만화계에 입문하는 작가도, 프로와 동인 활동을 겸하는 작가도 늘어났기 때문에 프로 만화계와 동인계를 완벽히 분리할 수는 없다.



3. 무엇이 야오이를 매력적으로 만드는가.

여성이 야오이를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소개된지 10년도 되지 않아 야오이라는 명칭도, 장르도 폭넓게 인식되고 수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인들이 팬픽에서 굳이 남성간의 커플링[각주 : 두 캐릭터를 연결시켜 연인으로 만드는 것]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 관계의 수비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남자 캐릭터가 늘어나는 것이 좋아서? 물론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이런 국지적인 요소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매력 포인트가 야오이에는 존재한다.

(1) 야오이 - 소녀/순정 만화적 멜로의 계승

한 작품에서 극적인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갈등은 필수이다. 소녀/순정 만화의 경우 극적인 감동은 사랑의 완성이고, 갈등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의 완성을 방해하는 여러 사건과 상황, 혹은 심리다. 갈등이 크면 클수록,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했을 때, 즉 클라이막스에 이르렀을 때 감동은 커진다. 사랑과 갈등의 드라마! 멜로는 소녀/순정 만화를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였다.

하지만 소녀/순정 만화에서의 갈등이 점차 패턴화되면서 감동도 패턴화되었다. 주인공은 ① 주변인의 반대에 부딪치거나([비천무], [꽃보다 남자]) ②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거나([테르미도르], [베르사이유의 장미], [불새의 늪]) ③ 신분차가 크거나([불의 검], [캔디캔디], [아뉴스데이]) ④ 주인공에게 밝히지 못할 과거가 있거나([올훼스의 창]), ⑤ 서로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해 오해가 유발되며 ([풀하우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갈등이 해소되면서 감동이 생긴다. 패턴화가 진행되면서 갈등의 긴장감은 점차 약화되고, 독자들은 점차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



([캔디 캔디], [불새의 늪], [테르미도르], [풀하우스])
고전적인 소녀/순정 만화에서 극적 긴장감은 인위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높다.


감동이 줄어들면서 소녀/순정 만화가 택한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폭포수 같은 감정의 홍수를 포기하고 노선 전환으로 나섰고, 점차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좀더 자극적이고 다른 비극성을 찾아내는 것.


소녀/순정 만화에서 비극성은 희석되고 일상의 이야기가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비극적 순정 만화가 사라진 자리에 야오이가 들어섰다. 야오이는 새롭고도 자극적인 갈등 구조를 만들어낸다. 위의 모든 갈등을 극복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성별의 문제. 가장 원초적인 금기의 영역인 것이다. 남성과 남성의 연애는 ① 주변인의 반대는 물론 ② 사회의 인정을 받기도 힘들고 ③ 무엇보다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 힘들다.

(왼쪽) [후지미 교향악단]. 동성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이성에게 마음을 여는 것보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소녀 만화가 드라이해지면서 꽃발 날리고 끈끈한 야오이 만화가 등장하였다. 한국에서도 순정 만화가 점차 현실에 편입하면서 꿈같은 외모의 남자 주인공들이 비현실적인 연애를 하는 한국 동인 만화들이 수면 위로 상승하였다. 요컨데, 야오이는 21세기의 소녀/순정 만화에서 희석된 고전적인 비극성을 동성간의 사랑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물론 야오이 만화가 폭넓게 퍼진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야오이의 갈등 구조 역시 패턴화되고, 익숙해지고, 식상해졌다. 특히 현재의 동인물, 야오이물의 주류인 팬픽에서는 비극적인 플롯보다는 개그가 주를 이룬다. 극적 구조에 있어서 팬픽은 패러디물에 가까운 것이다] 야오이는 또 새로운 비극성과 갈등 구조를 찾아 탈피중이다. 근친 상간이나, 이종(異種)간의 사랑 등.


(왼쪽) [에어조단은 300원 2]






(2) 야오이 - 여성의 포르노그래피, 새로운 하이틴 로맨스

오랫동안 소녀/순정 만화는 여성들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충족시켜주기도 하고 가벼운 수준의 포르노그래피로서 소비되기도 하였다. 할리퀸 북스로 대표되는 하이틴 로맨스 역시 마찬가지다. 야오이는 소녀/순정 만화보다, 하이틴 로맨스보다 쾌락을 향해 일보 전진한 장르이다. 남성과 남성간의 연애물이기 때문이다.

여성 독자는 야오이를 읽으며 두 가지 시선을 지닌다. 전지적 화자로서의 시선과 수(야오이의 성행위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의 시선. 주2) 전자는 드라마를 이끌어나가고 커플링을 성사시키는 창작자이다. 후자는 연애물 혹은 소프트코어를 소비하는 소비자이다. 여성들은 자신을 수에 감정 이입하고, 자신의 이상형인 멋진 남성 공(야오이의 성행위에서 남성 역할을 하는 남성)과의 폭력적이고도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여러가지 묘사를 읽으며 쾌락을 얻는다.


(왼쪽) [올훼스의 창]. 시청자들이 일일 연속극이나 주말 드라마를 보며 등장 인물의 연애와 갈등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은, 오해와 엇갈림으로 스쳐지나가는 모든 상황을, 시청자들은 알기 때문이다.


야오이 속의 남남(男男)관계는 이성애물의 남여(男女)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의 외모와 성격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전형적인 모습이고, 공의 외모와 성격은 남성의 그것이다. 강간 환타지가 온전히 살아있고, 여성과 남성의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는 수와 공에 그대로 대입된다.

여성이 남성에게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성행위를 강요당하는 내용에서는, 설사 여성 독자들이 쾌감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정치성과 도덕성이 개입되어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 즉 수일 경우는 다르다. 강도 높은 장면에서도, 폭력적이고 남성과 남성 간의 성행위이기 때문에 여성 독자는 죄책감이 덜하다. 독자들은 수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지만,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쾌락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수는 나이자, 내가 아닌 것이다. 야오이에서 남성간의 성행위는 퀴어물에서처럼 거리두기가 아니다. 오히려 도덕성이나 죄책감을 떨어내고 좀더 쾌락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오이는 -비록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할 지라도-강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확실한 포르노그래피이자 성적 환상이다. 그것도 매우 효과적인.


(위쪽) [지구인]은 더이상 이성에게 성욕을 느끼지 못하여 종족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동성 간의 사랑은 극형에 처해지기 때문에 더욱 유혹적이고 조심스럽다.

(3) 팬픽 - 간단하고 효과적인 작품 비틀기

동성간의 커플링은 원작을 패러디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한 작품 내에서는 남자 캐릭터와 여자 캐릭터가 커플이 된다는 것이 고전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작품에서 연애 관계는 이성애로 귀결된다. 이성애가 자연스러운 결론인 원작에 야오이라는 메스를 들이대면 해체 작업을 아주 쉽다.
원작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충분히 가능한, 심지어 원작자를 조금 당황하게 할 만큼의 재치있고 행간을 읽는 재해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간단하다. 기존의 남자 캐릭터 두 명을 뽑아 끼워넣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작품을 아주 깊고 길게 파고 들지 않는 이상 간단하고 재치있는 촌철살인이나 주인공 두 명간의 연애 감정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뽑아낼 수 있는 패러디이다. 이러한 단순함이 바로 동인계에서 야오이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이유이다.


[검은 튤립 시리즈]는 순정 만화와 변신물 자체에 대한 패러디로서 야오이를 수용한다.



(4) 팬픽 - 남성의 세계에 편입하려는 여성의 시도

한편, 어째서 소년만화가 팬픽 소재의 대다수를 차지할까. 여성이라면 응당 소녀 만화나 순정 만화에 더 큰 매력을 느낄 만한데, 팬픽의 대다수는 점프류 소년 만화이다. 히트한 소녀/순정 만화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소년 만화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① 감정 이입이 가능한 소년 만화 캐릭터와 ②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플롯에 그 원인이 있다.

여성이 소녀/순정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여자 캐릭터에게 감정 이입을 하기 때문이다. 여성 독자들은 여자 캐릭터가 겪는 사랑의 시련과 아픔을 자신이 겪는 것인양 받아들이고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반면 소녀/순정 만화의 남자 캐릭터는 여자 캐릭터의 애인이다. 독자들은 남자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고, 현실의 여자와도 어울리지 않고, 작품 내의 여자 캐릭터와만 어울리는 남성이 되는 것이다.

반면 소년 만화의 남자 캐릭터들은 -예쁜 외모나 능력 면에서는 소녀/순정 만화에 결코 뒤쳐지지 않지만-훨씬 평범하고 현실적이다. 주 독자가 남성이기 때문이다(반대로 소년 만화의 여자 캐릭터는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반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남자 캐릭터가 자신인 양 생각하며 소년 만화를 읽어나간다.

동인물로 돌아가보자. 동인물의 주인공 커플은 둘 다 남성이다. 작가가 거리두기를 의도하지 않는 한 독자는 커플 중 한 명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파트너로 인식하게 마련이다. 이 때 독자가 ‘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소녀/순정 만화의 남자 캐릭터보다는 소년 만화의 그것이다. 성(性)이 바뀌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감정 이입의 정도이기 때문에.

한편, 플롯 면에서도 소년 만화를 팬픽화하기 훨씬 용이하다. 소녀/순정 만화에서 주제는 ‘사랑의 완성‘이고 극적 전개는 주제를 완성하기 위한 보조 장치이다. 캐릭터들 사이의 감정은 설정 단계부터 치밀하게 엮여 있고, 이 벽은 너무나 단단하고 흠이 없어 독자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곡괭이 삼아 파고들 여지는 거의 없다.

반면 소년 만화는 모험과 갈등을 통한 ‘성장’이 주제이다. 올망졸망 짜여진 로드 무비인 소년 만화에서, 캐릭터의 무기나 아이템은 잘 설정되어 있어도 캐릭터들 사이의 감정 설정은 느슨하다. 소녀/순정 만화에서처럼 작품을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소년 만화를 소재로 삼는 것은 바로 플롯과 감정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비어있는 묘한 심리 변화의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는 것에 매혹되고, 그것이 창작과 소비, 즉 동인 활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소년 만화를 소재로 한다면, 원작 내에서 아무런 육체적, 정신적 교감이 없는 상대라 할 지라도 얼마든지 정황과 플롯을 이용, 심리 묘사를 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 팬픽은 여기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왼쪽) [헌터×헌터]. 곤과 키르아는 절친한 친구이지만 그들의 우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헌터×헌터]의 배경 설정이 꽉 짜여져 있는 것에 비해 캐릭터간의 감정의 설정은 매우 느슨하다.


여성들은 남성의 전유물인 소년 만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남성이 감정 이입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그러나 소년 만화 세계로의 편입 작전은 전복이나 새로움이 아닌, 소녀/순정 만화에서도 식상한, 진부한 연애의 난립으로 이루어진다. 여자 캐릭터는 팬픽에서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커플링의 방해자이거나, 커플링의 지지자이다. 야오이물이 퀴어물이 아닌 것처럼, 수가 여성성을 답습하는 것처럼, 남성 세계로 편입하려는 여성들의 시도 역시 무정치적이다. 편입은 어찌보면 소녀/순정 만화가 자신의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진행된다.


4. 야오이 - 여성이 선택한 적극적인 장르

야오이는 여성이 소비하는 성애물이고, 로맨스이다. 야오이의 독자들은 금기시된 욕망으로 여겨지는 동성애를, 여성의 쾌락을 위해 재구성한다. 멜로 드라마적 극적 긴장감과 감동을 위해 소재로 차용한다. 그리고 남성의 만화인 소년 만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수용한다.

퀴어물의 시각에서 볼 때 야오이는 분명히 반동적이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성의 쾌락이라는 측면에서 야오이는, 독자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는 현명한 포르노그래피이다. 소녀/순정 만화의 탐미성과 극적인 긴장감을 이어 받은 장르이기도 하다. 야오이는 자유로운 창작과 소비가 가능한 동인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았고. 그 영향력은 소년 만화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스트 바둑왕]은 소년지인 [소년점프]에 연재되고 있는 소년 만화이지만 동인을 의식하고 캐릭터와 플롯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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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각주/참고사항

주1) 아직도 결과 같은 실력파 프로지향 아마추어 동인집단이 꾸준히 동인 활동을 하고 있고, 야오이물 중에서도 단순한 원작 페스티쉬를 넘어서 작품 뒤틀기를 시도하거나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양적으로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논의하지 않도록 하겠다.

주2) 이중적 시선은 소녀/순정 만화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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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서지 정보

한국 작품
김혜린, 2003, [테르미도르], 길찾기
이정애, 1998,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 수첩], 대원
김혜린, 1997, [비천무], 대원
김혜린, 1999, [불의 검], 대원
황미나, 1997, [불새의 늪], 서울문화사
황미나, 1999, [아뉴스데이], 대원
원수연, 1997, [풀하우스], 학산문화사

일본 작품
오자키 미나미, 2001, [絶愛], 학산문화사
오자키 미나미, 2001, [BRONZE], 학산문화사
가미오 요코, 1997, [꽃보다 남자] , 서울문화사
이케다 리요코, 2001, [베르사이유의 장미], 대원
이케다 리요코, 2001, [올훼스의 창], 대원
호타 유미/오바타 다케시, 2000, [고스트 바둑왕], 서울문화사
도가시 요시히로, [헌터×헌터], 학산문화사
도죠 가즈미, 1998, [검은 튤립 시리즈], 대원

해적판
나츠카와 윤, 1995, [지구인], 제삼아트
다케미야 게이코, 2002, [바람과 나무의 시], 제삼아트
미즈시로 세토나, 2000, [同棲愛], 현대지능개발사
미즈키 요코/이가라시 유미코, 2003, [캔디캔디], 하이북스

동인지
아키즈키 고, 1998, [후지미 교향악단], [[노말]]
300원, 2002, [에어조단은 300원] 2,
이정애, 2002, [색슨식 거짓말],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 세븐

국내 미발표작
하기오 모토, 1975, [토마의 심장 ト?マの心臟], 소학관
: http://dugoboza.net/tt/rserver.php?mode=tb&sl=11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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