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만화 : 김지윤의 [내 그리운 동화] 외
눈은 창 밖 뿐 아니라 내 무릎 위에 펼쳐진 만화 속에도 쌓이고 있다. 출판만화의 경우 눈 풍경 만큼 손쉽게 그려낼 수 있는 배경이 드문데다 그 효과는 강렬한 편인 만큼 독자는 만화를 읽으며 유독 잦은 눈보라와 숱한 겨울을 만나게 된다. 대개 공간을 비워 효과를 내는 눈은, 스토리의 맥락에 따라 신비롭거나 혹독한 시련의, 혹은 공포의 세계로 완성되어진다.
눈 오는 겨울이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김지윤의 ‘내 그리운 동화童話’를 이야기할 수 있다. 김지윤은 마치 눈 내린 벌판과 같은 미완성의 인상을 닮은, 치밀하지 않은 밀도의 만화를 발표해온 작가이다. 애매하게 상업적인 작가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내 그리운 동화童話’에서와 같은 세련된 감성의 로맨스는 여간한 솜씨가 아니다.
‘희수’는 홀어머니 아래 어렵게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후 잡지사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면서 허술하지만 인간적 매력의 기자 ‘시문’을 만난다. 재생불량성 빈혈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희수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시문이었지만 희수는 그의 고향으로 내려가 사랑을 고백하고 남은 시간을 함께 하기로 한다. 진부할 수 있는 인물과 사건을 단순하게 조직한 줄거리이건만 작가는 가을에서 겨울로 무르익는 계절 감각을 절묘하게 살리며 작품을 빛냈다.
희수에게 첫사랑의 설레임이나 그리움은 눈과 함께 찾아온다. 시문과 함께 걸어가며 희수가 머리 위에 쏟아지는 눈을 하얀 축복으로 기원하는 마지막 장면은 퍽 현실적이면서도 대단히 낭만적이다. 순정만화가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지점은 현란한 환타지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눈 쌓인 시골의 소박한 서정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겨울과 같은 불황을 견디어 내고 있는 우리 만화계에서 김지윤 역시 활동이 부쩍 뜸해지며 근황과 최근작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되었다. 독자들의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만화가 호출될 기회가 자주 생긴다면 현재와 같은 시린 냉기는 봄을 기약하는 축복이 될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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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외 추천하는 다른 눈내리는 만화
[스완] (아리요시 교우코)(좌)
‘마스미’가 역경을 딛고 발레리나로 성장하는 이야기의 ‘스완’은 가장 고전적인 순정만화 코드로 읽혀지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성격이나 인물 관계도 익숙한 것이지만 인물의 심리적 상황에 따라 눈 오는 풍경이 유독 자주 등장하면서 순백의 튀튀와 유사한 이미지로 만화를 섬세하게 장식해 나간다. 눈부시게 순결한 소녀의 로망을 실현시키면서 전설의 반열에 오른 만화.
[올훼스의 창] (이케다 리요코)(우)
격동하는 20세기 초 서유럽의 정치적 환경이 사랑하는 연인들의 가혹한 운명이 되었던 ‘올훼스의 창’. ‘크라우스’를 쫓아 러시아로 향한 ‘유리우스’에게 눈의 이미지는 이국의 낭만적인 첫인상이면서 시베리아의 북풍한설로 휘몰아치는 혁명의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케다 리요코의 다른 작품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함께 가장 탁월한 대하서사 순정만화로 대표되는 작품.
[Snowman] (레이몬드 브릭스)(좌)
주제곡 ‘Walking In The Air’의 몽환적인 멜로디와 함께 눈 내리는 겨울밤이면 최면처럼 떠올리는 애니메이션. 눈과 눈사람의 이미지가 신세계의 신비로운 마술처럼 그려지고 있다. 아침이 되어 목도리와 모자만 남긴 채 녹아버린 눈사람의 최후는 원작이었던 동화가 어린이에게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 아닐까. 눈사람, 북극, 산타클로스로서 겨울의 가장 전형적인 환상을 부르는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고백] (후쿠모토 노부유키/글, 카와구치 카이지/그림)(우)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산에서 조난당하여 죽음을 예감한 인물이 과거의 살인을 동료에게 고백하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어 이를 은폐하려 한다면? 진정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 ‘고백’에서의 눈은 시간과 공간을 단절하는 강렬한 폐쇄성을 발휘한다. ‘침묵의 함대’로 유명한 카와구치 카이지의 힘있는 작화와 긴장감 있는 연출이 돋보이는 심리 스릴러.
(스크린 1월호 게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