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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요시나가 후미 - 식탐 전문 만화
이 만화 봤어? 05/12/22 08:15 capcold
속칭 요리만화라는 장르가 있다. 보통 요리에 대한 대단한 전문가가 나오고, 신기에 가까운 대단한 요리들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요리는 단순히 그냥 먹을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신’의 표현이다. 궁극의 꽁치초밥이 사실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장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든지, 소고기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자세의 형상화라든지, 라면의 따듯함이 사실은 두 연인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이어주는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든지 하는 식 말이다. 보통 요리는 요리로 끝나지 않고, 인간사를 매개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가 그 요리를 둘러싸고 결국 모두의 감동으로 해결되는 패턴이다. 일본의 <맛의 달인> 류든, 한국의 <식객>류든 공유하는 지점, 즉 요리 자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주제의 구현화라는 점 말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결국 화해를 하고 하나가 된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재미도 상당하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 요리가 맛있다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고, 요리가 모든 인간사의 상징이라니. 요리라는 소재의 특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너무 과도하게 끼워 맞추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해본다. 요리에 우리네 생활이 어떻게 맞춰지는가가 아니라, 과연 우리들이 요리를 맛있게 먹고 다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고 느낌이었는지 말이다. 인생사에 대한 훌륭한 상징체로서의 요리라는 개념따위는 그냥 낭비해버리고, 그냥 맛있게 요리를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시원스러운 작품을 보고 싶을 때가 오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요시나가 후미, 서울문화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속칭 ‘야오이’ 계열 남성 동성애물에서 지명도를 키우던 이 작가가 메이저에서 큰 주목을 받도록 한 작품 <서양골동양과자점>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뚜렷하게 보였지만, 소품인 <사랑이 없어도...>에서 드디어 아주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낸다. 요리가 인생사의 상징이고 장인정신이고 그런 가치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완전히 ‘먹는 자’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접근한다. 인생이고 상징이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과중한 의미 부여 그런 것 필요 없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무척 맛있는 것을 따지기 때문에 그냥 맛있다는 표현으로는 안되고 “척 보면 시고 짤 것 같은데 은근히 달콤하다구! 그리고 거기에 해산물의 감칠맛까지 더해지면! 맛있지? 맛있지?” 정도는 기본이다. 하지만 요리인의 장인정신이니 사연이니 그런 것은 솔직히 관심 없다. 이 식당이 이 요리는 기차게 맛있다, 정도면 충분하다. 식도락, 혹은 좀 더 친근하게 말해서 식탐이야 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끼고 사는 진짜 즐거운 요리의 모습이다.

자, 그렇다면 식탐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맛있는 가게를 많이 찾을 수 있어?” 라고 물어본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작가는 극구 ‘픽션’이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봐도 작가 자신을 자서전적으로 형상화한 주인공 “Y나가 F미”가 설명해준다. “이 보셔, 나는 일할 때랑 잘 때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리고 종류에 따라선 일할 때조차 먹는 걸 생각하고 있다고. 그만큼 먹는 데 일생을 바쳐왔으면 먹을 것도 나에게 얼마쯤은 보상을 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만”. 도대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인생의 의미부여도, 장인정신도 아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순수한 욕심이다.

<사랑이 없어도...>는 식탐으로 가득한 만화다. 인생사를 말하기 위해서 요리를 동원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요리 소개가 주가 되는 여타 요리만화와는 다르다. 인생사는 인생사고, 그 인생사를 사는 사람들이 식탐을 부리면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가 부실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Y나가를 비롯, 주변의 어딘가 모자라면서도 서로 아귀가 잘 맞는 인물들이 펼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요리 자체보다는 요리를 맛있게 즐길 줄 안다는 식탐의 존재 또는 취향이 바로 이들 인간들의 사연들을 묶어주는 진짜 고리다. 요리를 먹으며 엉뚱한 사랑을 꿈꾸고, 게이로 커밍아웃한 옛 친구와 감정을 나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는 이미 이 작가의 전매특허인 직접적이면서도 함축적인 대사와 섬세한 표정 연출로 만만치 않은 깊이를 자랑한다.

만화의 형식은, 8페이지짜리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되어있다. 8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중심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상호 관계가 살짝 드러나고 진전된다. 식당은 실제로 일본 도쿄에 있는 식당이라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가게 소개가 한 페이지 붙는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식당은 실재한다는 권두 안내문이 한층 재밌는 울림을 준다. 이외에도 그림체는 평소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설렁설렁 가벼운 선으로 그렸으나, 요리를 묘사할 때만큼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정말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능란함을 보인다.

물론, <사랑이 없어도...>는 워낙 소품이다 보니 농밀한 기승전결 또는 확고한 엔딩 등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극적 요소를 살짝 첨가한 생활일기에 가까운 셈이라서 다른 요리만화들에서 익숙해진 화려한 대결구도와 뜨거운 감동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독자, 또는 하다못해 단지 한밤 중 출출할 때 자신의 빈 속을 한번 학대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


(출판저널 <기획회의>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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