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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와의 짧은 동거' / 장경섭 - 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이 만화 봤어? 06/01/14 11:01 capcold

바퀴벌레라는 존재는, 인간들의 사회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룰에 의해서 자연계를 멋대로 바꾸어버렸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내쫒기거나 또는 인간에게 식료품이나 노예로 이용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생태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한다. 물론 인간들로서는 그런 낯선 존재들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바퀴벌레가 병균을 옮긴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간들이 옮기고 다니는 병균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소탕’하려고 하지만, 지금껏 빈번히 실패해왔다. 굳이 말하자면 바퀴벌레라는 종은 인간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지 오래인 셈이다. 인간세상의 일부지만 조금은 다른 존재.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은 내면에 귀중함을 감추고 있는,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벌레는 다르면서도 그냥 범속한 존재다.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적인 무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벌레는 심지어 어떻게 되든 동정조차 가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문학에서는 바퀴벌레, 또는 실제로 바퀴벌레를 지칭하지만 그냥 ‘벌레’라고 표현되는 존재들은 아주 흥미로운 비유로 활용되고는 한다. 벌레로서의 인간은 범속하면서도 범속 이하인 처지, 또는 세상 속에서 가치가 없음에 대한 자기 환멸의 표현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이다. 세상 속의 부조화, 부조화의 결과인 외로움에 대한 자학적인 변명의 수단으로서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를 찾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주의 체코 사회 속에서 카프카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커다란 벌레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최근 출간된 <그와의 짧은 동거>(장경섭 / 길찾기)는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작가의 페르소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아의 충돌, 일상화된 소외에 대한 성찰 등을 핵심주제로 삼으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다. 단칸방에서 자취하는 젊은 남자의 집에 바퀴벌레가 공존하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어느 날 진짜로 본격적인 룸메이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먹으러 가고, 청소도 분담하는 사이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짧은 동거생활을 따라가며, 사람이 만나고 우정을 발휘하다가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소원해지기도 하며 결국 갈라서고는 여운이 남게 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마법의 계기가 있거나 갑작스러운 놀라움이 있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인간 사이즈의 바퀴벌레와 함께 해도, 주인공은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아니 사실 특별히 놀라는 것은 전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의 여자친구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녀마저 사람 사이즈의 바퀴벌레라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모 씨가 진짜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따름이다. 다르고 비속해도, 어차피 이 세상의 일부다.

바퀴벌레는 이 사회에서 비루한 처지에 있는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 자다. 실제로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인권만화 모둠 <십시일반>에 실린, 동남아 노동자와 동성애 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작품에서 보여준 작가의 세계관을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섬세한 비유력과 묘사는 경탄할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바퀴벌레는 일상화된 외로움을 살아 나가고 있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이미 무덤덤해진 자기 자신의 좀 더 비속하지만 나름의 생활 패턴이 있는 또 다른 파트너, 가상의 생활 상대 말이다. 뜨거운 우정이나 불타는 애정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룸메이트. 적당히 배려해주고, 적당히 무관심해지는 그런 사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해서 내 생활을 바꾸어 놓지도 않지만,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어떤 일면을 대할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을 ‘일상’이라고 불러 왔다. 기묘하게 현실적인 판타지이자, 단절된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매력 말이다. 스스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화된 외로움이 있는 어떤 자아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일상화된 비속함과 소외를 지니는 어떤 자아와 만나서 서로를 보충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좀 더 부드럽게 터득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생활은 무언가 버디무비와도 같은 티격태격거림과 달리 은근슬쩍 시작하고 은근슬쩍 끝난다. 그 이별은 슬프기 보다,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상징의 무게에 짓눌린 무겁고 우울한 작품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부드럽고 열린 선의 흑백 그림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 작품의 균형감각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필체 속에서 공간의 묘사는 현실의 남루함이 과장되지도 은폐되지도 않는 정도의 수위로 조절된다. 장모씨와 바퀴벌레가 동거하는 자취방 공간에 베어 있는 생활의 냄새는 어떤 자세한 사진으로도 따라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연출 역시 적당한 반전과 효과적인 시간 이동이 돋보이는 극적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특유의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구상해낸 작품이라는 흔적이 역력하다. 책에 같이 실려 있는 다른 짤막한 단편들과 비교할 때 이러한 요소들은 더욱 돋보인다.

만약 <그와의 짧은 동거>가,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히트를 기록하던 수년 전에 나왔더라면 아마 대형 히트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연재지면이 없어지는 바람에 거의 5년여를 너무 늦게 출간, 한 템포 늦게 출간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상적 비유를 생활의 남루함 속에서 활용하여 일상 속의 성찰을 이야기했던 감수성이 지니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외로움에 대해서 청승을 떨기에는 너무 그 상태에 오랫동안 처해있던 이야기.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았다느니 하는 과장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어딘가가 비어있는 것 말이다. 바퀴벌레와의 동거 속에서, 약간은 그 생활에 더 능숙해진다. ***

(출판저널 <기획회의>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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