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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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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만화와 평론 - 해석공동체에 관하여 : 범주와 양상 그리고 자리매김의 문제
만화는 흐른다 02/01/15 23:09 halim
우선, 이전에 해석공동체[주1]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없다고? 당연하다. 필자가 임의로 쓰고 있는 말이니까. “네가 뭔데 함부로 말을 만드느냐?“ 당장 뭔가 한 소리 날아오는 군. 미안한 일이다. 필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어떤 영역 혹은 집단에 관하여 적절한 기존의 용어가 떠오르지 않는 관계로 개인적 편의를 위해 붙여본 표현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전후 설명도 없이 턱 내놓고 난 이것에 관해 이야기 하겠으니 들어라! 고 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 우선 필자가 이 용어를 무슨 의미로 쓰고 있는지, 비평과 문화장르의 지형도 상에서 어떤 식으로 이런 개념이 자리매김 할 수 있는지에 관해 간단히 언급할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는 - 아마도 본론에 해당할 - 해석공동체의 역할과 이들이 작용하는 장르로서 만화의 특성, 한국에서 해석공동체의 생성과 변화양상, 성격과 성과물, 현재의 상황 등에 대해서도 다뤄볼 생각이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앞글과 달리) 그다지 뻑뻑한 글은 아니니까 별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고 ... 그럼 시작해보자.

[주1] 노수인님의 지적에 따르면 해석공동체를 영어로 옮긴 'interpretative community'는 실제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비평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일단 interpretative보다는 community에 방점이 찍히는 개념으로 여겨지는데, 이에 관해 다른 의견이 있다면 기탄없는 문제제기를 바란다.


0. 해석공동체라는 말 ...

해석공동체는 그 이름이 말하듯 해석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모임을 의미한다. 집단이라든가 좀 더 명료한 용어를 선택할 수 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해석공동체들은 집단이나 동호회와 같은 명칭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그 무엇에 비해 구성원들의 결합력이 낮고 목적의식이 희박하다. 해석공동체는 ‘무엇을 하기 위해 (모이고자 해서) 모인’ 이라기보다는 ‘비슷한 것을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여 있게 된’에 가까우며 그런 의미에서 좀 더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화해석공동체 라고 하면 만화를 읽고, 읽은 만화에 대한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발전하여 보다 적극적인 비평적 활동을 수행하는 단계로 발전하기도 하는 만화독자들의 모임을 지칭한다고 보면 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단지 만화를 읽고 있을 뿐인 독자들인데 서로 좀 아는 정도인 수준에서, 학교나 회사에서 결성되는 - 쉽게 구하기 힘든 - 애니메이션 감상모임이나 수만의 회원을 보유한 전국적인 통신망의 대형 동호회, 특정 장르나 작가의 작품에 집중하는 다양한 취향의 소모임, 혹은 그 중에서도 좀 더 진지하게 비평의 영역을 넘보고자 하는 전문 비평집단에 이르기까지, 해석공동체의 범위나 성격은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의 자생적인 모임들은 80년대 초,중반 형성되기 시작하여 90년대에 들어오면 - 본연의 임무(?)라 할 수 있는 소비 뿐 아니라 - 비평과 창작의 영역 양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면, 한국에서 만화관련 해석공동체들이 보여준 여러 가지 활동과 성과에 대한 각론적인 기술에 들어가기 이전에 우선 이들이 한국의 만화판에서 혹은 만화라는 장르 내에서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1. 범주와 양상에 관하여

보통 어떤 문화/예술장르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된다. 창작(생산), 감상(소비), 비평(해석 혹은 가치부여). 장르가 발전하고 사회적 기반을 획득하고 산업적 구조를 갖추게 되면 출판사, 유통망, 정부와 공공기관, 사회적 감시 등 더 많은 요인들이 개입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 상기의 세 가지 영역에서 분화해 나오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세 가지 영역 중 창작은 다른 두 영역이 성립하기 위한 기본전제가 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창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소비도 비평도 존재할 수 없다. 사실 창작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하는’것인가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종의 예술론 내지 미학기본이론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고, 창작의 속성에 관하여 길에 늘어놓는 것 자체가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 인만큼(능력부족인 필자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와 여러분이 이전에 그렇게 알고 있는 창작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가급적 그냥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한 가지 ... 창작은 생산과 구별되며 작품은 상품과 구별된다는 점 정도는 지적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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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영역인 소비는 창작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창작은 그 자체로 존재 가능하지만, 창작만 되고 소비되지 않는다면 그 존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비자가 창작자 1인 이라면 창작자 1인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다. 일기가 창작물이긴 하지만 공개되지 않은 일기는 일기를 쓴 사람 자신에게만 존재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소비는 계를 성립시키는 두 번째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당수 대중문화 장르는 단지 창작과 소비 두 축만으로 성립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소비는 단지 돈을 지불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당 문화상품을 소비한 소비자들의 반응은 피드백 되어 창작의 성격을 재구성하며, 소비자들의 사회적 위치나 소비수준이 역으로 해당 장르의 수준과 위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세 번째 비평영역은 그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우 보통 ‘상품’에 ‘예술’의 레이블을 붙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필자가 생각하는 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가치부여’이며 이를 통해서 제대로 된 창작, 의미 있는 소비를 가이드 하게 된다. 앞에서 창작과 소비 두 가지만으로도 계는 성립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것 만으로는 창작을 생산과 구분하기 힘들다(질 낮은 대중문화상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 혹은 창작물의 최소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비와 소비자들의 피드백이 있으니 자동차의 생산은 창작인가? 소비자의 반응을 보아가며 품질을 개선하고 마케팅을 전개하는 각종 공산품들이 모두 창작물일까? 비평은 이 지점에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비평적 가치 부여(이후로 거듭 언급하겠지만 비평가만이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가 된 이후에 생산품은 창작물로 거듭나며, 소비자들은 좋은 창작물과 좋지 않은 창작물을 상품이 아닌 작품의 관점에서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경계는 모호하다. 앞에서 자동차의 예를 들었다. 자동차를 만드는 행위는 무조건 생산인가? 그것은 생산자의 입장과 생산된 자동차를 소비하는 사람의 반응, 그리고 해당 자동차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열성적인 비평가는 수작업으로 소량 제작된 고급 승용차에 대해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 설계자의 네임밸류가 자동차의 가치를 좌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호작용과 의미부여의 과정을 거치고 난 후의 ‘어떤 자동차’는 창작물 혹은 예술작품의 단계로 격상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차 산업을 문화산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도 이상으로 일반인식을 배반하는 것이고 논의의 진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적당히 하고 넘어가자. SF와 환타지의 경계를 긋기 힘들다고 하지만, ‘반지의 군주’가 환타지이고, ‘유년기의 종말’이 SF라는 것은 명백하니까.

음 ... 말이 길어지고 있다. 미안. 비평의 정의 혹은 만화비평의 정체성에 관해서 여러분은 이미 두 개 혹은 세 개의 장문의 글을 읽고 온 상태일 것이다. 앞선 두 사람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대부분은 동의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렵게(!?) 여기까지 온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니. 일단 비평의 기본적인 역할은 ‘상품을 작품으로 만드는 의미부여’에 있다는 정도로 만족하고, 상세한 논의는 ‘앞글을 참고하시라’는 정도로 넘어가자.

여기서 잠깐! 앞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라는 전제를 달은 것을 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있기를 바란다. 없다면 재미없으니. 맞는 말이다. 비평이 꼭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평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대중문화장르 전반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비평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창작과 소비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 이 두 가지의 차이 그리고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이하에 좀 더 부연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우선 세 가지 범주가 어떻게 상호관계를 가지면서 장르의 존재방식을 규정하게 되는지에 관해 생각해볼 것이다. 일단 세 가지 범주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현존하는 다양한 문화장르들을 일별해보면 몇 가지 양상들이 도출된다. 필자에겐 멋진 작명센스 같은 것이 없으므로 일단 양상1, 2, 3이라고 하자.

양상1 - 예술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양상1이다. 예술행위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창작과 예술에 대한 엄숙주의를 견지하는 전문비평이 공존하는 경우이다. 진지한 소비자 층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긴 하지만 양적으로 소수이고, 파편화 되어 있다. 좀 더 전문적인 것을 원하는 독자들은 ‘개인차원’에서 전문창작자 혹은 전문비평가의 영역에 투신하게 된다. 장르의 위상은 오랜 기간 축적된 사회적 평가와 아카데미즘에 의해 뒷받침 된다. 순수문학, 연극, 클래식(음악), 현대미술을 비롯해서 우리가 ‘고급문화’라 부르는 것들이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며, 이것이 심화되면 창작과 소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창작물에 대한 비평이 가해짐’으로서 비로소 그 가치가 확정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예컨대 현대미술은 이러한 양상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인데 “미술작품의 교환가치를 창출하는 담론만을 재생산(하는 비평)”이라는 평론가 강성원의 표현(대학신문 1999년 11월 15일자)은 현대 미술비평이 기능적(실용적?) 측면에서 어떤 단계에 와 있는 지를 보여준다. 판화 같은 예외나, 화집 같은 보완적인 방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술은 하나의 원본을 만들어내고 구입자 한 명이 그것을 향유하는 형태의 예술이다. 이는 복제예술 예컨대 문학의 경우 노벨상수상작가의 책과 곧 잊혀질 삼류작가의 책이 기본적으로 같은 가격대에서 유통되는 반면, 미술에서는 좋고 나쁨에 대한 비평행위가 직접적으로 작품의 가치를 좌우하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하여 비평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일수록 대중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 있는 복제예술과 달리 미술에서는 비평적으로 높은 평을 받는 작가의 작품에 그에 비례하여 높은 가격이 매겨지곤 하는 것이다. 특별한 감식안을 갖고 있지 않는 일반소비자(‘일반’이라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다. 자신의 교양수준이 어떠하든 간에 ‘미술품을 구입’하는 정도의 소비자들은 경제적으로 최상류층일 것이므로) 들은 미술평론가의 해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에 따라 작품을 향유하게 된다. 현대미술은 창작에 비평이 덧붙여짐으로서 ‘비로소 완성’되는 단계에 와 있으며, “현대미술은 이름 붙이기의 예술이다”라는 원종우(2001년 11월 두고보자 편집회의에서)의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양상2 - 우리가 대중예술(Popular Art) 혹은 대중문화(Mass Culture)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여기에 속하게 된다. 양상2에서 창작영역(혹은 창작자를 대변하는 출판사 및 생산자)의 비중은 매우 크다. 소비자 층은 양상1에 비해 광범위하지만 역시 파편화되어 있고, 그들의 의견은 판매부수, 흥행기록 혹은 독자엽서에 의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장르의 위상은 대중적 인기와 보편성에 의해 좌우된다. 대중문학, 대중영화, 만화, 게임 ... 그리고 80년대 이전의 대부분의 대중문화 장르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 양상에서 전문비평의 영역은 사실상 전무하거나 거의 존재감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 전문비평이 전무하다고? 확실히 많은 대중 장르들은 생산과 소비 두 가지 측면으로만 구성된 듯 보인다. 필자는 최근 2001년 만화분야 최대의 히트작이라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홍은영)를 보면서 조폭 소재 영화들의 잇따른 흥행이 진지한 영화평론가들에게 가했던 정신공격(?)과 비슷한 뭔가를 느꼈다. 물론 ‘만화로~’는 일련의 조폭 영화보다는 윗길에 있는 작품이고, 학습만화에 그런 식의 불만을 표출한 다는 것 자체가 좀 핀트가 어긋난 투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대중장르의 히트작들은 비평의 도움 없이도 잘 만 향유되는 듯 하다. 아니 도움 운운을 넘어서 비평과 흥행은 반비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창작-소비’의 성공적인 주고받음 사이에 어떤 비평(작용)도 개입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다. 앞에서 비평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라. 그럼 어떻게 존재한다는 것인가? 작가A가 신작을 출간했다. 책은 서점에 깔리고 그 피드백은 판매부수, 일선유통업자의 증언, 독자엽서 등의 형태로 - 냉혹한 경제적 함의와 함께 - 돌아온다. 출판사 편집자는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 후 작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거나 다음의 출판기획에 참고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단순한 그렇지만 매우 믿을 만한 비평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피드백’으로서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런 이유로 판매추이를 해석하는 노련한 출판기획자를 비평가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글에서 이에 관한 충분한 논의가 주어졌으리라 생각하지만 비평작용(혹은 행위)과 비평문 그리고 비평가는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비평가가 아니지만 비평문을 쓸 수 있고, 비평문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가치 있는 비평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컨대 이제 상업지 연재에 뛰어들려는 신인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팔릴 것인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관한 비평적 코멘트를 얻고 싶다면 비평가보다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찾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소년만화잡지라고 하지만 최근엔 여성독자들이 증가하고 있지요. 잡지는 몰라도 단행본 판매에는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그걸 감안해서 아방한 미소년 캐릭터 하나 정도 추가해 보는 게 어떨까요.” 비평가들의 골치 아픈 뻘소리 보다는 이쪽이 훨씬 유익한 비평이다. 적어도 양상2에서는 ...

양상3 - 비평의 역할은 여전히 미약하고, 창작 또한 양상2와 별로 다를 바 없지만, 양상3의 소비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화하여 창작과 비평의 영역까지 일부 감당하고자 한다. 세 번째 양상의 역사는 앞의 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짧다. 거슬러 올라가면 2차 대전 후 시기 까지를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은 7~80년대를 거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부정적인 이분법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좋아하는 대중문화장르를 위한 방어논리를 생산하려는 적극성까지 겸비한 새로운 세대가 문화산업의 주요소비자로 등장하고, 80년대 후반 온라인공간을 통해 ‘소비자들 간의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가능해 진 후 본격화 된다. 해석공동체가 활발하게 구성되고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계가 양상 3이며, 장르의 사회적 위상이 높거나 혹은 대중적 기반이 넓지 않음에도 작품이나 작가에 따라 고급문화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얻거나, 대중문화 작품 이상의 상업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양상 3이다. 그 과정에서 해석공동체들은 영향력 있는 - 기본부수를 보장하는 - 소비자 집단으로서, 미약한 전문비평 영역을 대체하는 비평집단으로서, 어떤 경우에는 예비창작자 군으로 기능하게 된다. 즉 소비가 적극적인 해석과 이의 공유로 이어지고 적극적인 해석이 전문비평이나 실제 창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 Worldcon - World Science Fiction Convention


[] Hugo Awards - 1953년 이래 worldcon에서 수여되어온 휴고상은 전세계 SF팬들의 투표에 의해 선정된다. 2001년 휴고상 장편부문 수상작은 '해리포터와 불의 잔'이었다. SF영화 부문 수상작이 '와호장룡'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랍지도 않은데, 독자집단의 영향력이 임의로 장르의 영역을 재구성하는 정도에 이른 듯한 인상을 준다.


[] Korea SF convention






양상3에서 해석공동체의 영향력이나 역할이 어느 정도로 자리매김을 하는가에 관하여는 정도의 문제 혹은 상대성의 문제가 작용한다. 순수문학이나 현대미술처럼 전문비평의 영역이 고도화 되어 있는 경우 ‘개별 구성원의 역량부족’ 혹은 소비자집단 자체의 협소함 등에 의해 해석공동체의 형성이 제한되며(예컨대 '바그네리안'들은 비평이나 창작과 무관하게 순수소비자집단으로만 기능한다), 영화나 TV, 게임, 대중문학 - 부연하자면 길어지지만 필자는 대중문학과 장르문학을 구별하고 있다. 물론 만화도 마찬가지 - 처럼 대중적 기반이 ‘매우’ 넓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해석공동체의 위상이 낮아지게 된다.

그런 이유로 양상3에서 장르 자체는 사회적으로 마이너 한 경우가 많다. 혹은 과거에 비해 마이너하기 때문에 해석공동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60년대 이후의 서구 과학소설은 이에 관한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으로 대표되는 40-50년대의 황금기를 지나보낸 과학소설은 지속적으로 대중적 기반을 잃어갔고, 충성스런 독자집단의 발언권은 그에 반비례하여 확대되었다. 여기에 대중적 흥행 대신 (까다로운) 소수독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하게 된 작가들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 현재에 와서는 장르문학이면서도 순수문학이상으로 ‘고급스럽게’ 소비되는 상황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권과 달리 과거의 영화(?) 조차 없는 한국의 과학소설계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애먼 독자들이 느끼는 진입장벽으로 말하자면 순수문학보다 더 높은 게 한국의 과학소설 아닌가.

양상1,2,3에 속하는 각 장르는 시기 혹은 사회적 여건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진화하게 된다. 40년대까지 양상2의 대중문화였던 ‘재즈’는 50년대를 거치면서 고급문화로 발전하고, 70년대에는 ‘탱고’가 재즈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앞서 설명한 SF가 그러하듯 사회적 저변을 잃은 대중문화는 소수 열성독자집단의 활동에 많은 부분을 의탁하는 양상3의 단계로 변화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고급문화로 머물러 있던 장르가 미디어의 발전이나 유행에 따라 단시간에 대중문화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 기간은 짧았지만 80년대 후반의 한국시는 이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또 기술적인 요소가 강조된 채 오락거리로 치부되던 장르가 비평가들의 조직적인 지위상승전략에 따라 예술로 격상되기도 하는데, 까이에 뒤 시네마가 했던 작업이 바로 그러했다.


필자는 여기서 예술의 존재방식에 관해 구성범주들의 상호작용을 토대로 -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 세 가지 양상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삼분법인데 이에 관해서는 음악학자 필립 탁(Philip Tagg)을 비롯하여 많은 미학 이론가들이 제안한 모델들이 있으며, 예술의 범주구분에 관해서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물론 좀 더 완고한 이론가들의 이분법 - 예컨대 고급예술(예술)과 대중예술(앙드레 말로[A. Malraux]에 의하면 반예술!) - 이나 정교한 체계를 원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4분법등도 있지만. 기존의 삼분법 모델들은 일반적으로 예술을 고급예술-대중예술-민속(민중)예술로 나누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고급예술은 양상1에 해당하며 대중예술은 양상 2에 해당한다. 그럼 민속(민중)예술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고급예술의 고급스러움이나 예술성이 없고, 대중예술의 상업성이나 대중성(mass함)이 없는 상태의 예술이 민속(민중)예술이다. 오지에서 볼 수 있는 전통춤, 시골의 수공예품, 노동자나 선원 주점의 특유한 노랫가락과 스탭들은 민속예술의 다양한 예들 중 한가지 이며, 보통 관람료나 작품판매를 전제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창작되고 조직적인 마케팅 없이 향유된다. 필자가 여기에서 제시한 세 가지 양상은 기존의 삼분법을 배척하고자 하는 것 이라기보다는(감히 ... !?), 그것과 조금 다른 층위에서 점점 다원화하고 파편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상1과 2의 장르가 변화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또 다른 양상에 관한 사적인 견해 정도로 이해해 주기를.

서두가 약간 길어졌는데, 이제 좀 긴장을 풀고 ...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해석공동체가 어떻게 생겨나고 흘러왔는지, '만화장르에서' 그것이 어떤 양상을 띄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 http://dugoboza.net/tt/rserver.php?mode=tb&sl=51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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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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