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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만화와 평론 - 만화를 평가한다는 것 (1): 잡담에서 평론까지
만화는 흐른다 02/01/15 23:18 capcold
**주의 - 글 읽기는 싫지만, 불만은 많으신 분들을 위한 가이드: 1. 지금 바로 게시판을 클릭하십시오. 2. '쓰기'를 누르십시오. 3. 제목: "그래 너 잘났다", 내용: "...잔뜩 현학적 용어를 동원해서 갈기느라 고생했는데, 난 무식해서 니 글 읽을 생각도 없고,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테니, 그냥 내버려둬라, 임마!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OO을 욕하지 말란 말이야! 덤으로, 너는 구데기야!" (참고: 욕설이 많이 들어갈수록 효과적입니다) 4. '저장'을 누르십시오. 5. 혼자 방구석에 앉아 내심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순수한 만화사랑이 현학적인 구데기들을 이겨낸 것입니다!


<<1부: 평론의 기본조건 >>


다른 프로 및 아마투어 글쟁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만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항상 정체성의 고민을 해야 했다. 뭐 정체성 고민이라고 하니까 엄청난 것 같지만, 실상은 '지금 이런 글들을 쓰고 있는 나는, 도대체 뭐길래 이런 글들을 쓰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어디서는 누군가에 의해서 평론가라는 '편리한' 호칭이 붙어버렸고 다른 곳에서는 자칭 평론가라고 조롱받는 이상한 2중성은 기본이거니와, 사실은 그냥 독자이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3중고를 이룬다. 물론, 좀처럼 '돈 되는' 글은 쓰지 못하고 있다는 푸념을 여기서 해봤자, 쓸데없는 짓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민도 같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평론인가, 잡담인가, 비평인가, 자위행위인가(뭐 이 4가지가 서로 배타적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한번 필자 자신의 고민을 정리해보는 의미에서, 그리고 덤으로 이번 호 특집 기사도 쓰는 겸 해서 '만화에 관한 평가를 내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잡문을 하나 쓰기로 마음먹었다. 언제나처럼 - 아니, 여느 때보다도 더욱 - 길고 딱딱하고 어려운 개념들이 난무하는 글이 될 가능성이 134.3%. 기본적으로는 만화에 대한 글이지만, 읽는 바에 따르면 다른 영역에 적용시킬만한 내용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뭐 쓰다보면서 생각하기로 합시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개념정리와 개념 정의부터 시작하고, 이후 좀 더 주장 - 즉, 민화평론, 특히 한국의 만화평론이 현재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가 - 위주로 나가도록 하겠다.


1. '평가'의 두 축

특정한 작품에 관하여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그 작품을 '감상했다'라는 말과도 같다. 우리가 어떤 작품을 접할 때는,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평가를 내리게 된다. 우선 맨 처음에 다른 수많은 작품 가운데에서 그 작품을 선택하는 것 자체부터가 어떤 특정한 평가의 기준에 의한 것이며(그 기준이 평론글이든, 친구의 추천이든, 책의 두께이든, 아니면 단지 '우연'이든 말이다), 작품을 읽어 나아가는 과정의 매 순간마다 우리는 다음 페이지를 읽을 것인지, 아니면 책을 집어 던져버릴 것인지 평가를 내린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역시 이 작품을 기억해둘 것인지, 아니면 바로 3초만에 잊어버릴 것인지를 평가한다. 그리고 기억에 남겨두었을 경우, 이것을 좋게 기억할지, 나쁘게 기억할지 또다시 평가한다... 말 그대로, 작품과 우리가 접촉을 하는 모든 사전-본-사후과정 속에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 있어서 대부분의 작품은 단지 '내적인 평가'의 대상일 뿐이다. 즉, 해당 작품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굳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작품이 자신에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너무나 큰 감동이나 혐오를 느꼈지만 그것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여하튼 이 경우에 있어서 평가는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일 뿐이고(뭐, 시리즈의 다음 권을 사러 간다든가), 평가가 다른 구체적인 형태로 남아서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또한 평가의 방식 역시 굳이 타인과 공유 가능한 '프로토콜'(서로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된 글이라든지, 만평이라든지, 제스추어라든지...)을 도입할 필요 없이, 자신만의 모호한 '느낌'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어떤 작품을 읽은 후, 자신이 내린 '평가'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그 작품을 읽도록/던져버리도록 하든지, 자신의 독특한 감수성을 자랑하고 싶어하든지, 사업에 뛰어들려고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든지... 여하튼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이든 간에, 해당작품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타인에게 접하도록 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평가는 개인적, 내적 차원에서 내리는 평가보다 한층 구체화되어야 한다;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프로토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프로토콜로서 평가를 담고 있는 글, 대화, 만평, 제스추어... 등등의 구체적인 결과물이 만들어지게 되며, 이것을 타인들이 다시금 접하면서 평가는 공유된다(공유라는 것은, 결코 '동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프로토콜이라는 구체적인 형상화를 지니고 있는 평가에서도 앞서 구분에 사용한 범주가, 이번에는 경계선이 아닌 두 개의 '축'으로서 적용 가능하다. 즉 두 개의 축이란 '개인 감상 지향'의 축과 '교류성 지향'의 축을 말한다. 직접 글이나 기타 형태로 구체화를 시켰다 할지라도, 그것이 표방하는 바가 어느 쪽으로 무게중심이 향해있는가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말이 어려워지고 있어서 과감하게 창을 닫으시려는 여러분! 아직 만화평론이라는 이야기는 시작도 안하지 않았습니까!!! -_-;


1) 개인 감상 지향

개인 감상이라는 축에 가깝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글 등을 통해서 발표하고자 할 때, 그것의 1차적인 목적이 필자 개인이 느낀 감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특정 작품을 보고 느낀 바를 말 그대로 '쏟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으로 만들어지는 평가문(혹은 감상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사람들이 달라들어서 논리와 이치를 따지며 토의를 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그저 표현해 낼 뿐이다.

개인적 평가의 차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취향의 문제다.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함의 문제다. 변태성애물이든, 엽기 살인물이든, 싸구려 3류 개그물이든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좋아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타인이 평가하는 것은 월권이자, 침해행위에 가깝다.

우연히 그것과 같은 감수성을 공유한 사람이 있으면 좋아하면서 서로에게 이끌릴 것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의 평가는 개인의 내적 차원에서 이미 이루어 진 것의 결과물을 바깥으로 표출한 것일 뿐이다. 개인적인 감상으로서 '감동받았다', '혐오한다', '훌륭했다',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등의 주장은, 타인이 관여하면서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시쳇말로, '내가 재밌다는데 도대체 왜 남들이 난리인가'? 내적 감상의 차원에서 평가의 기준은 자기 개인의 주관적인 생활환경과 감수성, 주관적인 배경지식이다. 아무리 쓰레기같은 C급 어거지 표절작품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시대의 명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자신의 평가를 글 등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혹은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만족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위해서 작용할 때에는 분명히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 감상 지향의 평가의 한계점 역시 명확한데, 논의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취향을 공유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는 방법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취향들을 보다 큰 틀(예를 들어서, 만화 일반의 차원이라든지, 아니면 나아가서 사회 일반의 차원 등)에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자리매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나는 OOO물이 너무 좋아요!"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취향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OOO물이 장려되고 발전해야 한다고, 혹은 심지어 OOO물이 사회에서 진지하게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논리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은 '나는 OO이 좋다'는 자기 드러냄이고 일방적 선언이지, '그래서 XXX해야 한다'라고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 수 있는 방향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 교류성 지향

평가의 다른 하나의 축은 바로 교류성 지향이다. 이 축은 주관적 감상의 느낌보다는, 외부적인 조건과 맥락을 고려하는 방식이다. 즉, 여러 타인들과 논의와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과 논지를 들여와서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방식으로는 만화사적 의의를 따져본다든지, 미학 이론의 차원에서 가치를 따져본다든지, 산업 시스템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라든지, 작품과 당대 사회상의 관계를 짚어본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다; 혹은 좀 더 약한 수준에서는 작품과 자신의 생활경험의 관계를 설명해 나아갈 수도 있다(자신의 취향을 다른 사람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근거를 들어준다는 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개인감상차원과는 다른 접근방식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애초부터 타인들과의 교류를 전제하며,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OO이 좋다'는 개인 감사 지향의 말은 부정도 긍정도 어려운 논외의 평가방식이지만, 'OO은 90년대 초반 한국 만화사에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논쟁을 필요로 하는, 그리고 논쟁을 할 수 있는 평가방식인 것이다. 후자의 방식으로 주장해놓고 논쟁이나 재평가를 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평가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시금 (긍정이든, 부정이든) 재평가를 내려달라는 제시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교류성을 지향하는 것에 대한 책임 역시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것은 '좋아하고 싫어함'이 아닌, '좋고 나쁨'의 평가다. 어떠한 작품이 왜 싫어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필요 없을 수 있지만, 왜 나쁜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그 평가는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교류성 지향 평가가 평가의 방법론적으로 더 세련되어 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그러한 평가의 결과를 강요하는 것은 힘들뿐더러, 부질없는 짓이다. 예를 들어서, 90년대에 만화를 보기 시작한 철수라는 독자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A라는 70년대 만들어진 당대의 숨겨진 걸작을 90년대 중반에 어설프게 모방한 B라는 작품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철수의 입장에서는, A라는 작품은 알지도 못하고, B라는 작품을 보고 너무나도 감동 받았다. 즉, 이제 철수에게 B는 개인 감상 지향의 차원에서 감동의 명작이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보고 타인들이 교류성 지향의 시점에서 'B는 쓰레기야, 사실은 A가 더 잘난 작품이야'라고 깎아내려 봤자, 철수의 내적 평가에 있어서는 그것은 아무 소용 없다. 많은 경우 철수는 A라는 작품을 알지도, 구해볼 의향도 없거니와, 이후로 철수가 A 작품을 구해본다고 할 지라도 (A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 다른 종류의 감동을 새롭게 일으켜내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단지 '음, 이 작품도 B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군. 그런데 이게 더 먼저 나왔구나. 뭐 그런가 보지.'이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데에 그칠 뿐이다.

공유성 지향 평가방식은 결코 개인 감상 지향의 축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존재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독자 개인의 처지에서는 주관적 개인 감상의 축에서의 평가가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필자인 나에게 있어서도, 만화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고 미학적으로 높은 예술성을 평가받는다는 작품보다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좋다. 어쩌다 보면 두 평가의 축이 일치할 수도 있지만, 또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머리로는 희대의 걸작이라고 알고 있지만, 읽어보면서는 하나도 재미없는 작품들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교류성 지향 평가방식은 쓸모 없는 지적 유희에 불과한가? 물론 아니다. 이것은 바로 개인 감상 지향의 접근의 약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다.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론(이 '방법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논의하도록 하겠다)을 통한 평가는 충분히 강력한 논지를 가지고 있을 경우, 특정한 취향을 공유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 마저도 논리로서 포섭할 수 있다. 그 결과, 자신이 내린 평가를 만화 일반, 나아가서 사회 일반 등 보다 넓은 차원에서 같이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의도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방식인 셈이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논리적으로 완전하다'라는 말은, '설득해내다'라는 말에는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신 말은 옳은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정서적으로 공감이 안간다;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설득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자신이 공감하지 않는 듯한 주장이 나오는 듯 싶으면, 상대방의 의견을 신경 써서 정독해보는 최.소.한.의. 합.리.성.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즉, 사람들은 먼저 판단을 한 후, 그 다음에 하나의 옵.션.으로서 '논리적 생각'을 해보거나, 아니면 많은 경우 아예 안한다는 것이다. 뭐 거칠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보통 남의 말을 제대로 들어보기 보다는, 자기 맘대로 먼저 결론을 내리고 본다는 말이다. 실제로 많은 논쟁에서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외견상으로는 대단히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고 의견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경우(그나마 '훑어보기'라도 했으면 다행이다)가 꽤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논리라는 방법론은 하나의 '룰'과 같아서, 룰이 공유되지 않을 경우 이쪽에서 아무리 현란한 드리블로 축구공을 몰고 가더라도, 상대방은 그 공을 손으로 잡고 뛰어가서 두 번 땅바닥에 튕긴 후 농구골대에 집어넣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가면 갈수록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바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리 이성적이고 훌륭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서는 이성적 논리만큼이나 감정적인 포용도 중요하다. 결국 교류성 지향 평가를 한다고 해서, 그 기반이 되는 취향 - 즉 정서의 문제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는 말이다. (원리주의적 입장에 가까운 필자로서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자,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오는 부분이다...-_-;)


3) 두 개의 축위에 균형잡기

위의 두 가지 평가 축을 다시 한번 요약해보자. 개인 감상 지향이라는 축은, 자신의 주관적 좋아하고 싫어함을 평가하며, 교류성 지향 평가 축은 보편적 기준에서의 좋고 나쁨을 평가한다. 전자는 자신의 주관적 감성과 생활, 그리고 취향 커뮤니티에서 효력을 발휘하며, 후자는 보다 보편적으로 여러 취향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내적/외적 시스템을 의도적인 방향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것에 효력을 발휘한다.

알아차리실 분들은 알아차리셨겠지만, 계속해서 '차원'이나 '범주' 따위의 말을 쓰지 않고 '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한다. 즉, 실제로 우리가 내리는 평가들은 이 중 하나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실질적으로 거의 항상 두 가지를 같이 아우르고 있다. 다만 그 위에서 무게중심이 어느 쪽 축에 더 쏠려있는가, 라는 차이일 뿐이다.


사례 1: "우와!!! OOO 읽고 넘 감동받았어요! 이건 정말 희대의 걸작이에요!!!"

- 조금 까다롭게 가보자. '희대의 걸작'이라는 표현은 분명히 당대 여러 작품과의 비교가 필요하며, 보편타당한 평가기준을 제시해서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이것을 읽고 감동받았다"라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균형점이 개인 감상의 축으로 크게 쏠려있는 평가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경우, 비슷한 것을 느낀 다른 사람이 "나두요!"라는 식의 반응을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단지 이미 각각 개인적 차원에서 그 감수성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뭉치는 차원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사례 2: "내가 이것을 읽고 감동 받은 것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80년대 노동 문학에 대한 집요한 애착 때문이다."

- 문장 자체만 놓고 보자면,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가 된다. 하지만 이 평가를 위해서 구체적이고 보편적으로 논의가 가능한 논지들을 동원하고 있기에, 교류성 지향 축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이 작품이 80년대 노동문학에 대해서 집요하게 애착을 보이는가? 이러한 애착을 보이는 것이 작품의 평가 기준에 있어서 과연 긍정적으로 될 수 있을 것인가? 만화에 있어서 노동문학에 대한 애착은 어떠한 방식으로 나올 수 있는가? 등등 좋고 나쁨이라는 판단기준을 세울 수 있는 다양한 토론거리가 제기되고, 평가를 내렸던 사람(들)은 그러한 토론에 있어서 제대로 된 추가적인 논지를 펼쳐서 사람들에게 납득을 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작품 자체만이 아닌, 더 큰 차원에서는 어떨까.


사례 3: "나는 순정만화 따위는 읽어도 도저히 재미를 못느끼겠어."

- 당연히,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명작 순정만화 추천, 순정만화에 대한 독해방식에 대한 설명 등을 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주장 자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기는 힘들다. "아니다, 너는 순정만화를 읽고 재미를 느낀다!"...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다만, 동의를 하거나 안할 수는 있다. "나도 그래", "난 재미있기만 하던걸"...개인감상 지향 축에 무게중심이 가있는 또다른 사례다.


사례4: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OO만화잡지가 망하겠다."

- 그냥 보자면, "나는 이 만화잡지가 맘에 안들어!"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논쟁적인 평가다(그렇게 읽히는 것을 억지로 거부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 아니 무책임한 일이다). 어떤 식으로 만화잡지가 유지 혹은 변모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망하지 않는 이상적인 만화잡지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러한 위기 진단은 어떤 이유에서 내린 것인가? 만약 이러한 부분에서 논쟁을 시작하고 논지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결과적으로 건설적인 논의들을 그 과정에서 도출해낼 수 있다면, 작게는 그 만화잡지를 살릴 수 있는 길을 내는 것부터, 크게는 만화잡지 전반의 방향성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논의의 영역이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평가기준을 만들어서 논지를 전개해야만 한다. 교류성 지향의 축으로 기울기 쉬운 주장인 것이다.


2. 드디어, 평론 이야기.

어려운 개념정립들은 여기까지. 이제 드.디.어. '평론'이라는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여러분들은 어렵지 않게 맞추실 수 있으리라 본다).

작품, 혹은 (산업적, 혹은 미학적) 경향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결과물(글일수도, 만화일수도, 말일수도 있다)을 부르는 용어들로서 흔히 '감상문', '평론', '비평', '칼럼', '에세이' 등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이것을 우리들은 흔히 거칠게, '일반적인 감상문'과 '그럴싸한 평론' 정도로 나누어 생각한다. 전자는 누구나 쉽게 뱉어내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를 뛰어넘는, '전문성'의 영역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평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는 글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높은 기대수준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대단히 실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단한 '평론'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평가물을 '평론'이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그것이 교류성 지향의 축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취향'(정서)의 무게가 덜해진다는 것은 아니다('기계'가 아닌 이상...); 오히려, 의식적으로 두 축의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단순한 '감상' 차원의 평가는 취향에 관한 것이며 부정/긍정이 불가능한, 토론 바깥의 영역에 있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감상은 그 자체로 분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론이라고 불리울 수 있으려면 이러한 주관적 감상과는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움직여야만 한다. 즉, '평론'은 평가 자체와 그 평가를 이루는 여러 이유들에 대해서 보편타당하고 논리적인 긍정/부정과, 그러한 과정들을 통한 '토론' 가능성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어떤 작품이나 경향에 대한 '평론'은 작품/경향 자체에 대해서 논지를 펼치고 좋고 나쁨의 평가를 내리는 만큼이나, 그 평론 자체도 보편타당하고 논리적인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을 만한 사람은 이미 들어봤을 오래된 명제인 '평론도 하나의 창작이다' 라는 말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이 논리에 도달하자, 필자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본 인식은, 평론은 작품(들)과의 관계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별개의 창작물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평론과 '작품'(들)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관계가 일방적이 될 때 평론의 존재이유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다(평론이 작가/작품에 대한 주례사와 광고문구로만 가득해 지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특히 만화라는 분야에 있어서 현재 '평론'이라는 용어는 과도하게 남용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거칠게 말하면, 개나 소나 평론입네 하고 있다는 것이다(아, 그 개, 소 가운데 본 필자도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본다...그 정도 주제파악도 없이 이런 글을 쓰고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만약 자신이 쓴 글 속에서 개인적인 좋아함/싫어함을 이야기하는 '감상' 차원의 평가와, 보편적 좋음/나쁨에 대한 제시를 시도하는 '평론' 차원의 평가의 구분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미 사실상 그 글은 평론으로서는 실격이다. 왜냐하면 평가의 두 축이라는 것은 결코 대등한 중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교류성 지향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이 약해질 때, 전체 평가는 개인 감상 지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개인적 차원의 감상은 누구나 지니고 있고, 많은 경우 특정한 작품이나 경향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글을 쓰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결국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분리를 시키고 싶다고 해서 분리가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 감상을 전제조건으로서 이해를 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교류성 지향을 추구해 나아가는 것이 평론의 정석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누차 강조했지만, 정서적 공감 없이 보편 타당한 논리라는 방법론만으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옳은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으로 더 기울기 마련이니까(물론, 필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잠깐 언급한, '평론도 창작이다'라는 말은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평론이 창작이라면, 창작물에 있어서 요구되는 한가지 가치를 더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멋진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카데믹한 엄밀성이라는 룰을 기본으로 하는 '전문 학술 논문'이 아닌 이상, 평론은 다른 창작글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감동, 충격 혹은 설득효과라도 줄 수 있어야만 좋은 평론으로 규정될 수 있다(소위 '인문학적 통찰력'의 위력은 이런 측면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즉, 평론은 '작품'으로서의 가치 - '좋은 글' - 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평론을 평론으로 만들어주는 기본 조건은

1) 평론을 함으로써 나아가고 싶은 뚜렷한 방향성과,

2) 자신의 평가를 뒷받침하는 보편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논지,

3) 그리고 자신의 평가에 대한 재평가와 후속 토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품으로서의 우수성 추구

등이라는 것이다. 이 것 만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평론'인 것은 아니지만, 이 가운데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제대로 된', 혹은 '좋은' 평론으로서는 실격이다. 많은 경우, 특히 3)항에서 결정적으로 약점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평론을 '평론글'이라는 하나의 글 덩어리에 한정시켜서 생각하는 흔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평론이라는 것은 하나의 글로서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는 완성품이 아니라, 하나의 '주장'이고, '평가'이며, 여러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의견을 교류해 줄 것을 종용하는 초대장이다. 따라서 후속논의는 당연히 평론이라는 행위의 일부다. 그렇다: 평론은 행위다. 평론이라는 행위 속에서, 글로서 남는 '평론글'은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평론을 평론답게 만드는 것은, 평론글 이전 이후로 벌어지는 지속적인 평가와 재평가의 장이고, 평론의 결과로서 원래 의도하였던 움직임을 만들어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데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바로 평론으로서의 실패다.

하지만, 어떤 글이 평론이냐 아니냐를 놓고 따지는 것은 사실상 부질없는 짓이다. 중요한 것은 평론이라는 간판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평론'이라는 간판이야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붙이고 싶은대로 붙일 수 있으며, 주변에 몇몇 사람들의 동의만 구하면 그대로 굳는다. 하지만 실패한 평론, 싸구려 평론이 되지 않으려면, 기본적으로 이러한 일정한 조건들을 클리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평론이 너무 어렵다고? 평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게 너무 좁아진다고? 그것은, 특히 만화라는 이 분야에 있어서 평론이라는 것이 그만큼 아무런 입지도 역할도 없다는 말의 반증일 뿐이다. 평론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기 입지를 지니고 있는 문학계의 경우, 필자가 제기한 위의 주장 혹은 설명들이 훨씬 덜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만화에 대해서도 평가를 내리려는 시도들을 할 때, 보다 제대로 된 평론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두고보자 6호: 오규원 인터뷰 참조).

우선, 그나마 여기까지라도 읽어주시고 계신 데에 대해서 우선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 보통은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먼저 자신만의 판단을 내리고 주장을 세우기 마련이니까... 뭐 여하튼 이러한 기본 전제들을 가정하고, 이제 각각의 토픽들로 들어가 보자. (...지금까지는 서문에 불과했단 말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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