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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만화와 평론 - 만화를 평가한다는 것 (2) : 잡담에서 평론까지
만화는 흐른다 02/01/15 23:21 capcold
<<2부: 평론의 단면들>>

3. 칼럼, 비평, 평론

만화평론뿐만 아니라 사실 평론 일반에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각종 용어들의 난무다. '전문지식'을 가장하기 위해서 조합된 용어들(당장 이 글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새로운 말들, 개념들이 난무하고 있던가!) 과 마구잡이로 수입되는 외국용어들 같은 내용적인 측면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글 자체를 지칭하는 작업에서도 혼선이 있다. 따라서 사실은 한번 대대적인 교통정리가 필요한 지점이지만, 급하게나마 간단히 몇가지만 후다닥 정리하고 지나가도록 하겠다.

우선, 비평과 평론이라는 두 개념이 있다. 비평은 원래는 넓은 의미에서 교류성 지향 평가라는 개념과 거의 등치될 수 있을 정도의 상위 개념인데, 특정한 작품/작가/경향에 대하여 평가를 내리고 그것을 가지고 대외적으로 소통을 하는 행위 전반을 지닌다. 재미있는 것은, 가끔가다가 '비평'과 '비판'을 혼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비평'은 반드시 '비판'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사실, '비판'도 반드시 '비난'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비평은 말 그대로 평가를 해서 밝히는 행위일 뿐이다.

이에 비해서 평론은 비평 가운데에서도 특정한 요건을 지닌 하나의 하위개념로서 정의될 수 있다. 즉, 비평 중에서도 명확한 지향점, 논리적 형식성을 갖추고 있는 텍스트를 칭한다(일종의, 대단히 좁은 의미에서의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이라고 할 때는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좀 더 평론이라는 텍스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지고는 한다; '미디어 비평'이라고 말할 때와 '미디어 평론'이라고 할 때는 분명히 초점이 서로 달리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평론'이라는 하위개념과 대비(비교)되는 개념으로서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할때는, 비평 쪽이 더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평가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사실 두 개는 서로 다른 차원범주에 있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두 개념을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다. 다만 엄밀하게 '평론'으로서의 자질을 따지고자 할 때 구분을 하고는 한다.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위의 두 개념에 비해서, '칼럼'이라는 말은 사뭇 다른 차원에 있다. 칼럼은 (신문에서의) '한 단의 글'이라는 단어의 유래 그대로, 지면 자체에 대한 호칭에서 시작되었다. 즉, 칼럼은 일정한 정식 지면을 받고(보통은 정기성까지 띈, 안정적 지면이다) 그 지면속에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쓰는 모든 것을 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론'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무거움'에 얽매일 필요 없이, 수필 스타일로 가볍게 자신의 생각, 단상, 이야기를 풀어나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칼럼'이다. 따라서 칼럼의 경우는 초점은 (내용 자체의 엄밀성보다는) '누가 쓰는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평론의 수준에 도달해 있는 칼럼을 쓰는 것도 가능하지만, (칼럼이 지니는 한정된 지면 등의 이유까지 고려하자면) 칼럼을 쓰기 위해서는 평론의 부담을 안고 갈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용례에서, 평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을 평론가를 따로 분리해서 말하고, 칼럼을 쓰되 평론의 영역까지는 들어가지는 않는 사람들을 칼럼니스트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혼선과 혼용이 있다. 심지어, 만화에 관한 글을 '공식 지면'에 쓴 경험만 있으면 가볍게 '평론가'라고 칭해버릴 정도로 말이다. (뒷부분에서 이야기는 더 자세히 꺼내겠다)


4. 한국에서, 만화평론의 발자취

현재, 한국 땅에서 만화평론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나타나게 되는 것은 크게 다음의 범주로 나타난다:

1) 이 책 좀 사보세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 2001년 현재 평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중적인 지면을 타는 글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말 그대로 '신간 소개'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주고, 작가 소개를 살짝 해주고. 덤으로 자기가 이 만화를 읽고 느낀 감정 몇 문장(주로, '재밌다!'라는 말을 다양한 수사를 통해서 펼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잡지 한페이지~한페이지 반 남짓의 공간, 혹은 신문의 경우 작은 박스 하나에 다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이어야만 한다. 정말로 쓰고 싶은 것에 대해서 쓰기보다는, '신간'에 대해서 써야만 하며, 일종의 '광고' 기능을 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신들, 이 책을 꼭 사봐라'라는 식의 칭찬일색 주례사 '비평'(?) 이외의 글은 좀처럼 용납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글들 역시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 바로, 아무 생각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 좋은 신간 만화를 한번 사보라고 쉽고 간단하게 소개해 주는 것이고(평론과 광고의 경계가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지는 지점이다), 그것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실 이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이러한 글들만이 2001년 현재 지면상에서 생존한 듯한 독점적 흐름이 문제일 터이다.

2) 만화는 돈 된다니까! : 때로는 '학술논문', 때로는 '자료집' 등의 얼굴로 나타나는 일련의 시스템 '평론'(?)으로서, 주로 만화에 관한 심히 부풀려진 수치를 바탕으로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가끔씩은 있지도 않은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며(최근 모 토론회에 H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는 '코믹 쿠키'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잡지가 버젓이 구체적인 통계수치까지 첨부되어 들어있었을 정도다), 자료의 부실함을 덮기 위한 해외 문화 이론가들의 현란한 수사들이 마구 동원되기도 한다(그 중에서도 포스트 모더니티 관련 개념들이 단연 인기를 끌 수 밖에 없는데, 어차피 아무도 그 개념이 정확히 뭔지 규정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1)이 대중들을 상대로 한 광고전단이라면, 2)의 경우는 투자자들을 향한 제품설명회라고 할 수 있다.

3) 기타 : 1)과 2)를 제외한 글들은, 실로 드물다. 즉, 별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만화의 미학적 탐구를 해보겠다고? 사회적 함의를 찾아 보겠다고? 유감이지만, 당신들에게 줄 지면은 없습니다...라는 느낌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렵고 긴 글 읽기보다는 역시 '이 책이 재밌다'라고 추천받는 것 이상으로 만화에 관여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대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글을 쓰겠다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힘으로 지면을 직접 만들어내는 수 밖에. 위의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어떻게든 등장했던 정말로 몇 안되는, 만화의 가치 자체를 높일 수 있는 주옥같은 평론들 마저도 망각 속으로 사라지기 딱 알맞는 현실 상황이다. 하지만, 진짜 평론이라면 응당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은 3)에 있음을 필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만화평론의 시초는 누구인가? 해답: 모르겠다. 누군가가 그것은 조사해 보기를...하지만 본 필자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만화 평론의 흐름이 가시화되고 움직여왔는지에 대한 것이라면, 분명히 관심이 넘쳐난다. 특히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간에 '여기 지금' 현실에 함의를 던져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필자의 관심사의 범위는 70년대 말까지만 뻗어가 있는 상태다. 물론 그 이전에 만화에 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만화 창작 기법서나 '아동만화가 아동화에 미치는 영향'(김윤주, 1970) 같이 만화를 다른 것을 위한 소재로 다루는 연구들을 '평론'의 범주에 넣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70년대 이후 한국 만화평론은, 크게 3개의 경향성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70년대 말-80년대 초중반정도까지 있었던, 문학 비평 출신 인사들의 활동이었고, 두 번째는 80년대중반 이후 - 90년대 초를 풍미했던 민중미술에 입각한 시각이었으며, 세 번째는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저널리즘 적이며, 탈중심화되고 매니아 성향을 받아들인 스타일로서의 접근방식이다. 당대의 모든 평론이 이러한 범주에 묶이는 것은 물론 아니고, 각각이 서로 정확히 칼로 썰 듯이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수한' 혹은 '대표적인' 평론글들의 방향성,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간의 단절 등, 여러 모로 이러한 구분은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밑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가정해놓고 간단히 훑어보도록 하겠다(가능하면 사람 이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경향성 위주로 가기로 하겠다; 그 부분은 '두고보자 한국 만화비평 지형도'를 참조하시기를).

70년대 이후 만화비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문예 비평지 '뿌리 깊은 나무'에서 만화 비평란을 고정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배경으로는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다: 1) 당시, 대중문화의 가능성들에 대한 관심이 학계, 비평계 등에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되었으며, 2) 언론탄압으로 인하여 양산된 해직기자들이 출판사의 경영자/기획자 등으로 유입되어 들어와서 출판계에 새로운 방향성을 지니게 되었던 시기다. 그리고 3) 덕분에 박수동의 '고인돌', 고우영의 '삼국지' 등의 만화집이 대본소와 가판대를 벗어나 '일반' 출판사에서 제작, 서점 판매대에 올라와 큰 히트를 치게 되었다; 수십년만에 다시 대여가 아닌 판매를 전제로 한 만화 유통이 시작된 것이다(오규원 인터뷰 참조).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79년도에 월간 '뿌리깊은 나무'에 대중문화 비평란이 생겼다.

'뿌리깊은 나무'의 대중문화 비평란을 중심으로 하고, 몇몇 다른 지면(대학교 신문 등)을 통해서 오규원과 故 김현 등이 주축이 되어 문학 비평의 방법론이나 스타일을 토대로 하는 만화비평이 이루어졌다. 당시 만화가들의 외국만화 표절에 대한 일침, '한칸만화 공모전' 실시와 그에 따른 심사 비평글 등 현학이나 자기만족에 머무르지 않는 '적극적인' 비평활동을 해나갔다. 또한 이런 방식의 적극적인 정식 평론 활동이 만화라는 장르에 도입된 거의 첫 경험이기 때문에, 만화계에 대한 영향력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특히 표절같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에서는 작가들과의 많은 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뿌리깊은 나무'에 연재된 오규원의 글들을 묶어서, 81년 열화당에서 '한국만화의 현실'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본격 만화비평 서적의 기념비적인 책으로 뽑히고 있다. 82년에는 이해창의 '한국시사만화사'가 발간되는 등, 만화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이어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때 활동하던 평론가들은 몇 년 후 자신들의 본업인 문학비평으로 돌아갔고, 이들을 중심으로 했던 만화비평의 방향성도 마땅한 '후계자' 없이 끊어지고 말았다. 비평이 가장 안정적인 방법론적 틀을 갖추고 있으며, 확고한 자기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문학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이런 식으로 맥이 끊어지게 된 것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80년대 중반 이후 소위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대됨에 따라서, 만화의 민중미술적인 가치를 평가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일어났다. 이들은 만화의 '민중성'에 주목하고, 사회적 메시지성을 담지하는 매체로서 만화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만화의 '선'은 민중미술, 특히 판화의 '선'과 등치될 수 있는 표현방식이었고, '고급 순수 예술'따위와는 다른 폭넓은 가독성은 민중미술적인 이상향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노동문제, 통일 문제등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며 본격적인 '민중만화'를 표방하는 스타일의 작품들도 이 시기에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성에서 '이희재식 리얼리즘'은 하나의 모범이었으며, '만화 광장' 등 성인취향 만화잡지들을 통해서 나타난 80년대식 사회진단은 많은 평론거리를 던져주었다. 위기철, 최석태, 김창남 등 일련의 평론가들의 활동은, 87년에 나온 '만화의 시대', 우만련의 전신인 '바른만화 연구회'의 만화창작 등을 통해서 그 정점을 이루게 된다.여기에 미술평론 출신의 최열 씨 등이 '만화광장'에서 평론활동을 왕성하게 실시했다.

90년대 초, 스포츠 서울은 신춘문예에 만화평론 부문을 신설함으로써 이러한 움직임들 속에서 주도권을 잡아 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부 필자들이 이에 대해서 '공식 등단'이니, '(공인)만화 평론가 1호'니 하는 대단히 거북한 표현들을 남발하는 등의 오버를 함으로써 (결국, '경연대회'일 뿐이데 그것이 절대적인 유일 권위의 '공식 경로'라고 칭하는 그 허풍의 크기에 한번 압도되고, '1호'라는 호칭을 가볍게 들이밀어버림으로써 이전의 모든 성과들을 무시해버리는 무모함 앞에서 다시 한번 당황하게 된다) 스스로의 권위에 오히려 오점을 남겼다.

여하튼,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이전의 지향점이나 방법론들과는 다소 다른, 저널리즘적 성격을 지닌 일련의 비평/평론 활동들이 이어진다. 문학이나 미술 등의 비평/평론 방법론을 이론적 토대로 하면서 전개시켰던 이전 필자들의 경향성과 비교할 때 이는 분명히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저널리즘적 비평/평론들의 장점은 구체적인 자료조사의 치밀성(자료 보존이 빈약한 한국의 현실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다)에서 나왔고, 만화의 사회적 의의 구축 부족, 이론적 지향과 함의 미비, 창작물로서의 상상력 빈곤 등이 단점으로 꼽힌다. 즉, 창작 비평 보다는 '연감'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의 장단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우수 성과물이 바로 한국만화통사 편찬위원회(한국만화문화연구원의 전신)에서 만든 '한국만화통사'다(96년 발간).

이렇듯 새로운 방향이 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90년대 들어서 일본식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한 청소년 주간지 방식의 큰 히트와, 주간지 아이큐점프의 '드래곤볼' 연재를 통해서 본격화된 일본만화의 라이센스 직수입은 한국에서 만화가 움직이는 방식 자체를 뿌리부터 바꿔놓아 버렸다. 일본만화의 감수성을 수입하여 국내만화에 도입했던 것은 이미 오래고 오랜 일이지만, 이제는 시스템적인 측면에서부터 전혀 다른 방식의 만화 양식이 도입된 것이다(너무 길게 들어가지는 않고자 하니, 간단하게 예를 들겠다: 주간 청소년 잡지에 매주 13-19페이지 연재를 하며 단행본 수입을 위주로 이익을 올리고자 한다면,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같은 스타일의 감수성과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만화의 급속한 유입과 시장지분과 영향력 증가를 통해서 특히 젊은 독자층을 중심으로 만화에 대한 감수성 자체가 급변하고 있었는데, 여러 기존 평론가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대부분 제대로 된 자기역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양적으로 엄청나게 쏟아지는 일본만화와, '새로운 방식의 한국만화'(긍정적인 의미도, 부정적인 의미도 우선은 배제하고자 한다) 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 많은 이들은 슬그머니 평론 활동을 실질적으로 접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독자들이 바라는 '평론'은, 자신들이 실제로 보고 즐기고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소개와 팬클럽 감수성 공유 등 새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다루어 보겠다). 줄거리 소개 및 trivia 정보 제시 위주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평론'이라기보다는 '정보 제시 + 약간의 개인적 감상' 형태의 글쓰기가 '주류'를 점한 것이다. 한 작품에 대해서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고, 미학적 이론 분석틀을 적용해보는 식의 탐구보다는, 많은 작품을 연결시켜서 소개해주고, 취향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인력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 자신들 가운데에서 나왔다. 특히 PC통신 동호회의 활성화를 통하여, 많은 '숨겨진 매니아'들의 필력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글쓰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더군다나, 실제 지면 상에서 다른 방식의 글쓰기에 대한 할애가 거의 사라지다 시피 했기 때문에(잡지 제작자 입장에서는, 잘 팔리는 글을 실어주는 것이 당연하다!), 더더욱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했다. 심지어 개별 작품론이 아닌 '시스템 평론'이라도 할려고 친다면, 아예 자신들이 직접 지면을 만들어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만문연의 '코코리뷰'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인터넷 환경의 급속한 개선에 따라서, '자기 지면'을 스스로 만들기가 비교적 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아무도 안 볼 듯한 바로 이런 글도 버젓이 써서 '공개'할 수 있지 않는가. 물론 인터넷이 만병통치약은 아닌지라, 보급과 유통, 영향력 면에서 또 다른 약점들을 감수해야 한다... 아무리 인터넷 상에 그럴싸한 간판을 걸어놓은 지면이라 할지라도, 투자자 없고 수익구조가 없다면 '동인지'와 같은 문제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이 지면 두고보자도 해당된다).


5. 한국만화평론의 현주소

이러한 경향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더더욱 만화와 관련된 글 가운데 '신간 줄거리 소개' 이외의 것을 할 수 있는 지면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현재 정규 활동을 벌이는 평론 지면이나 단체는 그리 많지 않다. 스포츠 서울 만화평론 신춘문예도 없어진지 오래고, 2001년도 초에는 '오즈'가 결국 사이트를 폐쇄했으며, 천리안 웹툰 등의 지면도 업데이트를 중지했다. 만문연의 코코리뷰도 웹으로 거처를 옮긴 뒤, 한동안 슬럼프 상태인 듯 업데이트나 게시판 활동이 뜸한 상태다(물론 '두고보자'도 업데이트가 거의 격월간-계간 수준이지만-_-;). 만화/애니메이션 학회 차원에서 평론을 발표하거나 단행본을 낸 것도 도대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한국 만화평론가 협회'는 이미 망각의 영역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개인 차원에서는 아직 간간히 활동 소식들이 들린다는 것이다. 만화를 매개로 자신의 학력을 팔아먹겠다는 발상의 아주 어처구니 없는 책들을 제외하자면, 그래도 꽤 괜찮은 만화평론 서적이 매해 끊이지 않고 한두 권씩 정도는 나오고 있다(인색하다고 생각하시지 말기를; 그나마 높게 잡은 것이니까).

결국, 현재 만화관련 글들의 특징은 우선 지면의 편중이다. 작품소개 위주, 개인적 감상 차원의 글이 개인적 지면, 영리 지면, 공공 지면 등을 포괄하여 주조를 이루고 있다. 진지한 '평론'은 읽는 사람도, 결국 쓰는 사람도 거부당하는 분위기다. 만화가 대중적 인기를 끌 경우 그것이 진지한 비판과 분석의 대상이 되기 보다는, '팬클럽화'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팬클럽'의 장점은 물론 그 작품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라는 것이지만, 단점은 논의와 의견 교류가 아닌, 취향의 공유를 절대적인 중심으로 놓는다는 것이다. 맨 앞에서 이야기했던(아직 기억하시고 있다면...당신은 천재!--;) 교류 지향과 개인감상 지향 사이에서, 교류 지향을 극도로 거부하고 배제하는 부정적 움직임마저 나올 정도다.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한다면, 작가 Y에 대한 비판적 분석글을 쓰면, 작가를 좋아하는 팬들의 반응이 그 분석글에 대한 진지한 다른 비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왜 그렇게 만화를 어렵게 분석하려고만 하는가...', '우리 취향을 그냥 존중해달라...', '우리 샘 욕하면 가만 안둬'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물론 이런 반응들이 전적으로 '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 이외의 것이 통용이 되지 않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안그래도 최근 한국만화 평론의 가장 큰 병폐중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주례사 비평'인데(워낙에 판이 좁은데다가, 만화가와 평론가 사이의 룰이 제대로 정해져있지 않은 이 '구멍가게'에서라면 조금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팬클럽화'는 그나마의 비평마저도 싹을 잘라버리게 된다.

취향만을 강요하고, '논쟁'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대상에 대해서는 실제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감성적, 이성적 차원 모두 골고루 좋아하기를 거부하고, 감성적 차원에만 머무르겠다는 성장거부 선언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좋아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한줄로 요약하자. 한국에서 만화평론은 지면도 없고, 수요도 없는 암울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만화를 좋아한다는 느슨한 선언 하나로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5. 만화평론의 방법론적 문제

물론, 읽는 사람 어쩌고 하면서 탓하고 주저앉을 일은 아니다; 실제로 쓰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평론을 못 내놓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 매체(의 작품)에 대한 평론이라는 것이 해야할 역할 가운데 하나는, 그 매체 자체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평론은 단순한 '개인적 감상'을 넘어서서, 영화가 세상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성찰의 좋은 장이 될 수 있으며, 진지한 토의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사회에 이해시킴으로써 영화 자체가 이 사회 속에서 가지는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널리 공감하고 있다. 소설, 미술, 음악 모두 마찬가지이며, '평론'이라는 이미지가 내포하는 '힘'(혹은 '권위')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현재 한국 만화평론(...사실, 한국에 국한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지만 글의 통일성을 위해서 약간 무리하게 적용하고자 한다)에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체적 방법론의 부족이다. 여기서 잠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방법론'이라는 개념은,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준말이 결코 아니다(문제는, '방법론'하면 그런 식의 이미지를 먼저 확고하게 떠올리고, '너무 경직된 것 아니냐'라고 반발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직관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학술적으로 반드시 엄밀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정서적 공감대' 이상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분석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보편적인'이라는 말을, '단일한'이라는 말로 오해할 사람은 제발이지 없기를 바란다). 물론 직관만으로도 허를 찌를 정도로 놀랍도록 만화의 본질을 꿰뚫고 만화의 가치를 높여주는 '명문'이 탄생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결국 평론도 하나의 '창작'이니까, '일순간에 갑자기 뚝 떨어진 개별적 <작품> 하나로도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만을 기다리면서, 만화와 만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가고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한심한 짓이다.

원래 하나의 미디어가 새로 탄생할 때는 이전 미디어의 방법론들을 가지고 오게 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론이다. 하지만 만화의 경우, 자신의 가장 직접적인 지양분이었던 문학, 회화 등의 전통보다는, 현대에 들어와서 연출상의 힌트를 얻어온 '영화'의 연구방법론, 그 '영화 평론' 가운데에서도 그다지 특징적이지 못한 부분만 수용했다. 그것은 바로 내러티브 분석인데, 이것은 소설, 영화 등 이야기 예술 공통에서 사용할 수 있는 큰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즉, 매체 자체의 속성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가 보다는, 그 안에 담겨진 이야기의 줄거리가 주요 관심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내러티브 분석이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러티브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부분이고, 따라서 관심을 할애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줄거리 만으로 작품이 '만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가장 상식적으로라도, 도대체 이 줄거리가 왜 만화로 만들어져야만 했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면, 도대체 뭐하러 만화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만화평론을 하는가? "하지만 영화나 소설로 만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고 누군가가 지나가는 한마디를 할 때, 반박할 근거조차 들어있지 않은 글을 쓰면서 '만화 평론' 입네 하는 것은 사양이다.

만화평론이 '만화'를 위한다는 제 기능을 하려면, 내러티브 분석에만 얽매이지 말고 만화 고유의 표현적 특성이라는 시점에서 접근 가능해야 한다. 만화에서만 가능한 것들에 대한 의식적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부터는 '공부'가 필요하다. 내러티브 분석에서처럼 이전에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뭐 ,소설이나 영화같은)이 이미 세워놓은 방법론 위에 살짝 묻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만화 안에서, 스스로 세워나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놓고 보더라도, 칸의 의도적 병렬 순서, 방향에 의한 연출효과, 양면으로 이루어진 한눈에 오는 단위(본지의 halim님은 이에 관하여 '한바닥'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에 대한 연구, 개별 칸과 meta-칸(현재 필자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으로, 정식개념은 아니다) 에 대한 시선이동처리 효과, 글과 그림의 결합 방식이 스토리나 감수성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등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장르적 특성들, 캐릭터 구성이나 스토리의 전형성 등의 사회적 /산업적 맥락이나, 장르 내적 연구를 할 수도 있다. 수용자 중심의 만화 독법에 대한 민속지 연구를 할 수도 있다. 미학적인 것에서만큼, 시스템적인 측면에서도 연구 과제는 무궁무진하다: 각 만화문화권의 만화 제작 및 유통 시스템 특유의 특성들에 주목하고 상호비교하며, 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만화 특유의 자체적인 방법론을 도입할 구석들이 많은데, 줄거리 소개와 작가 개인에 대한 거의 개인적인 수준의 칭찬 몇마디, 자신의 어릴 적 추억담 정도로 지면을 독점해버리기는 아깝지 않은가!!! 평론을 쓰고 싶어하는 우리들이여, 제발 공부 좀 하고 삽시다.

만화평론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만화의 가치 자체를 높이고, 나아가 사람들이 만화를 제대로 즐김으로써 개인적/사회적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만화를 단지 내러티브뿐만이 아닌, 만화 전체로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줄거리를 즐기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를 즐기도록 유도해야 한다. 만화평론이라면, 당연히 만화의 당위성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일찍이 '몽타쥬'와 '미장센'이라는 두 개의 굵직한 개념화를 통해서 이런 과업(즉, '영화의 당위성')을 이루어냈다. 이미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만화에서도 그런 막강한 거시 이론(Macro Theory)를 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연구'만을 집중적으로 하는 '학자'들이 따로 있고, '평론가'들이 그 업적들을 받아먹으면서 '멋진 평가글' 제작에만 몰두할 수 있는 구조라면 세상은 약간은 더 편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경우 그리 만만하게 모든 것이 분업화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평론가들이 연구의 역할을 상당부분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시나 소설, 영화 평론의 예를 빌리지 않더라도, 평가를 내리고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자신들 주장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서라도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이 말이 싫다면, '성찰'정도라도 괜찮다)를 해놓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기존에 만들어져서 비축되어 있는 성과들, 즉 평가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스스로 만들어서 채워넣어야 하는 부분은 증가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기존의 모든 '평론가'들이 동시에 공부를 시작하고,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육상에는 100미터 달리기 선수도 있고, 넓이뛰기 선수도 있고, 투포환 선수도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현재의 '만화' 담론이 다른 매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경우, '예술양식')에 비해서 마저도 가장 부족한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인 만큼, 이것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모든 평론가들이 매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도, '평론계'(그런 것이 있기나 하다면)에 주어진 하나의 '과제'인 것이다.


6. 평론가라는 직업?

우선, 한가지 오해부터 먼저 바로잡자. '평론가'는 직업이 아닌 '직함'에 가깝다. 평론가라는 말 자체에는, 어떻게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지 따위는 들어있지 않다. 원고료를 받고 자기 글을 팔아서 밥을 먹는다면 '작가', '기자'이거나 많이 느슨하게 봐주자면 '칼럼니스트'일 것이며, 연구활동으로 보고서를 만들어주고 강의를 하면서 밥을 벌어먹는다면 '연구원', 혹은 '학자'일 것이다. 직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든지 간에, 이러한 방향의 활동성향을 지니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평론가'라는 말의 위상은, '글쟁이'라는 말보다는, '문화활동가'라는 식의 말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대화를 한번 상상해보자: "너 요새 어떤 일 하니?" "응, 난 문화활동가야." "음...그래. 좋은 거 하는구나... 그런데 그러니까 직업은 뭔데?"

위의 대화에서 '문화활동가'를 '평론가'로 바꾸어보기를 바란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들릴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다음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보자: "내 직업은 글쟁이야." "주로 뭘 쓰는데?" "응, 주로 평론글." ...뭐 이 정도면 본 필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알아차리시리라고 믿는다.

즉, 평론가란 무엇이고 그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는, 그들이 글을 쓴다는 것 하나로 평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평론가라는 직함을 얻는 방식,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직함에 부합되는 내용의 글과 기타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에 관한 것이다. 제대로 된 평론활동을 못하고 있다면, 평론가라고 불리우는 것 자체가 거부당해야 한다. 이것은, 평론가가 직업이 아니라 직함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제대로 된 '평론활동'을 하고 있다면, 무슨 신춘문예에서 등단할 필요도 없고, 중앙 일간지에 정기 지면을 부여받지 않아도 된다. 동호회 게시판을 통해서라도 충분히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만 있다면 '평론가' 직함을 부여받을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러한 규정을 하게 된 것의 기저에는, 다른 거창한 것 보다도 사실은 한국에서 평론가 활동을 하는 것으로는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실제로 '전업 평론가'라는 것은 만화가 아닌 다른 분야라도 그리 쉽지 않으며, 특히 한국의 빈약한 시장상황과, 더욱 빈약한 대중적 문화인식 덕분에 한층 더 힘들다. 온갖 지면에 정기 지면을 확보하고 글을 '쏟아내고 있는'(정말 다행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정도 이상의 글 수준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만화평론가 P씨가 평론글만으로 버는 월수입은 60만원에 불과하다는 말은, 조금도 허황되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장이, 혹은 독자들이, 혹은 작가들이 평론가들을 일부러 먹여살려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모금운동을 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바로, 현재의 상황에서 평론은 그 자체로는 '비영리 활동'의 성격을 지닐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론으로 문화권력을 확보하고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으려면, 이 판 자체가 워낙 크고 분화되어 평론글, 추천글, 연구논문 한편이 시장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상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미국의 영화평론계를 보자면, 그것 또한 그리 바람직한 방향은 아닌 듯 싶다. 뭐 어쩌겠나. 돈은 다른 방법으로 벌고, 평론활동은 평론활동대로 할 수 밖에. 평론가 지망생도, 독자도, 작가들도, 평론가 자신들도 쓸데없는 환상은 금물이다.

평론가는 무슨 절대 문화권력이 아니다. 평론 역시 하나의 창작물이고, 그것은 역시 하나의 제안, 추천일 뿐이다; 물론 강도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것을 하나의 움직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폭넓은 호응을 모을 수 있을 때 뿐이다. 여기서 평론을 읽는 독자층, 수요층이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도대체 평론은 누가 읽는가,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작품의 경우에서라면 자기 고집을 세운다는 것 자체로서 '작가'임을 인정받겠지만, 평론의 경우는 오히려 더욱 쉽게 잊혀지고 버려질 수 있다(아무도 그런 재미없는 것을 읽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마치 이 글처럼). 그럴 경우, 토론과 움직임의 창출이라는 원래의 목적에서 오히려 실패해버리는 비극이 발생한다.

따라서 평론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식으로 눈높이를 맞출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 사실은 평론가는 여러 발짝 앞선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발짝만 앞선 글로 독자를 자꾸 끌어당기는 엘리트 주의가 필요하다. 너무 앞서나가면 아무도 안읽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새는 평론이 그런 걱정을 별로 안해도 되는 듯 하다. '정보'위주로 흐르다 보니, 평론을 쓴다는 사람들보다 독자들이 더 많은 정보를 쉽게 취할 수 있다. 또한 신문 지면 등에서 (주로 기자들이) 서평을 쓸 때 공식 보도자료를 적당히 가위질해서 올리는 작태를 보이는 등 스스로 질을 깎아먹고 있다; 즉, 반발짝도 앞서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다. 독자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평론을 쓴다는 사람들이 더 앞서 나아간 상태에서 그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주례사 늘어놓기 말고는 다른 진지한 평론 방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포기한 글들이 너무 많이 섞여있다. 무엇보다, 혼자서 글 뱉어놓기가 아니라 '논쟁'에 참여하는 자세는 더할 나위없이 부족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하면, 평론가는, 창작자의 입장에 가깝든, 독자의 입장에 가깝든, 외계인의 입장에 가깝든 여하튼 뚜렷한 방향성과, 그 방향성에 걸맞는 방법론(제발 다시금 강조하는 바지만,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을 지니고 평론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 평론의 권력과 한계를 항상 의식하며, 논쟁을 피하지 않는 것이 바로 평론가라는 직함이 지니는 책임감이다. 그 책임감이 싫다면, 평론가라는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직함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빗발치는 반발이 예상되는 바다. 기존에 '평론가'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굳이 이런 엄밀한 규정에 의해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는지, 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논리적 무결성보다 정서적 공감대를 강조해서 보는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도 충분히 좋은 평론이 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필자의 이런 원리주의적 독선(獨善)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사실 위에서 필자가 부르짖는 것은 하나의 지향이자 선언이다. 다른 매체에서 평론이 지니는 책임과 성과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보유하게 된 위상 가운데, 만화에서는 아직 위상('권위')만 차지하려고 했지, 책임과 성과들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수의 논쟁 끝에 내리는 결론은 그래서 다음과 같다: 평론가라고 직함을 달고 싶다면, 뭐 달아도 좋다. 게다가 사람들도 그렇게 불러준다는데, 뭐 문제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만화에 대해서 평론이 해줘야 할 부분들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고자 하는 평론가가 더욱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작가도, 독자도, 산업계도 모두 자기 역할이 있는, '만화의 위상 자체를 높이려는 노력'에 평론이 고급 담론 생성이라는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평론이라는 용어의 권위에 취해있을 것이 아니라 말이다.


7. 그러니까...

현대 대중문화/대중예술은 여러 면에서 프로 축구나 야구 경기를 닮아 있다. 개개인의 우수한 플레이('작품')가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팀('장르', '경향성', '연대', '상호작용'...)플레이가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팀과의 경쟁이 가장 강력한 볼거리이기도 하다. '선수'('작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수한 개인기를 통해서 자아성취를 이루고, 다른 동료들과의 영향관계 속에서 하나의 장르, 경향성을 만들어 나간다. 선수는 예술적인 플레이를 해내는 자아성취와 함께, 명예와 금전적 이익을 동시에 염두에 두게 된다(물론, 이들 사이의 경중관계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선수는 금전적 이익을 최우선시할수도, 또 다른 선수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플레이들은 붙특정 다수의 '관중'(독자)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관중들 덕에 경제적 이해관계, 영리성, 시장성 등이 생겨난다. 팀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서 경영되며, 이런 다각적인 상호관게 속에서 '게임'은 실시된다. 그것이 바로 프로 스포츠다.

뭐 알아서 잘 읽고 각각 대입시켜서 상을 그려보시기를. 그리고 이제 '평론'이 해야할 역할을 찾아보겠다. 이 비유에서라면, 평론이 해야할 역할은 바로 심판과 해설자이다. 심판은 가장 멋진 플레이가 나올 수 있는 경기 법칙을 고민하고 적용하며, 반대로 도저히 도리에 안맞는 플레이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를 내리는 것을 임무로 한다. 멋진 페어 게임을 유도하기 위하여 백태클에 대하여 레드 카드를 날리고, 우수한 개인 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하여 오프사이드를 적용하는 것이 바로 심판이다. 해설자의 역할은, 멋진 플레이가 나올 때 그것이 어째서 멋진 플레이인지 관객들에게 설명하고 감동을 시키는 등의 활동을 통해서 관객들을 이 게임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 바로 평론이다.

물론 평론이 많이 나오고, 평론이 하나의 독자적인 시장성을 지니게 되는 것만이 반드시 좋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평론이 수행해야 할 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나아가기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다시 위의 비유로 돌아가자면, 심판이 20명쯤 투입된다고 해서 게임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게임이 나오려면, 제대로 된 심판이고 해설자를 갖추어 놓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도, 심판 없이 경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경기가 관객 따위는 신경도 안쓰고, 룰이고 멋진 플레이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즐기는 동네 축구 수준밖에 안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뿐이다. 룰도, 방향성도, 정당성도 없이 좁디좁은, 점점 물이 말라만 가는 방치된 어항 속에서 서로 누가 잘났느니 하는 다툼을 할 따름이다.

한국. 만화. 평론. 이 개념들이 어떻게 조합되고, 상호작용할지는 아직 앞으로 계속 나아가 봐야할 일이다. 하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내는 데에 성공한 당신이라면, 앞으로 약간은 더 그 관계와 역학, 역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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