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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 이원복 : 지적아마추어 또는 프로 만화기술자 이원복
작가론 03/03/26 03:54 기린아
내가 이원복을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때 보았던 『거지황제 나폴대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이원복이 그리는 나폴레옹의 모습 그대로에 거적을 뒤집어씌운 듯한 이 캐릭터가 주는 매력에 내가 얼마나 빠져있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만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중 거의 유일(!)하게 이원복을 비호하는 세력이었던 것 같다. 비록 정치적 지향점이 그와는 많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이원복은 최고의 작가중의 하나였다.



1987 먼나라 이웃나라 / 1990 자본주의 공산주의 / 1991 세계의 만화 만화의 세계 / 1993 한국 한국인 한국 경제 / 1994 국제와 시대의 세계경제 / 1994 현대 문명 진단 / 1995 세계로 가는 우리 경영 / 1995 사랑의 학교 / 1996 펜끝으로 여는 세상 / 1996 뉴스 뒤집어 보기 / 1997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 / 1998 현대 문명진단 / 1998 새 먼나라 이웃나라 / 2000 유럽만사 세상만사 | (이원복 홈페이지 www.won-bok.com에서 발췌)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이원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환상들을 버릴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단지 이원복과의 정치적 지향점과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최근의 그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그가 객관적으로 봐서 문제가 있는 작가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번 글에서, 나는 그의 극우적 성격이 무엇 때문에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추리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아마추어’ 라는 것이다. 이 아마추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그의 작품들을 해석해 보기로 하자.

이원복은 정말 아마추어인가? 아마추어라고 생각하기에는 책도 많이 팔고 있지 않은가? 전문적으로 교육관련 책을 내는 사람 중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질문이 당연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추어라고 해서 돈을 벌지 못하는 법은 없다. 또한 이원복을 아마추어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가 전 분야에서 아마추어인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그림과 그것을 통한 의미 전달에 관한 한 프로다. 대신 그는 ‘자기 머리로 고민해야 하는’ 순간에는 아마추어다. 대표적인 것이 사실확인의 부족에 관한 문제다.

첫째는 『…프랑스편』에서, 엥겔지수를 만든사람을 ‘엥겔스’ 라고 표기한 사실이다. 공산당 선언을 한 사람이 엥겔스지, 엥겔지수를 만든 사람이 엥겔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복은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위의 부분은 새로운 판에서는 바뀌었으니 실수라고 해 두자. 그러나 『…영국편』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을 다룬 부분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전쟁 초기에 영국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에 『먼나라 이웃나라』를(그리고 『먼나라 이웃나라』만!!) 읽어본 사람이라면 ‘석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석궁이 사정거리가 길고, 관통력이 좋아서 석궁을 사용한 영국이 프랑스를 이겼다, 라는 것이 이원복의 이야기였다. 필자도 그렇게 알았다. 그렇지만, 외국의 무기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영국의 주력 병기는 장궁이었다. 원래 석궁은 프랑스 보병도 사용했었으나, 석궁은 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분당 2발 정도밖에 발사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연사가 가능한 영국군의 장궁을 압도할 수 없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은 더욱더 중무장된 좋은 판금갑옷을 입어야 했으나, 이 갑옷의 무게는 수십kg에 달했고, 이로 인해서 기사는 기동력을 상실한 체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다. 즉, 이원복의 이야기는 상당히 후대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원복은 그 무수한 증쇄의 연속 속에서도 그걸 고친 일이 없다.

게다가, 때로는 자기가 한 말을 잊어 먹기도 한다. 과거 이원복이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을 낼 때, 「아시아 국가들도 서로 다르지만 대강 비슷하다, 그에 비해 유럽은 머리색, 눈색, 성격 등등이 매우 다른 곳이다」라는 내용을 썼었다. 나름대로 유럽의 다양성을 강조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나라 편』에서는 그 생각을 뒤집는데,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고 유럽의 다양성을 부러워하게 만든 작가가 지금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나는 작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을 보면, 어떤 반복적인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국가들을 이야기 하지만, 어떤 반복되는 구조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이 만화가 어떤 ‘학습용’의 목표아래에 일관되게 쓰여졌다고 생각되기보다는, 상당히 느슨한 스타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이후에 나온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비조직적’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원복은 나름대로 비조직적인 내용에 어울리는 문체와 배치로 물 흐르듯 볼 수 있는 만화를 만들었고, 거기에 이원복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새로이 증보판을 내면서 만화의 순서들을 재배열했다. 자기가 보기에도 좀 배열이 어지러워 보인 모양인데, 대신 이번에는 전체적으로 느낌이 ‘경직’되게 되었다.

위의 예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상당히 어지러운 편인 『…이웃나라』의 편집 방향을 보면? 그렇다! 그는 "주워들은 대로" 또는 "생각나는 대로" 썼다. 잘 모르는 비전문가가 주워들은 것을 적당히 상상력을 가미해서 쓴 혐의가 강하다. 필자도 남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쓸 때는 종종 그랬다. 이건 아마추어의 글쓰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필자가 이원복의 ‘극우성’을 비판하기 보다 ‘아마추어’적 성격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위의 예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어떤 극우적 사상을 체화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주워들은 대로 그것이 주류의 생각일 것이라고 믿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자의 속성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회주의자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바, 그는 역시나 ‘아마추어’다.

이원복이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써서 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그는 자기 머리로 세상을 이해할 능력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을 보면, 중반부분은 70~80년대를 풍미하던 ‘일본 경제를 따라잡자’류의 이야기에서, 후반부는 90년대를 지배하던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여러 이야기에서 그대로 복사해 온 것이다. 뭐, 복사한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동등하게’ 다루는 방법을 통해서 자기 나름의 ‘냉정함’을 보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어느 한쪽이 옳다, 라고 생각을 했다면 어느 한쪽의 비중을 줄였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그는 기계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바 읽는 이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의 양비론적 행태에 해당한다. 왜냐고? 자기 자신은 뭐가 옳은지 알 수 없으니 기계적 중립을 지킬 도리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먼나라 이웃나라』가 극도의 리얼리즘 또는 무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도 아니고.

송병락의 『부자국민 일등경제』를 만화로 만들면서, 이원복은 과거 자신이 썼던 다른 만화들에 비해서도 별 볼일이 없는 작품을 그려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과연 이 극우 논객의 글을 이해나 하고 썼는지 의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챕터의 시작, 연결 안 되는 컷. 자기가 그린 거 맞는지, 그리고 나서 읽어보기는 했는지 의문이 되는 것이다. 원저가 그렇게 중구난방이라면, 그런 원저를 구별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원복의 『사랑의 학교』 서문을 보면, 그가 유럽에서 10년을 넘게 살면서 다시 한국적인 것들이 옳다고 생각되게 되었다는, 한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고 복간해서 내놓은 것이 『사랑의 학교』다. 내용은? 필자가 어릴 때 보던 아이들 ‘교훈서적’ 의 내용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유치한 언사의 한마디가 꼬박 꼬박 나오는 이 작품은, 이 작품이 그려진 시대에는 어쨌는지 몰라도 지금은 유치하기 그지없으니, 이런 작품을 이제 와서 복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이원복이 한국 정치에 보여주는 냉소는? 언제나 그는 양비론으로 상황을 비켜간다. 특히 주간조선에 연재했던 『현대문명 진단』에서 보여주는 양비론은, 그가 기회주의적 지식인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전형적인 구조가 ‘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도 맨 마지막에 ‘한국은 이만큼이나 하냐...’식의 전형적인 ‘엽전론’이 펼쳐지고 있다. 이 내용들에서 보여지는 양비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미 강준만이나 진중권같은 사람들이 여러 지식인을 비판하면서 충분히 씹어 놓았으므로 더 이야기하는 것은 생략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은, 개똥철학의 집합소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가령 시장에 나온 지 3년밖에 안된 김치냉장고가 기존 냉장고를 누른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극성스러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연 이 사람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신봉하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아니면 김치를 못 먹고 살만큼 돈이 없어서 냉장고에서 김치 냄새를 맡아 본 일이 없던지. 시위현장의 과격성 등을 통해서 한국인의 특징을 파악하겠다는 시도는 전형적인 50대 아저씨의 개똥철학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도 모자라는 것이,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수공업자, 상인, 무당, 승려, 노비, 서얼을 제외하면 누구나 다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에도 ‘무과’에는 평민들이 응시할 수 있었다. 물론 응시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붙는 것은 아니니 계급제 사회에 가까웠던 사회 자체의 성격이 변하지야 않겠지만, 개똥철학과 주워들은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원복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저 ‘아마추어’ 이외에 ‘만화기술자’ 라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그가 초기에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보여주었던 그 강력한 흡입력을 기억하는 필자로서는, 인정하기 싫으나 그가 우리나라에서 능히 손꼽을 만한 흡입력이 있는 만화를 그릴 줄 아는 작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그가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은 그럭저럭 잘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유럽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리해 놓았으므로 주워듣는 것만으로도 ‘정상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었고, 또한 10년씩이나 살았던 곳이므로 그곳에 대한 이해도 나름대로 상당했을 것이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하는 말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편』의 경우 그의 장기인 역사와 사회를 넘나드는 쉬운 설명이 전혀 되고 있지 않음을 생각해 보라. 그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연구하고 흡수할’능력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차라리 시오노 나나미같이 유럽이야기나 계속 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어쩌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주류적 가치관인 민족주의에 물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원복이 이회창이 ‘高’자를 뛰어넘는 장면을 동창회보에 그린 이유도, 그가 극우적 가치관을 체화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주변에서 ‘그림 한번 그려봐라’ 이런 류의 이야기에 적당히 그림 한번 그릴 생각으로, 여기에 주변 분위기도 그렇고 하니 그 가치관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가망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기 나름의 동문을 위한 순수사랑 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대 총동창회보 4월호에 게재된 이원복교수 만평.

ⓒ서울대 총동창회보


이상의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를 '극우적 인사'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진짜 극우인 조갑제가 슬퍼한다. 이원복은 나름대로 유럽에서는 쿨 하게 ‘유쾌한 자유주의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세계에서는 그것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그런 ‘쿨’ 한 삶을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자기가 그런 유럽의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나. 그의 정신적 미성숙과 한국의 정치적 격변성은 이원복이라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듯하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쿨’ 하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유럽에서 그 세계의 주류를 따라 갔듯이 이 세계에서도 주류를 따라가면서 이것이 ‘쿨’ 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의 문제점은, 그가 만화판 구석에서 개똥철학이나 읊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워낙에 공부한 사람이 모자라는 만화판에서 교수와 유학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에 업고 괜찮은 만화 실력으로 너무 책을 많이 팔았다는데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계몽의 대상’이어야 할 ‘유치원’정도의 멘탈리티를 지니고 있다.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믿는 그런 어린아이들 말이다. 어린애들이 손에 위험한 무기를 들고 있을 때는? 뺏어야 한다. 위험하다고 가르쳐야 한다. 문제는, 그가 너무 늙어서 계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추방의 대상’에 어울린다는 점일 것이다.

월간 [텍스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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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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