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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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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광수생각'/박광수 : “광수생각”을 읽고는 싸우지 않는다
이 만화 봤어? 03/03/25 04:03 김태권
만화 “광수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좋아하는 사람은 그 좋은 이유를 대지 못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 싫은 이유를 대지 못한다. 그리하여 “광수생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적다. 이는 어떤 연유인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이유를 대지 못한다함은 무슨 의미인가. 사실 “광수생각”은 매력있다. 잘 만든 만화이다. 공들이지 않고 제작한 듯 보일 정도로, 많이 공들인 작품이다. 쉬운 그림에 눈이 편하고, 평이한 내용에 머리가 편하며, 친숙한 주제에 마음이 편하고, 구하기 쉽기에 몸까지 편한 만화이다(사실 얼마나 구하기 쉬운가. 매일 “광수생각”을 읽겠다 신청만 하면, 집에 가져다주는 신문은 공짜에다 덤으로 자전거나 TV까지 주는 세상이니).

그러나 “광수생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말을 아낀다.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구매할지언정 비평가로서 발언하지 않는다. 지갑은 열고 입은 열지 않는다. 히트상품으로 상은 받지만 작품으로서 비평받지 않는다. 왜일까.

“광수생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게라고, 나는 생각한다. “광수생각”의 조심스러움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조신하지 못하게 나서고 싸우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광수생각”을 보아가면서까지 굳이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따지고 싸우고 다치기 싫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차갑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따뜻하다는 주장은 기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도리어 “광수생각”을 싫어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까닭이 싫어하는 사람의 싫어하는 바다.

싫어하는 사람이 싫은 이유를 대지 못한다함은 그러므로 소통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이다. 싫은 이유를 댄다하더라도 서로 납득하지 못하므로 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나는 “광수생각”의 그 따뜻한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더러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나는 세상을 따뜻하게 볼 수 없는 이유를 말할 것이다. 힘센 자가 약한 자의 살을 먹으며, ‘조심스럽게’ 침묵하는 자에게 그 살코기 한 첨을 떼어주는, 이 사회의 현실을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을 따뜻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같은 현실을 보고 있기에.

“광수생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그 세상과, 싫어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그 세상은, 같은 세상이다. 유리잔 안에 물이 반 밖에 없는가, 아니면 반이나 남았는가? 힘센 자에게 먹히는 약한 자는 살코기가 반 밖에 안 남았는가, 아니면 강한 이빨에 그렇게 뜯겼음에도 아직 반이나 남았는가?



브레히트는 ‘밤의 안식처’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1연에서

‘…잠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희사금을 요구하고 있’는 착한 사내를 소개한다. 시는 이렇게 계속된다. ‘세계는 그것으로 바꿔지지 않는다 / 인간들 서로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 착취의 시대가 그것으로 단축되는 것도 아니다 /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밤의 안식처를 얻어 / 그 밤 동안만은 바람을 피하고 / 그들 위에 쌓였을 눈이 거리에 떨어지기는 한다‘(2연)

아직 따뜻한 희망은 있고, 세상은 그래도 살기 좋은 곳이며, 잔 안에는 물이 반이나 남은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멈추지 않으며, 시는 이렇게 끝난다.

‘몇몇 사람들이 밤의 안식처를 얻어 / 그 밤 동안만은 바람을 피하고 / 그들 위에 쌓였을 눈이 거리에 떨어지기는 한다 / 그러나 세계는 그것으로 바꿔지지 않는다 / 인간들 서로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 착취의 시대가 그것으로 단축되는 것도 아니다.’(4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착한 사내의 온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이 세계와, 부질없는 노력만 있을 뿐 차갑기만 한 이 세계가 갈라지는 지점. 이 지점은 세계관과 세계관이 마주보는 장소이다. 단테의 말을 빌어 - 이곳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소통의 희망을 버려라, 대화의 희망을 버려라. 시의 2연과 4연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다.

그러나 단절의 골짜기를 보며 소통불가능의 절망에 빠지기 앞서, “광수생각”이 가지는 힘을 생각해보자. 나는 지문과 만화가 연결되는 방식에서 그 힘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

지문은 “광수생각” 만화의 밑에 붙는 한 줄의 글이다. ‘....였으면 좋겠습니다 광수생각’이라는 한 줄의 글이 붙어, 교훈적인 내용을 전한다. 지문은, 세상은 그래도 따뜻하다는, 이래저래 자주 접하는 교훈이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잔잔한 감동’이요, 싫어하는 사람들이 꺼리는 ‘기만’이다.

그러나 “광수생각”의 이데올로기적 힘은 사실 지문과 만화가 연결되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지, 지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문만으로 다루는 내용은 매일 듣고 매일 잊는 어찌보면 시시한 명제들이다. 매일 듣는데 매일 잊는다는 사실은, 그 명제들이 그 자체로는 무척 얄팍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지문만으로는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그런 지문을 만화와 병치하면, 깊은 의미가 생긴다. 이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지문은 만화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만화와 충돌하여 새 의미를 짓는다. 지문은, 만화를 만나 비로소 제 의미를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화 역시 지문을 얻어 의미가 깊어진다. 익히 알고 있던 우스개를 평이하게 그려놓은 만화가, 한 줄의 날카로운 지문을 만나, 세상보는 눈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요컨대 만화와 지문이 서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여 제3의 의미를 만든다. 이것은 한국에서 익숙한 방식이 아니며, 깊은 인상을 주고, 그러므로 큰 힘을 가진다.



사실 이것은 20세기 초반의 예술가들이 ‘몽타주’라는 형식을 통해 얻으려던 바이다.

하트필드는 서로 다른 여러 사진들과 설명이 부딪쳐 다른 의미를 짓는 것을 추구했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의 각 컷들이 충돌하는 것을 추구했다. 에이젠슈테인은 유성영화의 도입을 보며, 언젠가 대사와 영상이 충돌할 것을 기대했다. 몇몇 감독들은 이것을 실험했다. 이 충돌을 통해 언표되지 않은 ‘새로운 의미’가 나타난다. 얼핏 “광수생각”에서 만화와 지문이 충돌하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그러나 그 작가들이 추구한 것은 “광수생각”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몽타주는 원래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충돌에서 생긴 ‘새로운 의미’로 꺾어버리려는 시도이다. 하트필드는 독일 좌파예술가였고, 기존의 예술이 주는 위안을 뒤집어 사람들이 불편해하기를 바랐다. 에이젠슈테인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화감독인데, 헐리우드 고전양식의 ‘잔잔한 감동’을 ‘기만’으로 여기고,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광수생각”은 비슷한 형식으로 반대되는 내용을 추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아마도, 트로츠키가 ‘불균등한 결합 발전’이라고 불렀던 사회 현상과 유비해 볼만한 일일지 모르겠다. 이 이론은, 산업과 정치, 문화가 모두 어느 정도로 발전한 사회로부터, 일부 기술이나 일부 제도만 따다가 미발전한 사회에 심으면, 그 미발전한 사회의 나머지부분이 그 원래의 발전한 사회처럼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 보수적으로 돌아선다는 것을 시사한다.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로부터 일부 제도만 들여온 독일은 되레 더욱 보수화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고, 민주화된 서유럽으로부터 공업만 들여온 러시아도 도리어 반동체제가 강화되었다고 트로츠키는 썼다. 사회를 놓고 나온 이론이지만, 작품을 놓고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무척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여기서는 깊이 다루지 못하여 아쉽다.

아무튼 “광수생각” 역시 몽타주와 각 요소의 충돌만 비슷할 뿐, 그 전체는 도리어 더 보수적이며, 더욱 따뜻한 시선을 강화하고 있을 뿐이다. 절벽의 저켠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기에,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기 위해 만들어진 형식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되, 외려 따뜻한 시선을 공고히 하는 셈이다. 옛말에,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골짜기 이쪽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던 형식이, 골짜기 저쪽에서는 편안하게 위무해주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런 작품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익히 친숙하고 편안한 형식을 취하여, 도리어 사람을 불편하게 괴롭히는, 그렇게 괴롭혀서 결국은 모든 따뜻함의 시선을 거두고, 세상의 차가운 부분을 직시하게 하는, 그런 내용을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통불가능이라는 절망도 넘어볼 수 있지 않을까 - 나는 얼핏 상상한다.

그러나 그런 작품, “광수생각”과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거울에 비춘 듯한 그런 만화를 접한 적 없으므로, 상상은 아직 허황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 허황함마저, 희망으로 삼기엔 너무 가냘프다.

설령 그런 만화가 나온다한들, 사람들이 그 내용을 받아들일까. 숨죽여 사는 것을 귀히 여기고, 싸우지 않는 것을 희망하며, 힘센 자의 이빨에 제 살이 뜯기는 순간에도, 아직 자신에게는 살이 반이나 남았음을 감사히 여기고 침묵하는 사람들.



“광수생각”은, 파쇼적인 신문에 연재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훨씬 보수적인 만화들도 많고, “광수생각” 그 자체 그다지 보수적인 만화라고는 별로 생각않는다.

차라리 “광수생각”은 조심하며 삼가며 침묵하는, 탈(脫)정치의 만화이다. 보수의 문제는 “광수생각”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싸우기 싫은 마음에 좋은 이유를 대지 못하는 사람들과 주로 연결된 문제이다.

사람들의 독서 안에서, “광수생각”은 보수적인 만화로, 반동적인 텍스트로 다시 태어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광수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새로울 것도 없는 글은 당신에게 그저 지겨웠겠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광수생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이 글은 당신에게 의미가 없다.

당신은 내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감히 당신의 동의를 바라지 않는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갑자기 인기가 식어버린 합리적 계몽주의자가 되기를, 나는 별로 바라지 않는다. 한 때나마 당신을 불편하게 했던 ‘대화하는 이성’과 ‘진보에 대한 신뢰’를, 당신은 이미 ‘철 지난 모더니즘’이라 이름붙은 식기에 담아, 마음의 냉장고 깊은 곳에 넣고는, 잊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신선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제 맛을 내는 철이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스런 아침 식탁에는 “광수생각”이 빠지지 않는다. 당신은 세상의 차가움에 온몸이 얼어붙으면서도, 그래도 세상은 따뜻한 곳이라고 믿고 싶기에, 차가운 세상을 싸워가며 바꾸는 것보다는 당신의 몸을 그렁저렁 녹여가며 살고 싶기에, 식탁에 오른 “광수생각”이라는 따끈따끈한 국물 한 사발을, 세상의 혹독함에 얼어서 곱은 양손으로 잡고 마시며, 그 모락모락 다사로운 기운으로 시린 양 볼을 녹이며, 느꺼울 것이다.

싸우기 싫어하는 당신과 싸우기 바라지 않는다. 어차피 소통을 거부한 것은 당신이기에.

나는 단지 당신이 조금 더 불쾌하고 조금 더 불편했으면 좋겠다. 브레히트의 ‘객관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라는 시는 이렇게 마친다.

‘아 벗들이여 당신들 안전한 사람들이여 … 우리들이 / 당신들의 적이란 말인가 부정을 적으로 삼고있는 우리가? … 우리들은 기대한다 방관자들에게 / 적어도 부끄러워할 줄이나 알라고.’

나는 시를 쓴 브레히트나, 그리고 시를 우리말로 옮긴 김남주 시인같은 자격은 없지만, 그리고 나 역시 이 시를 보면 당당하기보다 불편해지지만, 그래도 당신의 불편함을 위해 이 시를 여기 적는다. 나는 “광수생각”을 좋아하는 당신의 불편함을 희망한다. 어느 새벽, 그 불편함에 잠시 눈을 떴을 때, 다시 잠들기 전 잠시만이라도, 당신의 따뜻한 침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를 기대하며.

[텍스트]에 실렸던 글입니다.
(1)
: http://dugoboza.net/tt/rserver.php?mode=tb&sl=63 (copy)
신났니07/09/26 23:53 
좋은 글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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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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