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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팔레스타인'/조 사코 : 팔레스타인을 전해 듣다
이 만화 봤어? 02/11/01 04:08 두고보자





지금은 아주 약간 덜하지만, 몇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확실한 역할 모델로 제시되었던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자식교육 잘시킨다는 유대인 부모들의 현명함이든, 남녀구분없이 군대에서 복무하며 '적들의 영토에서 조국을 지키는' 위용이든, 고난을 이겨내고 세계의(즉, 미국의) 정/재계를 쥐고 흔드는 강력한 힘으로서의 민족성이라든지...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이 나라,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그 민족에 대해서 어렴풋한 장미빛 상상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 이상한 대리만족의 쾌감은, 나치에게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험악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재)건국을 이룩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한독립만세 투의 감동과 성취감을 불러일으키도록 고안되어 있었다(솔직히, 마치 한동안 이 나라 전체가 이스라엘 빠돌빠순이들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 어디갔나? 알께뭐람. 누구도 헐리우드 영화에서 '정의의 용사'에게 총맞고 죽어버린 엑스트라의 이야기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화면에서는 1초 남짓 등장했다가 '으윽'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제복입은 그 사람도, 알고보면 다 처자식있고 인생의 우여곡절 다 겪고, 피치못할 사정때문에 주인공과 대립하는 입장이 되었던 것일 터인데 말이다. 심지어, 사실 그쪽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당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아무도 원래 이스라엘 (재)건국 이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인들이 사이좋게 잘만 살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PLO의 자살폭탄 테러를 보며 혀를 차기나 할 따름이다.

조 사코의 '만화 저널리즘' 작품인 [팔레스타인]은 바로 그 곳에서 그 사람들을 보고 들은 체험담이다. 첫번째 인티파다(무장독립운동)의 불길이 서서히 사그러들 무렵 가자 지구를 방문하여 두 달동안, 그들과 함께 또는 따로 살며 수백여건의 인터뷰를 수집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티파다에 관한 영웅담이 아니다. 불타는 순간들에 대한 극적인 다큐멘타리도 아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인터뷰를 수집하여 인티파다에 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현재 그들의 모습 자체에 눈길을 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하여 불길은 잦아들었고, 다시금 폭압적 지배 속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상. 인티파다 당시 갑자기 폭발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서방의 기자들이 쏟아져 들어와서, "이제는 세상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겠지, 이 폭력을 해결해주겠지" 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품었다가, 다시금 두터운 무관심의 벽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리게 된 시점. 그리고 지금의 그러한 처지를 심지어 슬퍼할수조차 없는 시점을 다루고 있다. 덕분에 이 작품은 선정적인 드라마가 아닌, 너무나 일.상.화.된 하루하루의 폭력성에 대한 민속지학적인 보고서를 만들어내도록 하고야 만다.

취재와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본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다. '이 작가는 선뜻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라는 식의 말은 이러한 지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코멘트다. 분명히 사코는 팔레스타인인의 처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본작을 만들어냈고, 단지 그 방법으로 저널리즘의 몇가지 방법론을 들고 온 것이다. 픽션화를 하지 않고 직접 인용으로 진행하는 방식, 반대 입장의 취재자료도 삽입하는 방식, 취재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 등의 저널리즘 기법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해질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 현장감으로 인하여 더욱 자신이 이번 취재를 통해서 느낀 입장을 확실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땅을 뺏기고, 올리브나무를 절단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민족적, 종교적, 계급적으로 하대받으면서도 어쩔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은 분명히 팔레스타인인인 것이다. '또 한명 찾아온 그렇고 그런 서방의 기자'에게라도, 그들은 차와 음식을 내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자 자신도 ‘불의를 못참고 세상에 진리를 알려주고자 하는 영웅’일 필요가 없다. 그냥 자신의 편견에 혼란스러워하고, 불안에 떨고, 불편함에 투덜거리는 생활인이면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진짜 힘은, 저널리즘의 방법론을 만화라는 매체와 결합시킨 점에서 나온다. 작가(기자)는 하나의 캐릭터로서 살아움직이며 취재를 하고, 글과 그림은 소리와 현실속의 장면으로서 기능한다. 사코의 만화 스타일은 여러 차원의 코드들을 효과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사람과의 만남, 그들의 경험을 재연할 때는 주류 픽션 만화같은 이야기 흐름으로 스토리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다가 어떤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인터뷰 대상자의 대사 만으로 모든 것을 구술하도록 거리감을 두는, 스트레이트 인터뷰를 넣는다. 현재시점에서 벌어지는 데모의 한복판에서는, 신문의 글그림 배합과도 같은 지면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가자 지구의 어떤 골목을, 사진 전문 저널의 넓은 화면과 작은 캡션의 형식으로 묘사해낸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거리를 거닐고 있는 관광객으로 만든다. 여러 기법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자 취재수첩을 훔쳐보도록 하는 기법이다. 한국판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살려내지 못했지만, 원래 이 작품은 모든 글씨가 손으로 쓰여져 있어서 마치 기자의 시시콜콜한 여러 노트들을 그대로 훔쳐보는 듯한 묘한 현장감이 있다. 이런 여러 기존 저널리즘의 효과적인 기법들이 만화의 화법과 효과적으로 녹아들어가서, 수많은 일화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만화 팔레스타인에서는, 소리가 난다. 작가의 글 그림 편집 방식은 만화 속에 다양한 '소리'를 효과적으로 하나 가득 담아내며, 때로는 건조한 나레이션, 때로는 격렬한 현장음과 긴박한 절규를 삽입한다. 때로는 보도 스타일의 나레이션으로, 때로는 대사로, 그리고 때로는 밖으로 소리내지 않는 절규로 가득 울려퍼진다. 특히 데모 진압현장의 아수라장을 묘사할때의 칸 사이사이로 들어가는 외마디 절규들은 다른 어떤 보도양식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묘한 현실감을 전달해준다.

사코는 좋은 만화가이자, 저널리즘의 미덕을 깨우치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작가가 구사하는 현란한 만화와 저널리즘의 결합기법들의 의도에 따라서 이야기 속 고문의자 위에 쳐박히기도, 한발짝 떨어진 기자의 낮선 눈을 취하기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집에서 만화책을 펼쳐들고 있는 먼 나라의 무관심한 일반 대중이 되기도 한다. 인터뷰 대상자들의 수많은 다양한 사연과 일화들이, 전체적인 하나로 뭉뚱그려지지 않.은.채.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독자는 하나의 현실을 구성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서 현실을 구성해내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말로 이 작품이 팔레스타인인의 처지를 알리고 그들의 인권보호를 성취해내는 목표를 이루기에는 불리함 투성이다. '서방의 그렇고 그런 기자' 조 사코, 그의 단점은 단지 소심하고 속물스러운 것 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의 저널리즘을 만화로 만든다! 그것의 의미는, 그의 저널은 한정된 서가의 한정된 유통방식으로, 극히 한정된 독자들에게만 전달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만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그 범용적인 접근성이라는 능력과는 완전히 별개로, 실제로 작품으로서의 만화 - 특히 진지한 작품으로서의 만화를 읽고자 하는 (혹은 읽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것이 우스운 현실이다. 93년 1월에 이 책의 첫 연재가 시작된 이래, 그는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 작품을 연작으로 발간했다. 그리고는 96년에 나온 단행본 두 권으로 미국 출판상을 수상했다. 그리고는 2001년에야 다시금 한권짜리로 묶여서 그것이 한국이라는 변방의 나라에도 소개되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은 절망적인 자살폭탄테러의 땅으로 변모(?)했고, 상황은 악화일로에 처하고 있다. 여전히 '일상적'으로.

물론 만화가 아닌 다른 방식의 진심어린 보도와 증언들도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은,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적용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같이 만화이기 때.문.에. 더욱 훌륭한 작품이, 단지 만화이기 때.문.에. 널리 유포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 - 즉 주류 만화의 한심스러운 위상에 더욱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운좋게도, 나는 만화독자다. 그 덕분에, 조 사코가 전해주는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를 전해들었다. 내가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열심히 그 목소리를 주변에 계속 권하고 확산시켜보려고 해 볼 것이다. 작가가 얻어마신 그 수많은 차에 대한 보답은, 독자들이 모두 같이 해주어야 할 몫이다. ***

짧은 사족 하나: 이후에 조 사코는, 보스니아에 갔다. 이번에도, 인종청소와 민족전쟁의 불길이 한번 피어올랐다가 잠깐 잠잠해진 폐허를 방문했다. 비평에서 <팔레스타인>의 아성을 멀찌감치 눌러버린 그의 <안전지대 - 고라제이드>가 과연 언제쯤 한국에 선보일지, 두고볼 일이다.

짧은 사족 둘: 유대인의 이야기를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92년에 퓰리쳐 특별상을 받았고, '만화도 이 상을 탈 수 있다'라고 물꼬를 터주었다. 원래 그 상이 저널리즘에 관한 것을 강조하는 상임을 감안할 때, '팔레스타인'은 그 정도의 지명도를 얻지 못한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 아니, 미국에서 유대인의 위치를 생각하자면 거의 '수상한' -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짧은 사족 셋: 중간에 나오는 ‘신뱃의 토끼잡기’ 일화는, 사실 한국에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오래전부터 떠돌던 유머다. 다만, 이스라엘의 신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기부(아, 지금은 경찰이라고 바뀐 버전이 더 많다)로 주인공만 다를 뿐.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적 지배의 일상화는, 만국공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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